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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그것은 견고한 절망이었다
게시물ID : lovestory_935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6
조회수 : 63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8/24 16:27:39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고영민, 꽃눈이 번져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누군가 이 시간, 눈 빠알갛게

나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나를 흔들어 깨운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눈 부비고 일어나 차분히 옷 챙겨입고

나도 잠깐, 어제의 그대에게 멀리 다니러 간다는 생각이 든다

다녀올 동안의 설렘으로 잠 못 이루고

소식을 가져올 나를 위해

돌을 괸 채

뭉툭한 내가 나를 한없이 기다려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순간, 비 쏟아지는 소리

깜박 잠이 들 때면

밤은 더 어둡고 깊어져

당신이 그제야

무른 나를 순순히 놓아줬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도 지극한 잠 속에 고여 자박자박 숨어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에게 다니러 간 내가

사뭇 간소하게 한 소식을 들고 와

눈 씻고 가만히 몸을 누이는

이 어두워

환한 밤에는

 

 

 

 

 

 

2.jpg

 

이경우, 구두를 신다가




신장에서 구두를 꺼내다가, 문득

이 구두는

한많은 생을 마친 어느 소의

가죽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평생이 겨우 반경 몇 킬로미터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고단한 노동의 현장을 살다간 영혼이

죽어서라도 자유롭게, 낯선 땅을 밟아 보고파

한 켤레 인간의 구두로

마무리 되었나보다

신장에서 구두를 꺼낼 적마다

나도 모르게

어디든 떠나고 싶어지는 것은

혹여, 소의 필생의 염원이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닐까

가엾은 소의 영혼을 위하여

구두창이 다 해지도록

자유로워지고 싶은 시간

왕방울 같은 눈을 끔벅이며

순한 소 한 마리가

코뚜레가 박힌 얼굴을 내밀고 있다

 

 

 

 

 

 

3.jpg

 

고경숙, 돌아보아야 할 때




죽은 사람들의 음성에 대해

궁금해 한 적이 있다

유품과 함께 묻히지 못한 소리가

자유로움인지 아님 제외됨인지에 대해

그리움은 말해주지 않았지만

가끔 꿈속에서 보여지는 그것은

견고한 절망이었다


몸을 벗어난 소리의 힘은 소극적이어서

봄의 돌기에 잠시 매달려 있다가

자전거 바퀴살에 끼어 몇 바퀴 돌기도 하고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집 낮은 창에

바람으로 잠시 앉아있거나

신축중인 연립주택 현관문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몇 걸음 앞 친했던 동창을 만나

친구야! 반갑게 불러보면

화려한 립싱크로 치장한 인형처럼

시각으로만 물결져 호명되는 서로의 이름

어느 조용한 일요일

산에 오르다 문득 계곡물소리 느껴지면

얼른 돌아보아야 한다

가장 그리워했던 누군가가 죽을힘을 다해

가장 절절한 그들의 언어로

나를 부르는지도 모를 일이니


몸을 벗어난 소리의 길은 모두 허구다

 

 

 

 

 

 

4.jpg

 

유정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운동화 끈을 고쳐맨다

풀어진 끈에 매달린 불안한 소문의

머리채를 손가락에 걸어 단숨에 잡아당긴다

바닥을 디디자 단단해지는 길

그러나 버스는 오지 않는다

산양 전갈 페가수스의 머리칼을 다 세는 동안

운동화 둥근 코끝으로 바람의 혀가 한 차례 핥고 지나간다


언젠가 한 번은 지나쳤을

녹색 페인트칠 벗겨진 창가에서 마시던 차 한 잔

그러니까 결국 지나온 어디쯤의 금요일 같은

휘어진 길 그 너머의 생처럼

뒤틀린 브래지어 끈이 자꾸 등을 간질이는 동안

나는 수없이 오지 않은 버스를 놓치는 중이다


저녁에 닿기 위하여

죽은 나무가 제 몸을 훑으며 들려주는

휘파람 소리를 듣기 위하여

휘파람 소리 끝에 생겨난다는 우물에

얼굴을 비추어 보기 위하여


끝내 결별할 수 없는 것들을 두고

당신이 저물도록 서 있던 마른 강물 끝

오래된 마을로 가기 위하여

둥글게 몸을 숙이고 다시

운동화를 고쳐맨다 오래된 당신이

단단히 묶인다

 

 

 

 

 

 

5.jpg

 

서안나, 이별의 질서




간절한 얼굴을 눕히면 기다리는 입술이 된다


한 사내가 한 여자를 큰물처럼 다녀갔다

악양에선 강물이 이별 쪽으로 수심이 깊다

잠시 네 이름쯤에서 생각이 멈추었다

피가 당기는 인연은 적막하다


당신을 모르는 것은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육체가 육체를 끌어당기던 그 여름

당신의 등은 짚어낼 수 없는 비밀로 깊다

꽃은 너무 멀리 피어 서러움은 뿌리 쪽에 가깝다


사랑을 통과한 나는 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던 비애

우리는 어렵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내가 놓아 보낸 물결 천천히 밀려드는 이별의 질서

나는 당신을 쉽게 놓아 보내지 못한다

강물에 손을 담그면 당신의 흰 무릎뼈가 만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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