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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식후에 이별하다
게시물ID : lovestory_935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74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8/25 14:09:22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심보선, 식후에 이별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2.jpg

 

조말선, 벌레




벌레가 기어 나온다

싱크대 아래서

벌레가 기어 나온다

결코 기어들어가지 않으려고

벌레는 떠나고 있다

결코 돌아가지 않으려고

벌레가 기어 나온 곳은

벌레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

기어서라도 도망치고 싶은 곳

벌레는 성실하게 태어난 곳을 등지고 있다

벌레가 기어 나오자마자

어디서 나의 한 쪽이 썩는다

어디서 나의 한 쪽이 움푹 부패한다

심하게 냄새까지 난다

벌레가 자꾸 기어 나온다

기어나온 벌레가

나를 기어들게 한다

 

 

 

 

 

 

3.jpg

 

심재휘, 황금빛 마개




보름을 막 지난 달이

매일 나의 표정 한개씩을 지워나가듯이

그대의 잠들로부터 나의 새벽이

이 밤에도 한 걸음 뒤로 새어나가고 있다


멀리 어른거리는 불빛들로 연명하는

그대 집들의 윤곽이 조금 옅어지고

검은 욕조를 뒤집어쓴 채 출렁거리는

나의 구름들이 여위어가고 있다


수상하게도 나무들의 머리카락이

달의 테두리를 향해 자라는 밤

그대와 나의 항해가 비록

어둡고 깊은 후회로 일렁거리는

캄캄한 눈물 속의 표류일지라도


내 안의 가득한 슬픔을 지켜주는

저 황금빛 마개

차가운 우주로 이 몸 흘러나가기 전에

아직은 내 눈 속에서 단단하게 빛나는

너무나 혼자인 생의 감각

 

 

 

 

 

 

4.jpg

 

김경미, 천동설




낮 동안 지구는 네모난 거다

가장자리에는 낭떠러지 절벽이 있어

가다보면 아득히 떨어지기도 하는 거다

눈물도 직사각형이어서

흘릴수록 손등 붉어지다가


그 네모진 동백꽃


구부려 흐린 발을 씻을 때 비로소

등을 따라 가장자리 둥그러지고

손등의 붉은 상처도 백열전구 쥔 듯 환해지고

수그린 이마를 중심으로 별자리도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하는 것

침을 뱉을 듯이

하루를 버틴 발을 씻으라고

저녁이면 비로소

지구는


저무는 세숫대야에 띄워진 수련처럼 둥글어지는 것

흔들리는 부레옥잠처럼

물속, 바닥 없이도 뿌리를 내리는 것

 

 

 

 

 

 

5.jpg

 

정수경, 슬픔의 각도




관목과 잡초로 둘러싸인 이즐레뜨 성

두렵고 말라붙은 시간들이 당신을 스케치 하고

먼지 쌓인 회전판 위에는

철사로 뼈대를 세워 거푸집을 짓는다

오귀스트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밤은 길었다


손끝으로 더듬어 체온을 느낀다

희미해지는 콧날을 세우고

입술과 귓불을 불러 당신의 흉상을 만든다

사랑은 나를 파괴하는 이글거리는 불꽃

격정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열아홉 살이었다


당신을 조금만 벗어나면

고장난 나침판처럼 흔들렸다

그 길은 때때로 망각의 늪으로 이어져갔고

늪의 끝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은

실핏줄로 흐르던 당신이라는 햇살과 어두움이었다

붓으로 석고액을 바르고 찰흙을 파낸다


돌가루처럼 떨어지는 한숨을

석고 틀 안쪽에 비눗물 대신 바른다

사랑보다 길었던 당신의 그림자가

오직 하나뿐인 나의 바다였을까

바다를 끌어안은 어둠의 깊이는

늘 그렇게 바닥이 없었다

끓는 청동 물로 빈 바다를 채운다


맨발로 오귀스트의 바다를 향해 걸어간

나는 까미유 끌로델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당신의 팔에 엉겨도

젖은 몸속에서는 다시

출렁이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몽드베르그 정신병원 창밖에는

서른세 번째 겨울이

15도쯤 기울어진 내 슬픔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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