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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첫 문장에 운명이 걸려 있다
게시물ID : lovestory_936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5
조회수 : 73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10/04 22:19:10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손순미, 벚꽃 십리




십리에 걸쳐 슬픈 뱀 한 마리가

혼자서 길을 간다


희고 차가운 벚꽃의 불길이 따라간다


내가 얼마나 어두운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지 보여주려고

저 벚꽃 피었다


저 벚꽃 논다


환한 벚꽃의 어둠

벚꽃의 독설


내가 얼마나 뜨거운지

내가 얼마나 불온한지 보여주려고

저 벚꽃 진다

 

 

 

 

 

 

2.jpg

 

최문자, 사과꽃




자세히 보면

나무에 벌레들이 얼굴을 파묻고 울던 눈물의 지점이 있다


울 수 있는 곳은 꽃이 피는 곳


벌레의 눈엔 나무의 눈물이 되돌아오고

사과꽃이 핀다


사과나무는

굽히지 않고 매달리는 사과의 전설 하나와

사과가 우거지도록 한없이 꽃을 떨어뜨려 주는 바람이 산다


울고 싶은 기분만큼 사과가 열린다

기억에서 바람까지 걸어 나간 사과들


온종일 저 혼자 동그랗게 살아 낸 사과를 따 낼 때

사과꽃이 같이 따라왔다


벌레가 울어 버린 지점 거기서 그득했던 눈물

반은 흘리고 그 반을 사과가 마셨다고

사과꽃이 새파란 얼굴로 따라왔다

 

 

 

 

 

 

3.jpg

 

김혜수, 척




나무 껍질인 척

나무에 들러붙어 있는 얼룩대장 노린재

앙상한 나뭇잎인 척

돌인 척 모래인 척

숨 참고 있는 나비박쥐, 강변메뚜기

나뭇잎에서 나무껍질로 모래로 돌로

거처 옮기는 동안

아픈 척 죽은 척 더러 사람인 척

보호색을 바꾸는 동안

새빨간 거짓말이 참말이 되면 어쩌나

은폐하고 경계하고 위장해도

아무것도 되지 못하면 어쩌나

시치미 떼고 딴청 부리다

온통 들켜버리면 어쩌나

낮잠 자다 눈 떴을 때

아무도 없는 정적 속에서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천장의 사방연속무늬인 척 장롱인 척

벽에 걸린 그림인 척 커튼인 척

거울인 척 딴전 피우며

내 일거수일투족 다 보고 있는 누군가

햇살인 척 바람인 척

 

 

 

 

 

 

4.jpg

 

이영광, 사랑의 발명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5.jpg

 

박용하, 어둠과 침묵




어떻게 첫 문장으로 뛰어내릴까

어떻게 첫 사랑으로 뛰어내릴까


어떤 호흡 위에도 닿지 않았던

지금 막 도착하는 진눈깨비처럼


시인이 가까스로 첫 줄을 쓴다

첫 줄은 다음 줄을 위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쓴 글은 무효인 글쓰기

나머지는 어둠과 침묵


첫 문장에 운명이 걸려 있다

첫 문장만 쓰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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