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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남강 유등축제 다녀왔어요
게시물ID : deca_30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꼬마천사
추천 : 13
조회수 : 853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06/10/03 14:42:48
부산에서 진주까지 ㅎㅎ 부지런히 달려갔죠..평일날 가니까 길도 안막히고..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인지..급하게 가다보니 카메라에 배터리는 반도 안남았고 삼각대도 못챙겨가서..어흑..ㅜㅜ
그래서 좋은 사진은 얼마 없네요..
축제 사진 일부와 진주성 일부 올려봅니다.
진주 계시는 분이나 유등축제 다녀오신 분 있으시면 사진 공유해요..^^


■축제의 유래 및 특성 
진주남강에 띄우는 유등놀이는 우리 겨레의 최대 수난기였던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가 영욕으로 얼룩진 민족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1592년 10월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장군이 3,800여명에 지나지 않은 적은 병력으로 진주성을 침공한 2만 왜군을 크게 무찔러 민족의 자존을 드높인 “진주대첩"을 거둘 때 성밖의 의병(義兵)등 지원군과의 군사신호로 풍등을 하늘에 올리며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운데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군사신호로 쓰이기 시작한 유등은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군사전술로 쓰였으며, 진주성내에 있는 병사들과 사민(士民)들이 멀리 두고 온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황속에서 통신수단이 변변치 않았던 절체 절명의 순간에, 등불에 안부를 적어 전하고자 하였던 선조들의 안타까운 심경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김시민 장군의 군사신호로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의 도하작전을 저지하는 전술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 수단으로 두루 쓰였던 진주남강 유등은 1593년 6월 12만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적의 손에 떨어지는 통한의 “계사순의(癸巳殉義)”가 있고 난 뒤부터는 오직 한 마음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와 겨레를 보전하고 태산보다 큰 목숨을 바쳐 의롭게 순절한 7만 병사와 사민의 매운 얼과 넋을 기리는 행사로 세세연년 연면히 이어져 오늘의 진주남강 유등축제로 자리잡았다. 

(위 내용은 문화관광청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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