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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우리는 수평으로 이어져 무한하였다
게시물ID : lovestory_935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62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8/18 13:52:39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이규리, 많은 물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차 안에 앉아서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 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2.jpg

 

김소현, 공중의 잠언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수많은 손금들이 꿈틀거리고

그건 새들의 무수한 날갯짓 같은 모양새

새들이 처음 비상했을 때를 떠올린다

팽팽하게 불거지는 허공 속의 곡선

당신의 손을 잡고 싶다


좀처럼 오지 않았다

당신의 방향을 이해하는 일


철새가 날아가는 시기를 다섯 번째 계절이라 부른다면

미워하지 않는 방법을 조금 더 배우기로 한다

가벼워서 가여워지지 않게요

이것은 아주 구체적인 인사법 또는

입체적인 유대감

잘 지냈어요?


손가락 끝으로 닿아 오는 이 바람은

새의 날갯짓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북태평양 혹은 알래스카 남동부

보이지 않는 끈처럼 바람의 행로에 묶여

일제히 날아가는 철새들


우리는 수평으로 이어져 무한하였다

손을 들고 흔들면

너무 많은 예감이 흔들려 나는 어제도 오늘도

어떠한 기미도 없는 사람

손바닥을 펼쳐 새들의 비행로를 예측하는 일


광화문의 바람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도시에 폭설이 내린다

로맨스는 없다 더 이상

허공의 떨림을 붙잡으면 풍경이 당겨지는 느낌

다시 만나는 우리는 서로를 너라고 부르지 말기로 한다

 

 

 

 

 

 

3.jpg

 

문형렬, 모든 첫사랑




한번도 너를 잊지 않은 적이 없다

모든 사람이 너로 보여서 잊고

너밖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잊는다

열아홉 살 건너 스물 넘어 서른 살 지나

추억에도 굳은살이 박히고

우연한 만남도 믿지 않게 되었지만

하늘 아래

흔한 것들마저 달라진 게 없는데

얼마나 가혹했기에

잊혀진 채로라도 한번 스칠 수 없는지

사랑했던 날짜를 찾아볼 수 없는지

단발머리 나폴거리던 거리에는

옛것처럼 어둠이 오고

수십 년이 지나가듯 꽃이 지나간다

얼굴 붉히며 기다림을 감추기만 했던

가슴 울렁이는 시절들은

아직도 맨발로 달려오는데

문득 멈추어서고

돌아서서 기다리면

한번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단풍나무처럼 달콤한 얼굴이

나를 모르겠느냐고 어깨를 친다

잊지 않은 적이 없으므로 외로웠고

외로웠으므로 외로울 수 없었던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해도

지상에 없는 슬픔은 무엇인지

지상에서 다 배울 수 없는 그리움이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새벽바다 풍경처럼

가슴 저미는 손을 내민다

 

 

 

 

 

 

4.jpg

 

황경신, 어쩌면 너는




어쩌면 너는

네 인생에 이미 많은 일들이 일어난 거라고 생각하지

아직 여름이 한창이지만

너의 마음은 여태 겪어본 적 없는

가을의 언저리를 떠돌기도 하고

한겨울의 거리에 내몰린 기분이 된 적도 있었을 거야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잊기 위해

일부러 큰소리로 웃거나 소리를 지르는 너를 본 사람도

아마 한두 명쯤은 있었겠지


어쩌면 너는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자주 변한다는 생각과

또 어떤 것들은 생이 끝날 때까지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절망이라는 벼랑에 서서

무구하고 잔인한 바다를 내려다보았을지도 몰라

그러나 단 하나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어

조금만 더 걸어보자고

조금만 더 움직여보자고 스스로를 부추기며

한숨 같은 심호흡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 거야


어쩌면 너는

너무 오랫동안 사랑을 기다려왔다고 중얼거리는 밤을

수없이 보냈을 테지

가까이 끌어다 곁에 두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꽃이 피고 또 지는 것처럼

바람이 불어오고 또 불어가는 것처럼

네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가 스르르 시들어가는 그 감정을

미처 사랑이라 부를 수는 없었겠지


어쩌면 너는

성급하고 체할 것 같은 복잡한 관계로부터 달아나

홀로 겨울의 심장에 이르는 것도

썩 나쁘진 않을 거라 생각하지

응시할수록 점점 희미해지는 사랑을 향해

나쁜 말을 퍼부으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건

사랑이 그만큼 너에게 무겁기 때문이지

네가 하필이면 그런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지


그러니 어쩌면 너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남몰래 사랑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걸지도 몰라

불면의 밤들을 고스란히 통과하고

유혹의 눈웃음을 외면하고

섣불리 심장을 꺼내 보이지 않았으며


모든 옳은 것들에 대한 존경과

모든 영원한 것들에 대한 경외를

한시도 멈추지 않았으니까


네가 원하는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을 알지 못하여

너는 온 세상의 모퉁이를 서성이지

그러나 정말로 이상하게도

네가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랑의 얼굴은

두서없이 흔적 없이 서둘러 사라져버리고 말지

그때 너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생각할 거야


그저 이 자리에 가만히 서서

사랑을 기다리는 것이

어쩌면 가장 현명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래, 그런 이유로

나는 간혹 너의 눈빛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감추고 있는 깊은 우물을 발견하지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우물은

무척이나 검고 푸르러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밤과 같아


그리고 아주 가끔

예기치 않은 바람에 의해

섬세하고 불안한 물결이 갈라질 때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험한지

너는 결코 모르고 있을 거야


그렇게 너는

네 인생에서 아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을

기다리고 있겠지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그러하듯이

 

 

 

 

 

 

5.jpg

 

김종환, 그리움




나 여기에 전봇대처럼 서 있을게

너 한 번 지나가라

그냥 아무렇게나 한 번

지나가거라

옷깃 만져 보거나 소리 내어 울거나

안보일 때까지 뒷모습 주시하지도

않을 테니 그냥 한 번

지나가거라

시장을 가듯이 옆집을 가듯이

그렇게 한 번 지나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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