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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행위-개괄
게시물ID : phil_6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D
추천 : 0
조회수 : 67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04/17 23:36:38
1.언어는 불연속성을 갖는다. 마치 액자 안에 있는 회화작품처럼 연속성을 잠식시키고 불연속의 환상을 통해 아우라를 얻는다. 

2.언어의 번복은, 쉽게 말해 앞의 말과 뒤에 말이 달라지면 거짓이다. 연속성을 띈 언어는 거짓과 진실이라는 양자택일에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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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연속성'은 개념으로서 정박시키지 않는 언어, '시간'속에 언어를 파악함을 말한다.

가령 '사랑'이라는 개념어의 어원은 '사랑하다/받다' 라는 동사로 부터 비롯된다. 행위가 이루어지는, 실존하는 시간 안에서 '행위'는 곧 '사건화'된다. 그 사건화는 '사랑 할 것이다.' '사랑 했다.' '사랑 받고 싶다.' 등등의 '사랑하다'라고 하는 부정법의 동사형태에서 파생되는 하나의 결론이다. 때문에 사건은 '사랑'이라는 개념어의 파생 전과는 매우 다른 층위를 갖는다. 사건은 일순의 찰나에 '사건화'되며 '언어의 연속성'은 '사건화'된 개념어에 의해 정박된다. 

'사건화'된 언어는 잠시동안 정박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정박(잠시 머무름)이 아닌 고정불변한(항구적) 무엇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것이 '사건화'된 언어이며 '사랑하다'라는 동사가 명사화 되어 주체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다'가 '사랑'이라는 '명사화'를 거치면서 물질적 차원의 존재지위를 갖게 된다. 그것은 '사랑하다'가 갖고있는 사건화 이전의, 그러니까 파생 이전의 부정법 원형이 갖고있는 가능성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지위이다. 

우리는 '사랑하다'의 물질적 주체, 즉 동사의 행위주체인 '철수'니 '영희'와 같은 실존적 존재와 '사랑하다'가 '사랑'이라고 하는 명사화를 거친 존재를 구분 할 필요가 있다. '사랑'은 사건화 이전에 '철수'나 '영희'같은 물질적 주체에 의해 실현되는 비물질적 존재이다. 때문에 '사랑'은 물질적 존재로부터 존재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반드시 '언어'를 매개로 존재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물질적 존재'를 '실존'으로 '비물질적 존재'를 '존속'이라 구분할 수 있다. '사랑'은 '실존'적 지위가 아닌 '존속'적 지위에서 그리고 오직 '언어'를 매개로 존재한다. 

그리고 '사랑'은 현실의 상황에서 '사건화' 이전의 '사랑하다'라는 동사에 가능성의 발아를 찾을 수 있다. '사랑하다'가 '철수는 영희를 사랑했다.'고 하는 물질적 주체에 의해 '행위'가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언어'를 통해 '사건화'한다. 

언어의 불연속성은 '사건화'를 통해 '정박'될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사건화'된 개념어는 언어를 통해 존속 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된다면, 우리는 '사랑은 무엇인가?' 라든지 '신은 존재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비물질적 존재를 '물질적 존재'의 지위로써 사고하는 방식임을, 그리고 그것이 서구 형이상학에 중요한 문제, '형상과 심층'의 문제와 맞닿아 있음을 사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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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를 읽고 저의 글 '언어와 행위'의 1번 2번을 개괄해 보고자 서론을 써봅니다.
우리는 쉽게 언어가 '진실과 거짓'의 판단에 놓이는 상황을 만납니다. 언어의 진위는 항상 물질적 존재와 그것을 지칭하는 비물질적 존재인 언어의 1:1대응에 그 진위의 근거를 찾습니다. '철수'라는 언어가 진실과 거짓의 진위게임에 들어오면 '철수(인간)'라는 물질적 존재와 '철수(언어)'와의 1:1 대응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비물질적 존재인 '사랑'이라는 개념어는 '물질적 존재'와의 1:1 대응이 성립될 수 없음으로 실재의 '행위'를 통해서만 1:1 대응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랑하다'라는 부정법의 동사가 '사건화'되는 순간에라야만, 다시 말해 '비물질적 존재'인 '언어'를 통해서라야만 '사건화'됩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비물질적 존재'의 진위는 '비물질적 존재'에 의해서만 1:1 대응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언어의 진실/거짓의 진위게임은 '물질적 존재'를 주체로 품고있는 언어의 진위게임과는 달리 항상 '논쟁'의 포화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개념어는 동사의 층위에서 볼 수 있듯이 '역설'과 '무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증오해'라든지 '덜 사랑해 더 사랑해'와 같은 '사건화' 이전의 '의미의 발아형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건으로서 사랑'을 사유할 수 있지만 '존재로서 사랑'을 사유한다는 것은, 저는 '언어적 환상'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언어적 환상에 사로잡힘으로서 아우라를 복권시키고 역설과 무의미를 거세합니다. 오로지 존재와 심층이라는 게임을 통해 '근원적 사랑'에 대해 사유하고자 합니다. (플라톤적 방식이죠.)

아직 책을 읽고 있고 사유는 정리되지 않습니다만, 이 정도의 메모를 진전시켜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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