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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둘과 남편 잃고 눈물뿐인 세상을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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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윤몽룡
추천 : 0
조회수 : 99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2/03 22:42:27
[한겨레21][2011 만인보] 재개발 앞둔 판자촌에 홀로 사는 최금옥 할머니 16살에 시집와 눈물 마를 날 없었던 모진 한평생 열 개의 우물을 가졌다 하여 '열우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인천 부평구 십정동. 우물은 찾을 길 없이 공동묘지로 뒤덮인 땅에 1960년대 후반 가난한 노동자와 철거민들이 모여들었다. 집을 짓고 길을 만들었다. 그 역사만 40년이 넘는다. 긴 역사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노인들이 십정동의 터줏대감이다. 최금옥 할머니도 이곳에서 산 지 45년이 되었다. 올해 여든넷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한 몸이다. 그러나 나이를 속일 수 없어 굽은 허리와 삐걱대는 무릎으로 조심조심 걸어 연탄을 갈고, 높은 문턱을 건넌다. 옛날에 지은 집이라 노인이 지내기에 버거워 보였다. - 부역간 남편, 극성맞은 시어머니 "여기 문이 다 썩었어. 연탄을 때어서 시커멓잖아. 내가 닦으면 되는데 나이가 많아서 허리를 못 쓰지. 집이 오래돼서 엉망이야. 손자들한테 손자며느리 이 집에 데리고 오지 말라 했다고. 집이 이러니까." 낡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 집은 남편과 아들을 잡아먹은 곳이기도 하다. "저쪽 방에서는 영감이, 여기서는 아들이 갔지." 할머니가 잠들고 깨는 이 6.6㎡(2평)짜리 방에서 30년 전, 새파랗게 젊은 아들이 눈을 감았다. "이사를 잘못 왔어. 두 사람이나 죽으니까 사람들이 터가 나쁘다고 그랬어." 그럼에도 이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버지를 잃은 두 손자를 데리고 가난에 허덕이느라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최금옥 할머니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이다. 어릴 적 손이 야무지고 머리가 좋아 못하는 일이 없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야학에 나가 한글까지 깨친 할머니였지만, 그 시절 다들 그렇듯 어린 나이에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시집을 갔다. "왜정(일제시대) 때는 처녀들을 끌고 가는 거야. 그래서 내가 결혼을 일찍 한 거야. 16살에 시집을 가서 그 다음해 애를 낳고. 우리 영감은 20살 먹고. 옛날엔 그랬어." 여자는 일본군 위안부로, 남자는 군대로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집마다 자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나이를 가리지 않고 결혼부터 시켰다. 배우자 얼굴을 미리 보는 것은 사치였다.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가는데, 친정아버지가 딸 시집보낼 집의 어른을 만나고 온 거야. 시댁 될 어른이 하는 말이 '멀어서 걱정이에요'라는 거야. 예전에는 20리, 30리 다 걸어다녔잖아. 그래서 시댁이 멀다는 소리인가 보다 하고 '멀어도 할 수 없지' 했어. 그런데 막상 시집을 가니까 남편 눈이 장님인 거래. 그 집 부모들은 자식이 장님이라는 소리를 못하고 '멀어서 걱정'이라고 그런 거야. 친정 부모는 그게 길이 멀어서 걱정이라고 한 줄 안 거야. 그 시절엔 다들 그렇게 살았어."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부역에 동원돼 집을 떠났다. 홀시어머니와 단둘이 남았다. 모진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8대 장손이었어. 남편도 외동아들이고. 이 집도 아들만 기다리는 거잖아. 그런데 기집애 낳았다고…. 시어머니가 극성맞았어. 낮에는 가마니를 짜가지고 지붕 얹고, 밤에는 새끼를 꼬고. 홀시어머니 아래서 일을 하라는 데로 다 했지. 모도 다 혼자 심고. 남편이 올 때까지 그리 했지." - 피란길에 죽은 두살박이 큰아들 일본군이 사라지고, 부역을 나간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도 낳았다. 시어머니 구박에서 좀 벗어나 평온하게 사나 보다 했는데, 이번에는 중공군이 몰려 내려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옷가지를 챙겨 피란길을 나섰다. 그 길목에서 큰아들을 잃었다. "두 살 먹은 머슴애가 연평 바다에서 죽었어. 설사에 토를 하는데 병원을 다녀, 뭐를 다녀. 그냥 죽었어. 에라, 잘 죽었다. 피란을 다니면서 아프면 얼마나 고생해. 섬이라 물은 짜고. 에이, 잘 죽었다. 새끼 죽었는데 잘 죽었다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고 했어. 연평도에 큰 배가 와서 사람들을 실어가지고 전라도 항구가 있어, 거기다 풀어놓은 거야. 그때 큰딸이 여섯 살인가 다섯 살인가 했는데, 산골짜기를 넘어가는데 '엄마, 다리가 아파서 못 가겠어' 그러는 거야. 너도 죽어라. 여기 산이 좋다. 죽으면 여기다 묻고 갈 테니. 너도 명선(큰아들)이 모양으로 죽어. 그럼 묻고 갈 테니. 그러니까 아무 소리도 못하고 따라오더라고." 남쪽으로 내려와서도 떠도는 삶은 계속됐다. 땅 한 평 가진 것 없기에 발붙일 곳이 없었다. 전라도를 떠돌다 경기도 여주로 살림을 옮기고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옷장사를 했지. 치마저고리, 난닝구니 뭐니, 보따리 이만하게 지고 다녔다고. 시골에는 돈이 아니라 곡식이 나와. 옷을 팔아서 쌀· 잡곡 이런 것을 이고 오면 할아바이(남편)가 자전거를 가지고 마중을 와. 그때 허리가 다 나가서, 지금은 펼 수가 없어." 모은 돈으로 작은 가게를 차렸지만 떠돌이 '노가다'판 노동자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금세 망해버렸다. 막막하던 참에 인천으로 시집간 시누이가 집을 마련했다며 오빠네 식구들을 불러들였다. 그곳이 바로 십정동이다. 40년 전 이곳에는 겨우 집 몇 채가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터는 공동묘지였다. 매일같이 사람들이 땅을 갈고 주검들을 화장했다. 석유 냄새,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 위에 집이 하나둘 생겼다. 길은 진창에, 물 길을 곳도 변변히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떠돌이 세상을 접나 보다 했다. 그런데 이사한 지 3년 만에 남편이, 또다시 3년 뒤에 작은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병마에 시달렸지만 두 사람 모두 병원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돈도 병원도 풍족한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약만 달여 먹이다가 결국은 안 되겠다 싶어 아들을 끌고 병원에 갔지만 의사는 가망이 없다며 돌려보냈다. "아들이 죽을 때 '엄마, 내가 나이가 몇 살이야?' 물어. 그걸 왜 묻냐 그랬더니, '내가 갈 나이는 아니잖아. 큰애 초등학교 들어가는 것은 보고 죽어야 할 텐데…' 그래. 내가 손자를 초등학교에 데리고 갈 때, 그 생각이 나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눈을 감은 아들의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다. 큰손자는 걸음마를 막 떼고 둘째손자는 엄마 뱃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며느리는 돈을 번다며 집을 떠나고,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동사무소를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 그 덕에 연탄값과 보리쌀 반가마니가 달마다 나와 손자들을 키울 수 있었다. - 착실하게 커준 고마운 손자들 "눈물을 하도 빼면 안 난다는데… 나는 눈물이 그렇게 나. 무덤에 가면 우리 할아바지한테 술 한 잔 떠놓고. 아들한테 가서 무덤 풀만 뜯고 우는 거야. 애가 타서 우는 거야. 이제는 안 울지. 공동묘지 (관리하는) 사람들이 와서 '할머니 그렇게 우시더니 이제는 안 우시네' 그래." 익숙한 듯 수건으로 얼굴을 쓱쓱 문질러 눈물을 닦으며 할머니는 말했다. "나는 눈물로 세상 사는 거야. 눈물이 안 나는 날이 없어. 그런데 이렇게 못된 이야기만 들어서 되나?" 사람들이 많이 보는 잡지에 자신의 이야기가 실린다고 하자, 최금옥 할머니는 이렇게 물었다. 자기 삶을 '못된 이야기'라고 했다. 그럼 좋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재미있는 일이 없어. 재미있게 살아보지 못했어. 피란을 내려오며 고생했지. 여기 와서도 할아바지 죽고, 3년 있다가 아들 죽고. 손자 둘 데리고 살고. 그러니 고생이 얼마나 많아. 좋은 꼴을 못 보지. 나 저거 둘 기르느라고 혼났네요." "두 손자 장성해 장가도 갔잖아요. 그게 좋은 이야기죠." "그래 그건 좋은 이야기야. 잘한 거야." 할머니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제일 걱정이더라고. 부모 없이 사니께 나쁜 짓이나 하고 돈이 없으니까 도둑질이나 할까봐. 그런데 애들이 참 착실히 자랐어. 작은애가 결혼을 먼저 했어. 내가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고. 왜냐면 눈물이 떨어질까봐. 아비 일찍 떨어진 핏덩어리였는데 결혼을 한다니까. 그런 데서 울고 그러면 안 되니까. 결혼식 구경 갔다온 아줌마들이 집에 와서 '할머니, 출세했어. 그것들이 나쁜 짓 안 하고 착실하게 있다가 장가갔어' 그러면서 장하다며 내 엉덩이를 두드려주고. 사람들도 울고 나도 울고 그랬어." 방에는 갓난아기의 사진이 걸려 있다. 어느새 증손자까지 본 것이다. 큰손자는 올봄 결혼을 앞두고 있고, 세 딸들도 아들딸을 낳고 각지에서 삶을 꾸려간다. 칠순, 팔순 잔치를 챙겨주는 자식들이다. "이제는 배고픈 고생도 안 하고 살 만하니께, 내가 나이 먹으니까 죽는 것밖에 더해. 그러니까 슬프다 그 생각이지. 피란 다니고 시집살이 하고 고생만 하다… 눈물이 나. 그러다가 울면 뭐하겠냐 해서 전축(카세트)을 틀어놔. 여기 드러누워서 사진을 보고 전축으로 노래 틀어놓고 그러는 거야." 가수 현철을 좋아한다는 할머니는 바깥 외출이 힘든 겨울에는 방에서 노래를 듣는 것으로 마음을 푼다. 사람 잡아먹은 집이라 했지만, 40년을 살다 보니 정이 붙었다. 자식이 눈감은 서늘한 기억 위로 켜켜이 할머니의 추억이 쌓였다. - 남편과 아들 떠나보낸 집에서 마지막을 거금 10만원을 들여 샀다는 고물 카세트와 손자며느리가 해주었다는 이불이 방 한쪽에 놓여 있다. 미국 간 딸이 보내주었다는 미제 커피를 끓이고, 작은딸 식당에서 가져왔다는 텔레비전도 틀어놓는다. 허리가 아파 안아보지도 못했다는 증손자의 방문을 기다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에서 열리는 노래교실에 가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날이 언제 풀리나 조바심도 낸다. 따뜻한 날에는 구멍가게 앞 평상에 동네 노인들이 모여 먹을 것을 나누고 같이 하드를 물고 수다를 떤다. "여기는 시골 같지. 재미져." 잘 우는 만큼 사람들과 실없는 농담도 잘한다는 할머니다. 하지만 십정동은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날이 풀리면 재개발 계획도 성큼 다가올 것이다. 주거환경개선 사업지구로 지정되어, 연탄을 때는 판잣집들을 헐어버린다고 한다. 이미 많은 주민들이 이사를 갔다. 장성한 자식들은 곁을 떠나고, 이야기 동무라고는 마을 사람들뿐이다. 손자들에게 똥오줌 못 가리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다는 정갈한 할머니는, 익숙한 이곳을 떠나 마을 동무들과 헤어져서 어디로 가야 할지 걱정이다. "여기 철거가 되네 어쩌네 해서, 양쪽 방에서 하나씩 죽었으니 내가 마루에서 죽으면 여기서 세 사람 죽는 거다 했어. 나는 그러고 싶어." 남편과 아들을 떠나보낸 이 집에서 마지막을 맞고 싶다는 할머니의 바람은 십정동에 닥친 재개발 바람에 밀릴지도 모른다. 인천=글 희정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정용일 기자[email protected] 공식 SNS[통하니][트위터][미투데이]| 구독신청[한겨레21][한겨레신문]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늘 읽은 기사였는데, 너무나 감동적이고 가슴아픈 사연이어서 올려봅니다. 지금 현재 힘들어 하시는 모든분들... 할머니 사연 읽어보시면서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시길 바라고, 할머니도 오래오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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