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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제국은 일본인의 사상도 탄압했습니다
게시물ID : freeboard_19938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노노카
추천 : 0
조회수 : 5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8/11 11:53:35

저희어머니가 재일교포 3세대 출신이고

아버지는 한국사람이에요

그래서 당시 일본제국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어머니가 증조부모님들에게 많이 들었다고 했어요

일단 일본제국에서는 고문을 하고 사상을 탄압하던

부류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특별고등경찰. 약칭 특고라고 불리며 고등계 형사로 불렸습니다

또다른 하나는 헌병이었습니다. 이들이 어찌나 악명이 높았던지 영어권에서도 켐페이타이라는 고유 명사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일본인이라고 이런 일본제국의 탄압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당시 일본제국은 일본인들에게도 국가에 대한 비판 없는 맹목적인 충성을 바랬습니다

자유민권운동과 언론도 탄압해서, 일본의 언론과 출판물은 검열받았습니다

만일 언론이나 출판물에서 자유를 떠들거나 제국주의를 비판하면 즉시 특고에게 끌려가 매국노, 비국민 취급 받았던 게 일본 사회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어도 사회주의, 반전운동, 무정부주의 등 반체제적인 활동을 하거나 파업이나 노동운동같은 걸 벌이면 그즉시 특별고등경찰에게 끌려가 고문당하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되었습니다

특히 1922년 창당한 일본공산당은 반식민지와 반제국주의적 성향 때문에 특히 특별고등경찰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고, 독립운동가들에게 밀정을 풀었던 것처럼

일본공산당 같은 반체제단체에도 당연히 특별고등경찰은 간첩을 풀었습니다

식민지 지역에서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했고 일본 내지에서는 주로 일본인 사상범과 정치범(특히 사회주의자)를 탄압했습니다

특별고등경찰은 일본인들에게도 무자비한 사회, 정치적 탄압을 가하고 고문을 가했기에 일본인들에게도 악명이 높았고 원성도 높았습니다

일본인에게도 고문을 가했으며 선고문후조사 방식이어습니다

1942년 특별고등경찰이 사실을 날조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만들어낸 것처럼, 일본에서도 1942년 요코하마 사건을 일으켜서 사실을 날조하여 필화사건으로 63명을 체포하여 5명을 고문으로 사망하게 했습니다

이사건은 반전사상을 지닌 것으로 의심되는 카와다 부부를 가나가와현 특고경찰이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일이 점점 커졌습니다

이때문에 특별고등경찰은 일제가 패망한 후 특별고등경찰이었던 사람들은 일본의 민간인들에게 길거리에서 얻어맞은 일이 잦았습니다

헌병은 특히 특별고등경찰보다도 더 악랄했습니다

헌병들은 자국민과 식민지민과 일본 육해군들에게 모두 악명이 높았습니다

헌병들이 민간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고압적이고 안하무인으로 유명했으며

특별고등경찰처럼 일본인들에게도 무자비한 사회적 정치적 탄압을 가했기에 이들도 일제 패망 후 민간인들에게 길거리 집단 린치 대상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조선인, 중국인, 심지어 자국 민간인들에게도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아 고문하여 허위자백을 받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심지어 패전 후에는 일본의 패잔병들조차 우릴 갈군 헌병×끼라며 두들겨팰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일본군 장교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비겁한 자들이었습니다(강약약강)

이들이 취조 방식은 대체로 이랬습니다.

1. 일단 처음 붙잡혀오면 본적, 주소, 이름, 가족관계, 직업 같은 걸 묻습니다

2. 취조방식은 고문, 협박, 회유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건데, 회유를 안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고문하지 않더라도 정서적으로 학대했습니다

3. 신체적인 학대도 학대지만 정신이 망가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물론 모욕과 조롱, (여자의 경우) 성추행, 윽박지르기 등등 정신적으로도 학대했습니다

4. 일요일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더이상의 취조나 고문은 없었습니다

5. 당연한 일이지만 자 살시도는 금지입니다. 특별고등경찰의 경우는 고문을 하더라도 피의자를 죽게 하려 들지는 않았습니다. 유가족의 항의나 뒷말이 나왔기 때문이죠. 의도치 않게 죽은 경우 심장마비 등으로 사인을 은폐했습니다

6. 감옥 환경은 열악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규칙을 어기지 않는 이상 고문을 하지는 않았기에 오히려 경찰에서 검찰로 빨리 이송되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본인 사상범들의 회고에 따르면 형무소에서 소금을 안줘서 기운을 뺐다는군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도 흔했는데 병감에 가거나 병보석으로 나왔습니다

7. 고문을 한 다음 취조실 의자에 앉혀 협박과 회유를 하며 취조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원하는 답이 나올때까지 고문했습니다.

8. 심각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정신이상자 연기를 하면 풀 려나올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경우는 일경이 본적을 묻자 "나의 본적은 아버지 자×다"라고 하고 일경이 주소를 묻자 "나의 주소는 어머니 보×다"라고 하자

일경은 정신이상자로 간주하고 돌려보냈답니다

9. 순사에 대한 오해가 많은데, 아무리 순사라고 해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이유없이 무조건 달려들어 때리는 건 아닙니다.

순사도 사람인데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알지도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달려들어 이유없이 두들겨팰 이유는 하등 없었습니다

10. 독립운동은 고등계 전담이었고 나머지는 사법계 소관이었습니다. 물론 사법계도 고문은 있었지만 고등계가 더 악랄했습니다.

특히 아동성범죄나 아동유괴 등등은 그당시 사법계 형사들에게도, 일본인 형사들에게도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런류의 강력범죄자들은 정말 사법계 형사들에게도 인간취급을 못받고 경멸과 혐오를 받았다고 보면 됩니다

11. 고등계라고 해도 무조건 취조받으려 오는 사람한테 다 고문을 가한 건 아닙니다. 상황의 경중에 따라 다릅니다. 학대는 안당하고 며칠이나 장기간 조사받고 증거불충분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자료를 찾으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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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일본 제국도 자국민을 탄압했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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