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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 (5-1)
게시물ID : lovestory_945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낭만아자씨
추천 : 3
조회수 : 153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08/17 10: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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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

   그대에게 드리는 꿈 

   

     5. 처녀유격대(1)



 신창섭은 정순이 마을 초입 우물에서 분님과 빨래하는 것을 보고 이때다, 하고 걸음을 재게 옮겼다. 정순은 힘이 장정 못잖고 성미가 불같았다. 같은 마을은 물론 인근 마을 또래 사내애들 중에 그녀에게 맞지 않은 애가 별로 없을 정도였다. 뱃심 없는 사내애라면 그녀가 내지르는 쇳소리에 벌써 오금이 저리게 마련이었다. 신가도 꼬투리를 잡혀 망신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가 행악을 떨어댈 때면 세상 누구라도 못 당하지 싶었다. 마주치지 않는 것이 장땡이었다. 그런데도 면소에서 그녀의 정신대 영장을 받아들고는 시원하기보다 서운함이 앞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신가는 침을 꼴깍, 삼키고 입맛을 짭짭 다셨다. 쪼그리고 앉아 엉덩이를 들썩이며 빨래를 하던 정순의 뒤태가 눈에 삼삼했다. 그녀는 행동과는 달리 가근방에서는 보기 힘든 미인이었다. 선머슴 뺨치게 우악스럽지 않았다면 손을 타도 벌써 탔을 것이었다. 나이도 열 여덟이었다. 면소에서 그녀의 정신대 영장을 받는 순간, 한번 어찌 해보지도 못하고 왜놈들만 좋은 일 시키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왈칵 들었다. 설령 종군성노예가 아니라 공장으로 간다고 해도 조선여자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설치는 왜놈들이 그녀의 미색을 눈으로만 즐기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틈만 나면 몰래 정순의 자태를 훔쳐보고, 옷을 벗기고 맘껏 거시기를 하는 상상을 게을리하지 않은 신가였으나 그렇다고 지금 와서 어찌해 볼 도리도 없었다. 며칠 남지 않은데다 잘못 덤볐다간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었다.

 “아짐씨 있소?”

 신가는 정순네 사립문을 밀고 들어서면서 큰소리로 외포댁을 불렀다.

 “웬일인게라?”

 바느질을 하고 있던 외포댁은 방문만 빼꼼 열었다.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남편이 소작쟁의에 앞장서다가 주재소에 끌려가서 초죽음이 돼 들것에 실려 나와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뒤로는 신가를 원수로 여기는 그녀였다. 시작도 하지 않은 쟁의가 탄로난 것은 신가가 배신을 했기 때문이었다. 신가의  밀고를 믿는 것은  주재소에 잡혀는 갔으나 유일하게 멀쩡한 몸뚱이로 나왔고, 바로 강부자의 새 마름이 되었던 것이다. 땅 한 뙈기 없던 신가는 살림이 나아지자 장리쌀로 배를 불리기 시작해 십여 년 만에 논을 열 마지기 가까이 장만했다. 삼 년 전부터 구장 자리까지 꿰차고는 무슨 큰 벼슬이라도 한 듯이 설쳐대는 꼬락서니는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앞장서서 사루이찌 마사오(申一正男)로 창씨개명을 했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이름을 바꾸도록 물이못나게 닦달을 했다. 신가의 등쌀에 못이겨 창씨개명을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강제 공출에도 면서기나 순사보다 더 악랄하게 설쳤다. 그 덕에 제 소출은 철저히 보호를 받았고, 떡고물까지 챙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지옥인데 신가의 재산은 갈수록 불어나고 있었다. 저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강부자의 마름이라 소작을 떼이지 않기 위해서 품삯도 없이 농사까지 지어줘야 했다.

 “아따, 아짐씨넌 좋은 소식 갖고 온 사람인테 너무허요.”

 외포댁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있는 신가는 비식이 웃으며 눙치고 들었다. 저것도 안직은 쓸만헐 거시다. 서방 죽고 안직 손을 안탄 거 긑은디...... 봉 대신 닭이라고 정순이가 정신대에 끌려가고 나면 외포댁을 어찌해 보리라는 마음이 신가의 아랫도리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정순이만 없으면 외포댁을 덮치는 일은 일도 아닐 것이었다.

 “좋은 일이먼 우리인테까정 올 거이 있겄어라?”

 언제나처럼 외포댁의 음성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정순이가 정신대에 뽑혔어라. 정신대!”

 “정신대가 머시오?”

 “아따, 까깝허기는...... 정순이가 취직이 됐단게라!”

 얼른 생각해 낸 것이 취직이었다. 신가는 제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하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답답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지다가 정순이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분님이와 함께 있으니 수다 떠느라 금방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머시라고라, 취직? 아니 누가 취직시켜 돌라고 허든게라?”

 화들짝 놀란 외포댁이 한달음에 마당으로 내려섰다. 이 썩을년이 밸도 없이...... 혹시 정순이 신가에게 부탁을 했나 싶어 울컥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고것이 아니고 내지로 돈벌이 허러 가라고 천황폐하께오서 명령얼 허셨다 말이오.”

 “그년이 부탁헌 거넌 분명 아니지라?”

 외포댁이 다짐하듯이 물었다. 신가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자꾸만 뒤가 켕기고 있었다.

 “부탁헌 거이 아니라 천황폐하께오서 명령얼 허셨단게로.”

 다시 신가가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쳤다. 말끝마다 ‘천황폐하‘를 주워섬기는 꼬락서니가 가관이었다.

 “일 없소! 우리 정순이넌 취직 안 시킬라요!”

 단호한 외포댁이었다. 신가는 점점 당황하고 있었다. 반대로 외포댁은 정순이 빨래를 하고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다. 웬만한 부역은 정순이 행악을 떨어 빠지곤 했던 것이다. ‘정신대‘라는 것도 그런 부역 비슷한 것이기를 바라는 외포댁이었다.

 “내 맴대로 허고 안 허넌 그런 취직이 아니다 말이오. 이건 군대 가는 것허고 똑같은 거이다 말이오. 천황폐하어 명령이다 말이오.”

 신가는 다시 한번 천황폐하의 명령임을 강조했다.

 “그런 거이 어디가 있소? 내 싫으먼 그만이지.”

 “그런 거이 아니란게 그래쌓네! 천황폐하어 명령이란게!”

 그렇게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그만 정순이 빨래를 이고 들어오고 말았다. 신가는 아뿔싸, 싶었고 외포댁은 잘 됐다 이놈아, 했다.

 “엄니, 먼 일이다요?”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신가를 꼬나보며 정순이 물었다.

 “나넌 무신 말인지 통 모르겄은게 니가 잠 물어봐라.”

 “먼 일이다요?”

 금방이라도 어찌할 듯이 험악한 얼굴을 하고 정순이 신가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음성에는 벌써 칼날이 시퍼렇게 돋아 있었다. 신가는 속으로 찔끔했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말했다.

 “니가 취직이 됐어야.”

 “고거이 먼 소리다요?”

 정순이 쇳소리를 내며 이고 있던 빨래를 마당에 내팽개치듯이 세차게 내려놨다. 그 바람에 광주리 윗부분에 얹혀 있던 빨래들이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의 얼굴은 더욱 험악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싸게 세세허니 야그럴 혀보시오.”

 “긍게, 뭐시다냐.....”

 정순의 거친 행동에 오금이 저린 신가가 황황하게 늘어놨다.

 “그리 좋언 취직이라먼 나럴 빼고 동자럴 보내시오.”

 옆구리에 두 주먹을 갖다대고 여차하면 덤벼들 기세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순이 힝,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곧장 덤벼들 것 같지는 않자 신가는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생각 겉으먼 열 분이라도 보내고 잡제. 헌디 갸넌 나가 들 차서 안돼야.”

 “나가 멫이먼 되는디라?”

 “열 일곱보톰이란게.”

 신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총독부에서 공포한 ‘여자정신대근무령’이 규정하는 대상은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들이었던 것이고, 젊은 순으로 차출을 시작한 것이었다. 동자는 열 다섯이었다. 당연히 대상자였으나 왜왕과 왜국에 충성을 다하는 구장의 딸이라고 면소에서 빼준 것이었다. 마을의 다른 대상자들을 차질 없이 인계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정순아, 니 생각혀 봐라. 내지 구경도 허고, 밥도 배불르게 묵고, 돈도 겁나 벌고, 꿩 묵고 알 묵고 아니겄냐 말여. 안그냐? 글고 분님이도 가니 동무도 있고 좀 좋덜 않겄냐, 이?”

 “내지 구경도 동자 아부니가 허고, 밥 배 터지게 처묵는 것도 동자 아부니가 허고, 돈 겁나 버는 것도 동자 아부니가 허씨요! 나넌 안 갈란게 그리 알고 가씨요!”

 “행여 안 갈 생각언 꿈에도 허지 마라. 천황폐하어 명령인게. 안 그랬다먼 큰일난게. 알았지야?”

 “몰랐소! 싸게 가씨요! 씅질 돋구지 말고!”

 정순이 고함을 꽥, 질렀다. 신가는 어깨가 바짝 오그라들고 있었다. 그러나 할 일은 끝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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