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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그것은 치사량의 사랑이었다
게시물ID : lovestory_934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50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8/12 14:57:21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안희연, 플라스틱 일요일




이 방 창문에선 나무들이 아주 가까이 보여

가끔 흔들리던 나무의 눈빛이 검게 변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해


종이로 만든 새를 날려 보낸다

기도는 새가 될 수 있다고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을 보며

제발 나를 찌르지 말아달라고 말한다


맹수를 쏘고 꿈에서 깨어났어

아니, 번번이 죽은 짐승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쏘았지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겠어

손에 들린 가위와 머리카락


안으로 잘 닫혀 있는 물고기들처럼

물에 가까운 얼굴을 위해

두 눈은 더 오래 흘러넘쳐야 하는지 모른다


왜 아무것도 살아 움직이지 않는 거야?

파랗게 질린 입술로 올려다보는 저녁

날아가던 새떼가 멈춰 있는 잘 깨지지도 않는 하늘


외투가 먼저 돌아와 있는 방에서

우리는 익숙하게 마주 앉아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에겐 따뜻한 잠이 필요했다

주저앉아 울 햇볕이라도 좋았다

 

 

 

 

 

 

2.jpg

 

신해욱, 간이식탁




네가 나에게 식품과 젓가락을 나누어 주셔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3부작의 꿈을 모두 꾸고 나니까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3부에 걸쳐 내가 한 일이라곤

매번 뒤늦게 도착해 끝을 보며 울어버리는 것뿐이었지만


그런데 이해가 안 된다

왜 너의 눈에서

내 눈물이 앞을 가리는 걸까


나는 너를 꿈에서도 그리워 한 적이 없는데


똑같은 축하 케이크를 반복해서 자르며

너의 뒷모습은 언제나 박수를 치고 있었는데

 

 

 

 

 

 

3.jpg

 

구현우, 드라이플라워




백야 속에서 네가 반쯤 웃고 있었다

매혹적인 이미지 외설적인 향기 몽환적인 목소리

너의 모든 것을 훔치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아주 잠깐 너를 꽉 안아주었다


그것은 치사량의 사랑이었다

나는 네가 아름다운 채 살아 있길 바란 적은 없었으나

아름다웠던 채 죽기를 바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4.jpg

 

오병량, 묻다




종일 마른 비 내리는 소리가 전부인 바다였다

욕실에는 벌레가 누워있고 그것은 죽은 물처럼 얌전한 얼굴

구겨진 얼굴을 거울에 비추면

혐오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미개한 해변 위에 몇 통의 편지를 찢었다

날아가는 새들, 날개 없는 새들이 폭죽처럼 터지고

파도가 서로의 몸을 물고 내 발끝으로 와 죽어갔다

한 번 죽은 것들이 다시 돌아와 죽기를 반복하는 백사장에서

떠난 애인의 새로운 애인 따위가 그려졌다 다시

더러워지고는 했다


그대의 손등처럼 바스락거리는 벌레가 욕실에 있었다 벌레는

곱디고운 소름 같은 어느 여인의 잘라낸 머리칼 같았다

나는 위독한 여인 하나를 약봉지처럼 접고

오래도록 펴보았다 많은 것이 보이고

슬펐으나 한결같이 흔한 것들 뿐이었다


나는 애먼 얼굴을 거울 안에 그려두었다

잘린 머리칼을 제자리에 붙여주면 어여쁘고 흉한

평화라고는 찾아볼 수없는 위독한 미소의 여자가

커다란 가위를 든 채 거울 밖에 있었다


이 위태로움을 어찌 두고 갈 수 있을까? 그대여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라고 쓴 그대의 편지를

두어 번 더 기억하며 해변을 따라 걸었다

슬픔에 비겁했다, 생각할수록 자꾸 여며지는 백사장

말하자면 그건 소용없는 커튼, 소용없는 커튼은

창밖을 곤히 지웠다 도무지 펄럭이지 않았다


파도는 죽어서도 다시 바다였다

죽을힘을 다해

죽는 연습을 하는 최초의 생명 같았다

 

 

 

 

 

 

5.jpg

 

김충규, 꽃멀미




새가 숨어 우는 줄 알았는데

나무에 핀 꽃들이 울고 있었다

화병에 꽂으려고 가지를 꺾으려다가

그 마음을 뚝 꺾어버렸다

피 흘리지 않는 마음, 버릴 데가 없다

나무의 그늘에 앉아 꽃 냄새를 맡았다

마음속엔 분화구처럼 움푹 패인 곳이 여럿 있었다

내 몸속에서 흘러내린 어둠이 파놓은 자리

오랜 시간과 함께 응어리처럼 굳어버린 자국들

그 자국들을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때

깊고 아린 한숨만 쏟아져 나왔다

꽃 냄새를 맡은 새의 울음에선 순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의 힘으로 새는

사나흘쯤 굶어도 어지러워하지 않고

뻑뻑한 하늘의 밀도를 견뎌내며 전진할 것이다

왜 나는 꽃 냄새를 맡고 어지러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늘에 누워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구름이 이동하고 있었다

구름이 머물렀던 자리가 움푹 패여

그 자리에 햇살들이 피라미처럼 와글와글

꼬리를 치며 놀고 있었다

아니, 황금의 등을 가진 고래 한 마리가

물결 사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마흔도 되기 전에, 내 눈엔 벌써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사후(死後)의 어느 한적한 오후에

이승으로 유배 와 꽃멀미를 하는 기분

저승의 가장 잔혹한 유배는

자신이 살았던 이승의 시간들을 다시금

더듬어보게 하는 것일지도 몰라, 중얼거리며

이 꽃 냄새, 이 황홀한 꽃의 내장

사후에는 기억하지 말자고

진저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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