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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조선 말기에 6진 쪽에서 코사크랑 충돌이 좀 있었음
게시물ID : humordata_19870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5
조회수 : 174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5/19 03: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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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1860년대 조선인들의 연해주 개척과 상당히 연관이 되는데 흥미로운 일화가 많음. 1800년대의 기근과 굶주림, 반란 그리고 콜레라라는 신종 전염병의 등장은 많은 인구의 상실과 토지의 황무지화로 이어지게 됨. 특히 평안도/함경도의 피해가 컸는데, 이를 타개할 방법으로 각각 간도와 연해주로의 이주를 택했음.

 

물론 순조롭지는 못했음. 6진 일대에서는 조선군과 코사크 사이의 교전이 대원군 시절까지 심심찮게 벌어졌고, 총격전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포까지 끌고와서 격퇴시켜 대원군이 북방은 알아서 양이들을 물리쳐주니 걱정할 것이 없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지경.

 

그러나 러시아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빠르게 현지에 녹아내렸던 모양임. 심헌용 교수의 이야기를 보면 1860년대 이전 연해주에 정착한 조선인이 약 5,000명 가량이며 이들은 28개 촌락을 이루며 코사크 인들과 함께 살아갔다고 주장을 했음.

 

코사크 인들과 6진에서 교전이 벌어질 정도로 험악했는데 갑자기 왜 연해주 이주한 조선인들이 얘네랑 한 살림 차리느냐 라는 의문이 있을 수 밖에.

 

저번에 이야기했지만 러시아 연해주의 경우 조선이라는 물자 창고가 없이는 군대의 군수물자 보급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동네였음.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연해주가 그리 사람이 많은 동네도 아니었기 때문임. 

 

따라서 러시아 군대나 코사크인들은 초기에는 조선과 국경분쟁을 치르면서 험악한 관계를 유지했을 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우호적으로 변했던 것으로 보여짐.

 

조선으로부터 물자를 매매하고, 이들로부터 이것저것 얻어가야만 했으니. 거의 연해주에서 코사크인들과 한 살림을 차리고 한 마을을 이루며 살았으니 뭐.

 

한 편 조선의 북방지역 관리들은 위와같이 도강을 통한 해외 개척을 겉으로는 엄금했으나, 실제로는 그냥 냅뒀음. 우선 중앙정부는 해외 개척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음. 괜히 청이나 러시아와 국경분쟁이 벌어질 여지를 줄 수 있었던데다가, 사실 골치가 아픈 일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임. 

 

반면 조선의 지방정부들은 안 그래도 줄어든 경작지와 인구를 벌충하기 위하여 도강하는 조선인들을 그렇게 잡아들이지 않았고, 심지어 귀환을 하려는 조선인들의 귀국을 불허하기까지 하였음.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가장 큰 이유는 해당 관청의 관할 구역이 넓어지면서 이곳에서 나오는 수익과 인구를 통한 세금 수취량이 늘어났기 때문임. 그래서 조선의 지방관리들은 주로 야간에 도강하여 영토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고 세금을 거두며 일종의 권리를 주장했었다고 함.

 

러시아 정부의 경우 조선인들의 도강을 더 늘리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실상 얘네도 뭐 딱히 안잡은 모양임. 조선인들이 넘어와서 개척을 해준다면야 땡큐인 상황이었던데다가, 연해주의 인구를 늘려주기도 했으니까.

 

다만 청의 경우는 좀 반응이 영 안좋았음. 조선인들이 진출한 동네가 청의 봉금 지대였기 때문임.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국경에서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짐. 뭐, 보니까 국경지대의 포군들이 비적 쫓아가서 박살내는 과정에서 도강하고 그러던데 최소한 조선의 지방정부는 압록-두만 너머의 땅을 자기 영토로 인식하긴 한 모양임.

출처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567249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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