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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당신이 짙어지면서 내 몸은 묽어져 갔다
게시물ID : lovestory_935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56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8/16 21:53:16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안지은, 생일 축하해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 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때에 당신은 살아 있구나, 눈치 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 시간 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 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2.jpg

 

김행숙, 낮




너의 주위는 몇 개의 눈동자가 숨어 있는 떨기나무 같은 것

가시들은 눈동자의 것

덤불의 것


너의 주위는 밝다


하루 종일 불을 켜두었다

시간은 인공호수 같다.


열두 시간과 열두 시간이 똑같았다

사랑은 어둠을 좋아했으므로

사랑하지 않는 날들이 지속된다

 

 

 

 

 

 

3.jpg

 

심강우, 색




사태가 났다

무너져 내린 단풍의 잔해로

욱수골 저수지 가는 길이 막혔다

붉은색이 엷어져 가는 세월이었다

당신과 나눈 말들이 몇 번 피고 졌는지

옹이로 갈라진 내 몸피를 보면 알 수 있을는지

물의 냄새에는 여태 지워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저장고의 시간은 묵은 화약처럼 푸슬푸슬 흘러내린다

저수지 가는 길, 검붉게 찍힌다

짙은 색들은 서로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

계절이 만나는 둑길, 겹쳐진 색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방금 바람이 복원한 파랑을 내려다본다

경사진 마음에 희미한 목소리들이 찰랑거린다

내 몸의 낡은 색들이 물에 풀려 간다

시간은 색이다, 아주 오래 전

당신이 짙어지면서 내 몸은 묽어져 갔다

내 몸이 그린 곳곳에 당신의 바탕색이 있었다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묻어나면서 나는 이제

채도와 명도가 너무 낮은 색

어느덧 저수지에 또 다른 색이 어린다

무너져 내린 단풍이 여기까지 밀려온 것일까

거기 초록의 웃음 하나가 하얀 미소에 스며드는 걸

본다, 내가 물들었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내 온몸을 다 그려도 아깝지 않았던 색, 당신

 

 

 

 

 

 

4.jpg

 

하재연, 사라진 것들




뜨거운 다리미가 사라지고

하얀 셔츠에는 자국이 남았다

그것이 마음에 든다

한 번도 신지 않은 신발처럼

침대 밑의 구두처럼

나의 발목은 가느다랗고 예쁘다

누구에게라도 선물할 수 있다는 듯이

다른 치수를 주문했다는 듯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채

배달된 다이어리가 마음에 든다

검은 문신을 기다리는 리틀 톰과 같이

종이들의 갈색 피부가 지닌 조용함

우리가 바라는 것은

재봉틀의 스티치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운 자국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는 뚜렷한 세계

열여섯 살에 팔아 치운 우드피아노가

어디선가 만들어내고 있을 음악

내가 좋아하는 발목은

그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모든 최소한의 고요를 위해

 

 

 

 

 

 

5.jpg

 

이혜미, 투어(鬪魚)




빛나는 가시를 세우고 너에게 갈게


보고 듣는 것이 죄악이어서 무엇도 유예하지 못하고

부서져 완전해진 무늬가 되어 헤엄칠 때

우리가 가진 비늘이 일제히 진동한다

지느러미를 펼치니 너와 나의 그믐


어쩌면 이렇게 단단하고 빛나는 것을

몸 안에 담가두었니


뼈, 거품 속에서 떠오른 얼굴

그 얼굴은 심장에서 가장 먼 곳에 있어

네가 머물던 자리에 다른 비참이 들어선다

서로를 흉내내다가 서로에게 흉(凶)이 되는 순간

늑골은 숨기고 촉수를 오래 어루만지면


우리는 두 개의 날카로운 비늘

아름다운 모서리가 남겨졌다


아직은 목젖을 붉게 적시며 구체적인 오후를 꿈꾸고

잃어버린 아가미를 찾아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우리의 기도는 한곳만을 고집스레 방향하는 일이니

깊이 고인 맹목이라 해도 헛된 문장만은 아닐 것


그러니 함께, 멀리로 가자

아름다울 몫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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