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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왜 신라
게시물ID : history_27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바가바드
추천 : 3
조회수 : 158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10/04 15:01:12
삼국의 형세에서 중국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왜였다.  왜는 대륙에서 오는 선진 문물을 받기위해서 한반도와 긴밀한 협력체계를 구축할 필요가있었고 한반도의 각국은 왜를 통제해 삼국간의 균형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고대의 해양교류는 연안 뱃길을 통해 이루어졋다.  즉 고구려가 낙락지역을 제압하기 위해 서안평을 먼저 친것은 중국으로부터 낙랑을 고립시키려는 이유인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왜가 초기 중국과 교류를 위해서는 한반도의 국가들을 통하는 방법뿐이였다.

초기의 교류는 낙랑,대방 - 마한 백제 - 가야 - 왜 로 이어지는 교류였으나 4세기초 낙랑과 대방이 축출되고 백제와 고구려간의 해상 교역에 대한 쟁탈전이 벌어졌고 4세기 후반 근초고왕때 백제가 이를 주도한다.  이때부터는 백제 - 가야 - 왜로 연결되는 교역 체계를 수립하고 백제는 서남해 지방을 공략하여 중요한 해상거점을 장악했다.  문제는 이때부터 신라의 국제적 고립이 위기로 다가왔고 신라도 왜와의 관계개선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왜와 교류할만한, 왜의 입장에서 흥미를 끌만한 생산물이 거의 없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왜에게 제공하던 백제의 화물을 중간에 가로채 자신들의 화물인 것처럼 제공하다 사실이 밝혀져 관개 악화로 이어지기도 했다.(니혼쇼키 신공기 47년 4월) 백제와 왜는 정치군사적 동맹 관계로 발전해나갔고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갔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신라는 고구려에 의지했고 고구려도 백제와 왜를 견제하기 위해서 신라가 필요했다.  광개토대왕때 왜를 부추겨 신라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백제를 공격 백제 아신왕이 노객이 될것을 맹세하지만 백제는 곧 왜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시켰다.  397년 아신왕이 태자 전지를 왜에 볼모로 보낸것은 당시 백제의 위급상황에 따른 고육지책이였다.  이후 400년 신라에 대한 공세를 고구려가 막고 오히려 가야지역을 점거(여기서 금관가야는 사실상 박살) 신라에게 지키게 하고 사실상 신라를 보호국으로 삼았다.  이후에도 404년에 백제와 왜 연합은 황해도지역을 공격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남쪽 나라들의 위기감을 강화시켰고 백제의 한성 함락으로 극에 달했다.  이미 신라는 402년 실성왕이 내물왕의 아들 마사흔을 왜에 인질로 보내 외교적 역량 강화로 고구려의 대한 위기감을 해소시키려 했다.  한성함락이후 나제동맹과 함께 백제 - 신라 - 가야 - 왜는 고구려의 대항세력으로 뭉치게 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국제 외교에서 백제는 위상이 실추된 반면 왜는 외교적 역량강화에 나선다.
5세기경 왜는 중국의 남조와 직접 교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3세기 삼국지에 히미코 이후 5세기에 讚 珍 濟 興 武 의 왜 5왕의 이름이 남조 사서에 나타난다. 왜는'사지절 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칠제국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使指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을 자칭하며 승인해줄 것을 요구한다.(송서 57권)  대충봐도 한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승인해달란 의미로 볼수 있다.  이러한 요청은 지속적이고 집요하게 했던 것같다.  또한 백제의 지배력약화를 틈타 영산강유역에 토착세력과 우호를 통해 거점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 당시 전방후원형 고분의 흔적(일본식무덤)이 영산강 일대에 일시적으로 발생했던 것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곧 백제가 6세기전반에(무령왕이후) 힘을 회복하면서 남조사서에서 왜왕의 이름과 영산강의 일본식 무덤흔적은 사라진다.   

이후 나제동맹파기와 고구려 - 백제 - 왜와 나당동맹간의 대결로 변화됬으며 우리가 익히 아는 수순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 갔고 왜는 백제부흥군의 663년 마지막싸움까지 3차례에 걸쳐 군사적 지원을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대충 여기까지가 교과서적인 백제 신라 왜의 관계입니다.

문제는 백제와 신라가 왜와 동일한 친분을 유지했는가와 백제와 왜의 관계는 어떠한가 입니다.

1. 백제와 신라 왜
앞서 말했듯이 백제 신라가 왜에게 동일한 의미를 가지지는 못한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7세기 이전 신라는 문화적 후진 국이였습니다. 또한 풍부한 산물이나 비옥한 토지와도 거리가 멀어 물량공세를 할만큼 풍족한 나라도 아니였습니다.  이에 반해 백제는 평원지대의 국가이며 중국과 직접교류를 통하여 상당 수준의 문화문물을 가지고 있던걸로 보입니다.  덕분에 백제의 공물을 가로채는 사건으로 까지 나타났습니다.  이는 신라가 상당히 급박하게 왜와의 친교를 원했으나 자신들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또한 절과 불상의 제조에서도 백제의 장인이 신라에 초청됬었다는 사실에서도 문화적 기술이 신라보다 백제가 우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적 교류에서도 그 차이는 월등합니다.  신라의 초기 설화적인 관점에서는 일찍이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연오랑 세오녀, 아메노히보코) 이후에 볼모를 보낸 사실이외에는 지속적인 기록이 없으며 사실상 백제에게 주도권을 뺏겼다고 보는게 옳은거 같습니다.  반면 백제는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 파견되었습니다.  볼모의 경우는 국가위기 상황에서 백제가 자발적으로 보내 관계를 확고이 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문무왕의 유언은 그 당시 왜와 신라의 관계를 잘보여주는 점입니다.  그에 반해 백제와 왜의 군사적 연합은 두드러지게 빈번하며 그 적대적 대상이 주로 신라였던 점입니다.

2. 백제와 왜의 관계
먼저 일본의 입장에서 백제가 복속되었다느니 왜의 식민지였느니의 내용은 많은 반박내용이 다른 곳에도 많기 때문에 제외 하겠습니다.  
 백제와 왜의 관계에서 문화적 우위에 관계에서 주로 전파를 하는 관계는 백제였으며 일본 고대문화의 뿌리가 백제 문화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라고 해서 일본이 식민지와 같은 상황이거나 혹은 백제에 예속적인 상황으로 보기는 어렵다.  먼저 양측의 이해관계를 보면 백제는 상당한 문화전파(박사, 승려)를 통하여 일본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해주고 그대신 군사적 지원을 바랬다.  어떻게 보면 백제 입장에서 싼맛에 용병을 고용해서 쓴다는 것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충족의 격차가 어느정도인지는 아직기가 일본에 파견됫을때 그의 백제직분은 군무를 담당하는 司馬직이였는데 일본은 이를 말을 키우는 飼馬직으로 잘못오해해서 아직기에게 말사육을 맡긴것은 중국이나 백제의 선진적 관제와 한자의 어의에 대한 이해 수준이 낮았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를 단순이 교류차원에서 바라보기에는 다양한 내용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먼저 백제가 주로파견한것은 지식인 계층이고 백제에서 이주하여 일본의 지배 세력을 이룬이들은 있어도 일본에서 백제 지배층에 편입한 예를 찾기힘들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은 백제가 지배국으로 복속국에 적절한 통제를 가하기 위해 적당한 인물들을 판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백제의 지식인 계층이 일본의 태자의 스승이 된사례를 봐서는 일본의 대다수 고위층 자제들이 백제의 지식인에게 사사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상황이 몇세기에 달하면 일본의 집권층은 백제인이 아니더라도 친백제계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백제가 약화된 틈을 타 남조와 직접교류를 했던 사례나 백제가 필요에 따라 볼모를 보낸 것을 보면 왜 통치력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은 지배국과 복속국과의 관계라고 보기엔 어느정도 모순을 가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백제가 6세기전반에 세력을 회복하고 중국에 국력회복을 천명한 시점에서 남조사서에 왜가 사라집니다.  이는 적어도 백제가 왜에게 압력을 가할 만큼 주도적인 힘이있다는 것과 왜도 단순하게 백제의 복속적인 국가는 아니였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이러한 외교적 분쟁이 될만한 사례가 있음에도 이후에 백제와 왜가 신라를 제치고 친교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단순한 외교관계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나 혹은 우리가 아는 외교관계 이외에 새로운 형태의 외교관계를 가질 수도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실 고대역사에 대해 현대의 사람들이 파악하는것은 겉으로 드러난 상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결론적으로 왜는 삼국중 그 어느나라보다도 백제와 친교적인 관계 였으며 문화전파를 백제가 주도했다 그러나 왜가 백제에 휘둘려 복속되어 있는 나라는 아니였다고 보는게 옳은거 같습니다.  이부분의 대한 정확한 팩트는 아직도 연구중이고 논란의 연속이다.
 
한가지더 재미있는 것은 무령왕릉 발굴을 통해 나온 관의 재질이 일본에서만 생산되는 금송이였단 점입니다.  이는 문화적교류에서 백제가 일방적으로 일본에 전수했다에서 어느정도는 일본에서도 백제 주었을 지도 모른다는 사고가 가능합니다.      

덧붙여 최근 이소노카미궁의 칠지도는 5세기 후반에 제작한 것으로 신공기에 적힌 근초고왕시절의 칠지도와 무관하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따라서 이소노카미궁의 칠지도에 용어는 백제가 일왕에게 하사하면서 형식상의 문장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견해는 견해이고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ps. 니혼쇼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허무맹랑한 소설책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내용만 봐선 굉장히 왜곡이 심한데 제대로 역사책이나 사료가 전승되지 못한 백제사 혹은 백제와 왜의 관계를 연구하는 분들에게 니혼쇼키는 보물창고와 같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니혼쇼키의 주어를 일왕에서 백제왕으로 바꾸면 한반도의 사료와 비교했을때 잃어 버린 고리를 맞춘 것처럼 잘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철저한 사료비판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무령왕릉 발굴때 그에 대한 주요내용이 니혼쇼키에서 발췌된 내용과 비교할때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일치한 것으로 봐서 아주 완전히 엉터리책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니혼쇼키의 왜곡은 이책이 애초에 만들어질때 천왕가를 칭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고대시대의 천왕에 대한 업적이 부실하거나 없으므로 한반도의 역사 특히 백제사에서 빼온 경향이 많았습니다.  이는 백제가 멸망후 백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넘어오거나 이미 건너온사람들이 다시 돌아가지 않으며 이미 백제와의 많은 교류로 일본에 백제에 대한 많은 지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는 니혼쇼키가 백제삼서를 인용했다는 점(물론 목적에 맞게 왜곡해서)에서 어느정도 분명한것 같습니다.
 
ps.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고대사에 대해 추측을 할때 현재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걸로 모두가 맞춰질 수는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가령 국제관계에서 현재의 우리는 국가관계는 철저하고 냉정한 관계로 인식하지만 그것이 고대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할지는 알 수없습니다.  가령 왕이나 유력귀족의 갑작스런 변덕(의리, 사욕, 그밖에 친분과같은)으로 국가가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들어 지금 우리의 대통령이 김정일이 날 모욕했다고 전쟁이라 선포하더라도 전쟁이 결정되지는 않치만 고대시대에는 소수의 권력자에 의해 국가가 움직이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으니깐요.  즉 가설을 세웠을때 우리의 시점에서 세운 가설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써놓고보니 교과서적인 일반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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