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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환상열차 - 프롤로그
게시물ID : freeboard_20095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15번지
추천 : 2
조회수 : 46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3/06/30 22: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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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이어서 쓸 글은 아니지만, 짬내서 쓴 김에 여기에 남겨둡니다.

 

이전에 쓰던 로봇 이야기부터 무조건 완결을 낼 거고, 

그 이후에 차례대로 단편 형식으로 쓰지 싶네요.

 

 

 

 

 

환상열차 - 프롤로그

 

 

 

그러니까 작가지만, 이제 글쓰기가 어렵다고요? 그래서 더는 글을 쓸 생각도 없다고요?”

 

하얀 가운을 입고 거만하게 등받이 의자에 기대어 앉은 남자. 권위가 깃든 굵은 목소리와 적당히 세월이 묻어난 주름이 하얀 가운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그를 종합병원의 과장급쯤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 어려워요. 솔직히 어려운 정도가 아닙니다. 갈피를 전혀 못 잡겠어요.”

 

오랜 시간 이발도, 염색도, 하지 않아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머리. 그런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숙인 맞은편의 남자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쯤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충 의사와 환자쯤으로 보이는 두 남성.

 

, 소재가 고갈되었다는 겁니까?”

 

둘의 대화가 이어진 건 조금 전이었나 보다. 찻잔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마침 딱 좋을 때다. 무표정한 얼굴로 저들의 대화를 엿듣기에는.

 

아니오, 그런 게 아닙니다. 소재는 차고 넘쳐요. 단순히 소재로만 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지천에 널려 있어요. 그런데그걸 함부로 쓸 수 없는 세상이 되었어요. 이젠 소재가 흘러넘쳐도 누구도 쉽게 공감해주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는 겁니다. 다들 너무 자기 관심사에만 함몰되어 있어요. 그래서 시장에 남은 독자들 눈치를 볼 수밖에요. 그러니 완전히 그들의 입에 딱 맞게! , 말하면서도 힘이 빠지네요. , 완벽히 그들의 입맛에 들어맞아야 해요.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감성 같은 게 아니라, 시장에 남은 마니아들 눈높이를 무조건 맞춰야 한다고요! 아니라면, 완전히 찬밥입니다. 외면당하는 정도가 아니라고요. 이런 세상에서는 다음을 기약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겁니다. 자세한 수치는 몰라도 아마 무명작가 삼백 명의 수익을 합한 값이 평범한 성인 남자 한 달의 고지서와 그 무게가 얼추 비슷할 겁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빛은 상당히 권태로우면서도 빈틈이 없었다. 때문에 그가 걸친 하얀 가운이 풍기는 권위가 실제보다 몇 배는 더 부풀어져 보였다.

 

말씀을 들으니 오히려 이해가 어렵군요. 작가란 모름지기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리고 독자가 읽어줘야 작품으로 남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요? 그런데 독자 입에 딱 맞는 글을 쓰기가 어렵다는 건 실력의 문제 아닌가요?”

 

머리를 쥐어뜯던 남자는 그대로 등받이로 몸을 눕혔다. 현실의 벽 앞에서 자포자기해버린 모양새를 전혀 감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 맞습니다. , 맞아요. 실력, 실력의 문제겠죠. 하하, 그래서 펜을 놓고 싶은 겁니다. 일반 공책 한 권보다도 못한 글을 써서 뭣하겠습니까?”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긴 다리 덕에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몸매였다.

 

그럼, 더는 할 말이 없군요. 그만 가셔도 좋습니다. 제가 사정사정할 필요는 없죠. 스스로 인정할 정도이니 잘 아시잖아요? 당신을 대신할 작가들은, 아니, 글쟁이들은 세상에 널렸습니다. 제가 당장 홈페이지 게시판에 구인공고만 올려도 하루 종일 알람이 울릴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굳이 제게 찾아와서 볼멘소리를 하는 걸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솔직히 시간이 너무 아깝군요.”

 

편집장님!”

 

, 그들은 의사와 환자가 아니라, 출판사의 편집장과 작가였나 보다. 그런데 편집장들이 의사처럼 흰 가운을 굳이 입었던가?

 

무슨 말이 하시고 싶은 건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웹소설 따위보다 단편이라도 시대의 폐부를 찌르는 글을 남기고 싶다! 보세요, 문수림 씨! 당신은 그런 역량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기회를 몇 번이나 줘도 해내질 못했잖아!”

 

편집장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않고 노골적으로 상대를 압박했다. 길고 흰 가운을 벗어서 멀리 책상 위로 던지고서는 목을 쥐고 있는 타이도 풀어헤쳤다. 하얀 가운 밑에 감춰져있던 우람한 근육이 드러났고,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가 빛을 발했다. 작가라는 양반은 그런 편집장에게 압도당하여 덜덜덜 떨고만 있을 뿐, 어떤 반항도 하질 못했다.

 

그냥 쓰라는 걸 써요. 내가 최근에 연재 기회도 줬잖아. 몇 푼 안 되지만, 올 겨울까지는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도 될 거라고. 그런데 왜 앓는 소리를 내는 거야? 난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아! 정말, 진심이야. 어째서 시대보다 먼저 늙어버린 자네의 문장이 팔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네가 말하기 좋아하는 자본주의의 병폐? 이봐, 아직까지 팔리는 책들은 배금주의 덕에 팔리는 자기개발서와 경제서적이야. 부자들과 유명인들의 말이라면 사골처럼 우려낸 것이라도 몇 번이고 다시 재구매를 하는 세상이라고. 그런데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그려낸 주인공의 모험담 같은 걸 누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역경? 요즘 사람들은 지랄 같은 현실로부터 도피를 원하고, 복수와 사이다를 원해! 역경 뒤에는 또 다른 고난 아니면 정신승리만 있고, 대신할 수 있는 건 금은보화뿐이라고 맹신하는 이들이야. 그런 이들의 세상이라고! 그런데 당신이 잘난 폼 잡고 쓰겠다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작품이 아니고 똥이잖아!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돈이 부질없다는 헛소리를 하지 않나, 정당한 폭력을 원하는 세상 앞에서 일상에 깃든 폭력이 서늘하지 않냐는 헛소리를 하질 않나! 그런 걸 써서 먹히는 양반들은 따로 있어요, 당신도 알잖아? ? 그런 건 고상하게 메이저에서 상을 받으신 양반들만 하실 수 있는 이야기라고.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문장은 메이저에서 상을 받지 못했고. 알겠어요? 당신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현실을 살고 싶으면, 잔말 말고 제가 쓰라는 걸 써오세요. 제대로.”

 

한바탕 쏟아낸 의사, 아니, 편집장은 몸을 돌려 다시 찻잔에 손을 댔다. 여전히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반면, 혼쭐이 난 작가는 피어오르는 찻잔의 김보다도 더 야윈 몰골이었다.

 

그래도상은 수상하지 못했지만최종 경쟁작에는 늘, 제 이름이 있었습니다. 아시잖아요?”

 

권태로움만 깃들어 있던 편집장의 눈빛에 이젠 확연한 노여움이 피어올랐다. 거기엔 상대에 대한 멸시도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게 몇 년 전입니까? 십년? 이십 년? 아니, 삼십 년? 우리 나이 때가 되면, 왜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줄 아십니까? 다들 틈만 나면 꼴에 잠시 반짝였던 전성기만 말하거든요. 누구도 지금을 말하지는 않으면서 말이죠. 아시겠어요? 누구도 지금을 말하지 않아요. 태반이 과거를 말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미래를 말하죠. 다들 몸뚱이가 지금에 있지만, 누구도 지금을 말하기 싫어하고, 지금을 글로 읽기 꺼려한다고요! 그러니 당장 돌아가서 태반이 소비할 도피물, 환상물을 써오라는 겁니다. 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작가는, 아니, 문수림이라는 한 명의 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에서는 여전히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깊은 동굴처럼 오므라져 입술 안에서만 소리가 울릴 뿐 밖으로 어떤 말도 새어나오지 못했다.

 

이만, 어서 가세요, 문수림 씨. 가서 제발 좀 그럴싸하게 써오세요. 뇌를 빼고 읽어도 술술술 읽히게끔. 마지막 문단마다 자극적인 사건을 삽입하거나 떡밥을 넣어서 다음 편을 결제해서 보게끔. 그렇게 좀! , 잘 좀 합시다.”

 

, 알겠습니다. 편집장 님.”

 

작가는, 문수림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한숨과 함께 방문을 닫자 문에 걸려있던 명패가 떨어졌다.

 

출판사 15번지. 이경민 편집장.’

 

카아악- .

망설임 없이 가래침을 뱉었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순식간에 하얀 바닥이 끝없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왼편에서부터 길고 긴 기찻길이 눈 깜짝할 새에 깔렸고, 멀리서 경적과 함께 초고속 열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작가의 손에는 조금 전까지 없었던 여행 가방이 들려있었다.

 

어쩌겠어, 이렇게 된 거. 멋들어지게 써주는 수박에.”

 

 

출처 나의 본명과 필명, 그리고 상호까지 다 나왔는데, 뭘 더 바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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