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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남아에서 사업 하게 된 이야기.
게시물ID : freeboard_20166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발자국꿍꿍
추천 : 3
조회수 : 55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3/11/01 19: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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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그렇게 아버지가 계신 나라로 입국을 했고, 유학생활 철수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 숙소를 방문했다. 내가 늘 알고 있던 모습은 아니었다.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우선 학생비자를 진행해야 했기에, 입학 수속을 하던 대학이 있었는데, 개강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아버지 숙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중독 까지는 아니었고, 주정을 부리지는 않으셨지만, 매일 저녁 소주를 반찬삼아 반주를 하셨다. 난 이런 모습이 뭔가 달갑지 않았는지, 하루는 너무 화가 나서 대들었다.

 

“아부지 이런모습 보려고 제가 여기까지 온 줄 아세요?”

 

눈물이 핑 돌았고, 그대로 집 밖으로 나와 버렸다. 별로 갈데가 없었다. 아니 그도 그럴것이 우리나라도 아니고, 언어도 잘 안통하는 나라에서 가출 해 봤자 어딜 가겠나. 그냥 아파트 주차장 구석탱이에 찌그러져서 밤을 샜다. 열대 지방이라 다행히 얼어죽을 일은 없었다.

 

그렇게 해 뜰 무렵쯤 다시 집으로 들어갔고, 그 날은 그냥 하루 종일 잔 듯 하다. 저녁 밥 때가 되니 아버지는 아무일 없었다는듯, 또는 그냥 다 이해하신다는듯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저녁상을 차려 주셨다.

 

실은 모든 사업이 망하기 직전에, 아버지께서 아주 조그맣게 준비하던 한식당이 하나 있었다. 내가 맡아서 오픈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몇주? 몇개월? 잘 기억은 안나지만 시간이 흘렀다. 한국에서 전화 한통이 왔다. 마트에서 일 하시던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얘기였다. 처음엔 과로 라고 생각 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검사를 하던중 암 진단을 받으셨고, 우선 다시 한국 귀국길로 올랐다.

 

병실에서 본 어머니는 건강해 보이셨다. 친가 외가 가족들이 다 모여 있었고, 무슨 효소 치료?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6개월을 선고 했다고 했다. 사실 별로 실감도 안났고, 이게 큰일이 맞는지 아닌지 조차 판단이 안됐던거 같다. 큰일이라고 하기엔 어머니 모습이 너무 멀쩡해 보였다.

 

어머니는 항암치료를 안받고 지리산 공기좋고 물 좋은곳 에서 효소 먹으면서 자연치유법을 해 보겠다고 하셨다. 이 때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암 이라는 병 자체가 별로 가슴에 와 닿지도 않았을 뿐더러, 어차피 비극은 드라마나 남들한테만 일어나는 일 이라고 생각 했으니까.

 

그렇게 짧은 한국 방문을 마치고 다시 출국길에 올랐다. 학교도 가야하고 식당도 오픈해야 했으니까.

 

식당 오픈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갔고, 다니고자 했던 대학도 시작해 다니기 시작했다. 근데 이게 대학 수업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고등학교때 전부 배운것들 이었다. 덕분에 학업에 큰 신경 안쓰면서 식당 일도 병행 할 수 있었다.

 

다만… 장사가 잘 되진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 주 메뉴는 24시간 사골을 우려낸 곰탕 이었고, MSG 맛에 익숙한 현지 입맛에 밋밋하기 그지없는 곰탕이 입에 맞을리가 없었다. 나름 건강에 좋다고 광고를 했지만, 어쩌다 좀 친해진 현지분이 이렇게 얘기해 주더라.

 

“몸에 좋은거 먹으려면 집에서 요리해 먹지 뭐하러 밖에서 돈 주고 사먹겠어. 집에 가정부도 있고 도우미도 다 있는데.”

 

맞는말 같았다. 그렇지만 요리에 딱히 지식이 없던 나는 고작해야 불고기 메뉴 몇개랑 갈비탕 정도 추가하는게 다 였다. 희안하게 갈비탕은 비교적 잘 팔렸다. 소고기 다시다를 써서 그런것 같다.

 

몇개월이 지났을까. 학업도 병행하고, 식당일도 병행 하던중 한국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어머니 상태가 많이 안좋아지셔서 다시 병원으로 입원을 했고, 아들인 내가 와서 병간호를 해야 할것 같다는 얘기였다.

 

지체없이 귀국길에 올랐고, 병실에 들어선 순간 지금까지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 했던 공포감과 현실에 대해 실감했다.

 

영화나 드라마 따위에서 보이는 암 말기 환자의 식은땀 송골송골 맺히고 그저 메이크업 따위로 표현해 낸 창백한 얼굴과 핏기없는 입술이 아닌, 피골이 상접한 산 송장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건강해 보이던 어머니의 탱글탱글 했던 볼과, 늘 밝았던 장난기 많은 어머니의 웃음은 온데간데 없고, 유니세프 광고에서나 보던 뼈가 다 드러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들, 왔어?”

 

“응 엄마…”

 

그렇게 한동안 어머니 곁을 지키며 병 간호를 했고, 오랫동안 못 뵈었던 어머니 아버지 친구분들도 병문안을 와 주셨다.

 

그러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자세히 기억은 안나지만, 다시 출국을 해야 했다. 아마 학교랑 비자 문제였던거로 기억 한다. 일 처리를 위해 다시 출국을 했고, 금방 다시 귀국 할 생각 이었다. 그리고 출국한지 얼마 안되어 걸려온 전화.

 

“의사 선생님이 너희 엄마 임종이 얼마 안남았다고 하니 첫 비행기로 얼른 들어오너라.”

 

연락을 받자마자 표를 끊었다. 그리고 표를 끊은 그 날 다시 연락이 왔다.

 

“돌아가셨다.”

 

이상했다. 눈물도 나지 않고, 슬프지도 않았다. 그리고 실감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임종을 못 지켜 드렸고, 부랴부랴 한국으로 귀국 했다. 장례식장을 가 보니 사촌형이 내 대신 상주복을 입고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이후로는 잘 기억이 안난다. 장례를 마쳤고, 화장을 했고, 장지로 모셨다.

 

집안 선산에 어머니를 모셨고, 함께 와 주신 친척분들과 장지 근처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이 때 까지도 눈물 한방울 안흘렀다. 그러다 외삼촌이 어머니에 대해 무언가를 얘기하셨다. 그냥 추억거리와 누나가 불쌍해서 어떡하냐는 얘기 였던거 같다.

 

속에서 무언가 울컥 했다. 숨이 안쉬어지고 답답했다. 자리에서 아주 조용히 일어났다. 주차장으로 나와 온 가족이 타고온 버스 뒤에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곤 오열 했다. 그제서야 폭포수 마냥 눈물이 터졌다.

 

-계속-

출처 https://youngsoop.com/read-blog/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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