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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노점상(뒷북 초스압 브금 주의)
게시물ID : panic_286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티타노마키아
추천 : 10
조회수 : 267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4/22 14:49:30
1 "이런 시발!" 민수는 오늘도 욕을 해대며 하루의 고된 일과를 끝마쳤다.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 그였기에 이 정도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그의 생활 수준을 등급으로 따지자면 중간 정도. 그가 그리 불행할 것도 없었다. 남들과 비슷한 정도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남들과 같은 행복. 그는 그것이 싫었다. 그는 누구보다 더 행복해야 되고, 누구보다 더 돈이 많아야 하며, 누구보다 더 권리를 누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좋은 생각, 일을 함에 있어 추진력을 같게 되는 좋은 생각이었으나, 모든지 과하면 모자르만 못한 법. 그는 그것때문에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어쨌든 그는 고된 피로를 녹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막 도착했을 무렵, 한 골목에서 어떤 노파가 노점을 하는 것이 눈에 띠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노점 앞에 세워진 한 글귀 때문이었다. '마음을 조종하는 약 팝니다.' 그는 그것을 읽자마자 속으로 비웃었다. 당연하다. 마음을 조종하는 약이라. 그런 걸 판다면 그 누가 보더라도 웃기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켠에선 흥미가 돋는 게 인간의 심리. 호기심. 그것은 그 어떠한 본성 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민수는 그 노파에게로 다가갔다. "할머니, 이 약 진짜에요?" 노파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노파에겐 그게 최대한 친절한 미소일지 모르지만 다른 이가 보기엔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물론이지. 이 약을 상대에게 먹이면 그 자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지." "그래요? 부작용같은 건 없나요?" "부작용이라. 있지. 한번 상대의 마음을 조종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만약 다시 되돌리고 싶다면, 아니 다시 조종하고 싶다면 이 약을 재투여해야만 되지." 그건 그리 부작용이라고 말하기엔 크지 않은 것이었다. "얼마죠?" "만원이다." "흐음." 만원. 이 말도 안되는, 사실유무, 아니 거짓이 확실할테지만, 이런 약에 만원이라. 큰 돈이긴 했지만, 속는 셈치고 사볼 정도로 싼 편이기도 했다. 보아하니 노파가 거지인 듯 하니, 자선하는 셈치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나 주세요." "잘 선택했다네." 민수는 음흉한 미소를 짓는 노파에게서 약을 건네받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약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작은, 쌀알 같이 생긴 조그마한 약. 고작 이걸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니. "큭큭." 우스웠다. 하지만 정말로 돈다면 그건 엄청난 대박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일까. 이 약. 진짜처럼 느껴진다. 민수는 잠을 자고 일어나 또다시 출근길에 올랐다. 또다시 반복된 고된 하루인데도 오늘은 그의 입에서 욕이 나오지 않았다. 바로 약 때문이었다. 이 약, 사실유무를 떠나서 매우 흥미진진한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이 약을 시험해볼 상대를 생각해두고 있었다. 개발부 이예진 대리. 그녀는 정말로 이곳에서 왜 일할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미모와 몸매, 지성을 두루 겸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노래도 잘하고 인간관계, 성격까지 좋은 편이어서 연애인이든 모델이든 됐었어도 필히 이보다 더 큰 부를 누렸을 것이 확실했다. 뭐, 어쨌든 그녀가 민수가 다니는 회사에 취직한 건 그에겐 더도덜도 없는 행운이니 그다지 상관은 없었다. 이 걸 그녀에게 먹여, 정말로, 만에하나 이것이 진짜라면,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로 결심했으니 말이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업무도 하는둥 마는둥 하며 빨리 점심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평소 짜증날 정도로 길던 그 시간이 오늘은 더더욱 길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반드시 시간은 흐르는 법. 마침내 점심시간이 돌아왔다. 그리고 역시나 이예진 대리는 점심식사를 끝내고 휴게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안녕, 이대리." "아, 김과장님도 안녕하세요." "다들 어디가고 혼자 있어?" 이대리가 혼자 있는 모습은 정말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나 마찬가지. "담배피러 갔죠 뭐, 헤헤." "박대리는?" "걔는 남자들보다 더한 꼴초에요." "음. 그래? "예. 근데 무슨 일이세요? 하실 말씀이라도?" "아아. 요즘 이대리 모습이 안 좋아 보여서, 약이라도 하나 주려고." "약이요?" "응, 이거 비타민제인데 여자들에게 그렇게 좋다고 하더라고. 한 번 먹어봐." "와! 진짜요? 감사합니다. 김과장님." 이대리는 민수가 건넨 작은 알 약을 그대로 삼켰다. 그녀가 착하고 인간성이 좋기도 하거니와, 상사가 건넨 약을 버리거나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가 약을 먹고 잠시 후. 아니 거의 먹자마자 그녀의 눈이 살짝 풀린듯 보였다. 민수 또한 이를 느꼈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 약이 가짜라면, 그녀의 이성이 남아 있었다면 크게 문제될 발언을 서슴없이 날렸다. "이예진. 너는 이제부터 나만 사랑해야 돼. 무조건." 순간 이대리의 고개가 돌아가며 민수를 노려봤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민수 역시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문제적 발언에 놀란 후였으니까. 그러나 결과가 좋았다. "예. 알겠습니다." "!" 이 약. 진짜다. 진짜 마음을 조종하는 약이다! 그는 그날 밤. 이예진, 그녀의 색기 넘치는 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천사와 섹스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은 쾌락의 절정. 그것도 자신의 늘 품고 싶었던 그녀였기에 그 쾌락은 이루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와 더욱 오래 있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노파를 찾아야했기 때문이다. 이 약. 그것만 있다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다행히도 어제의 그 골목엔 그 노파가 여전히 노점을 열고 있었다. "할머니. 그 약. 하나 더 주세요. 여기 만원이요." 씨익. 노파는 이번에도 역시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백만원." "예에? 가. 가격이 왜 이렇게 올랐죠?" "그거야 파는 사람 마음 아니겠나?" "사죠." 솔직히 안 사는 사람이 바보였다.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값으로 따지지 못할 엄청난 매리트가 있었다. 그는 당장 근처 현금인출기로 달려가 돈을 뽑은 뒤, 그 약을 샀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 약을 회사 사장에게 먹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는 부장으로 승진했다. 모처럼의 휴일. 그는 예진이와 데이트를 하던 중, 거리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다. 예진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민수는 그녀가 한 카페에 가는 것을 목격했고, 다음날 그녀가 그곳에서 일하는 것 역시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예상대로 노파를 찾아갔다. "천만원." "사죠."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갖고 싶었다. 게다가 부장이다. 사장은 자신의 편. 승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돈은 얼마든지 벌 것이다. 그건 확실하다. "하하하!" "오빠, 좋아?" "응." 그는 결국 그녀, 카페에서 일하던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녀와 황홀한 섹스를 하고 있었다. 쾅쾅! 그런데 갑자기 문이 두들겨졌다. 무슨 일인가하며 간단히 옷을 걸치고 문을 열자 갑자기 한 여성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예진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민수는 설명을 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칼. 그것을 본 순간 온 몸에 공포가 엄습했다. "난 너를 사랑하는데!" 그녀, 분명 그를 죽일 생각이다. 그리고, 자신도 죽을 생각이었다. "내 말 좀 들어봐!" "변명은 필요 없어!" "젠장! 넌 이제 날 사랑 안해도 되니까! 네 갈 길가!" "난 이미. 당신에게 몸과 마음을 다 줬어!" 날카롭게 파고드는 칼을 아찔하게 피한 민수는 불현듯 머리 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부작용. '젠장!' 약. 약을 사야 된다. 약을 다시 사야만 돼! "우리 민수씨에게 무슨 짓이야!" 그가 막 모텔을 빠져나온 순간, 뒤에서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였다. 카페에서 일하는 그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녀와 예진이가 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는 그를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약. 약을 사야했다. 다시 노파에게 달려간 그는 숨을 헐떡이며, 약을 사려했다. "하아하아. 약 주세요." "1억." "예? 너무. 비싸잖아요." "사지 말든지." 사야했다. 이대로 두면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죽일 것이다. 분명하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 수중에 그런 큰 돈이 있을리가 없을 뿐더러,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도 그런 돈은 없었다. 대출. 대출을 해야 했다. 하지만. 푸슉. 늦었다. 이미 민수를 따라온 그녀가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피로 흥건한 그녀. 카페에서 만난 그녀 역시 죽여버린 듯, 이미 피가 흥건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곳에서 자결했다. 노파, 자신의 눈 앞에서 살인광경이 일어났지만 노파는 거의 마음의 변동이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불행하군. 이 약. 이제 팔면 안 되겠다." 노파는 노점을 치우며 궁시렁됐다. "그 총각처럼 자신에게 투여하면 좀 좋아? 자기 자신의 마음. 그것을 조종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행복해 질 것을. 내일은 다른 것을 팔아야겠다." 행복노점상. 그것이 노파가 장사하는 노점의 이름이었다. 2 김경식. 기백고등학교에 다니는 그는 소위 말해 일진이었다. 그것도 나름 퀄리티가 있는 일진. 싸움, 키, 외모, 게다가 집안까지 어느 하나 꿀리는 게 없었다. "하아, 젠장. 짜증나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짜증만 나는 건지, 그는 고등학생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러 집을 나왔다. 담배. 미성년자지만 일진인 그가 담배를 피우는 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는 으슥한 골목을 찾아 들어가 담배를 하나 꼬나물었다. 칙칙. 라이터를 켜서 담배를 한모금 빤 그는 쾌감이랄 것도 없는, 지독히도 자연스럽게, 중독때문에 담배를 피고 있었다. "후우우우우. 응?" 담배를 피고 있던 찰나, 갑자기 느껴지는 시선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인지, 그곳엔 한 노파가 서 있었다. 분명 이곳으로 들어왔을 땐 아무도 없었고, 또 사람이라곤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노파는 노점상을 하고 있어보였는데, 참 병신같았다. 이런 골목에서 노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 하지 않는가? 인적도 드믄 곳에서 장사를 한다는 건 애초에 개념자체가 틀려먹었다. 그런데 왜 일까? 호기심이 드는 건. 과연 이런 곳에서 뭘 팔고 있는 것일까? 아니, 반드시 이런 인적 드믄 곳에서만 팔아야 되는 물건일지도. 경식은 자신도 모르게 그 노파에게로 다가갔다. '행복노점상' '행복노점상이라고? 웃기고 있네.' 경식은 노점 앞에 걸린 간판에 코웃음을 치며 도대체 뭘 파는 건지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이상한 것들, 흡사 영화에서만 보던 마법같은 분위기가 나는 물품들이었다.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한 안경에 주목했다. 검정색 뿔태 안경. 스타일도 멋진, 패션 용으로도 적합한 안경. 안경점, 아니 패션전문점에서나 있을 법한 안경이 이런 곳에 있으니 당연히 특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할매, 이거 얼마야?" "그거 말이냐? 백만원이다." 음흉한 미소를 짓는 노파. 경식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노파의 미소역시 그를 경악하는데 한 몫 거들었지만 문제는 말도 되지 않는 가격 때문이었다. "어이, 할매. 이깟게 백만원이라고?" "당연하지. 그건 사람의 마음을 보는 안경이니까." "에에에?" 이번엔 다른 의미의 경악. 사람의 마음을 보는 안경이라고? "풉, 말도 안 되는 소릴 잘도 하시네." 그리고 이어진 비웃음. 경식은 분명 이 노파가 치매에 걸렸다고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음을 보는 안경이라니.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할 수가 없지 않는가! "정 의심나면 한 번 써보던가." "에이, 말도 안 되." 그는 의심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아니 자신도 모르게 안경에 손이 갔다. 그리고 안경을 쓴 뒤 노파를 바라봤다. 결과는. 역시나. "뭐야 할매.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할매 노망난 거 아냐?" 이에 노파는 입술을 비릿하게 말아 올렸다. "말했잖냐, 그건 사람의 마음을 보는 거라고 저쪽을 봐봐라." 경식은 노파가 가리킨 곳, 골목이 시작하는 부분을 바라봤다.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도로를 걷고 있었다. "!" 그런데 놀랍게도, 정말 노파의 말대로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마치 자동으로 읽어진다고 해야할까? 어쨌든 확실한 건, 이 안경. 분명히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꽤나 흥미로웠다. 아니, 잘만하면 이 안경의 활용성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백만원. 그에게 그런 돈이 있을리가 없었다. 아니, 구하려면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심성으로 이것을 굳이 돈 주고 사겠다는 마음 따위 들지 않았다. 상대는 노파. 아니 이미 그런 것을 떠난 문제다. 그는 달리기 시작했고, 이미 그 골목을 벗어나 집에 도착한 뒤였다. "이것만 있으면. 큭큭, 재밌겠는데?" 다음날 아침. 그는 평소때와 다름없이 등교길에 올랐다. 지금까지와 뭔가 다른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가 안경을 썼다는 거다. "여, 안경 멋있는데?" 그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가장 친한 친구 민택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래, 간지 나지 않." 경식이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녀석의 속마음이 보였기 때문이다. '크큭, 병신이 안경 쓰고 왔네. 안경은 멋있는데 너 같은 병신이 쓰니까 완전 코미디잖아?' 그는 순간 얼굴을 굳히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충격.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의 속마음이 겉과는 정반대인 것을 확인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야, 무슨 일있냐? 왜 갑자기 정색을 해?" '별 것도 없는 게 정색하며 가오나 잡고 있네.' "아, 그냥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아서." 갑자기 지어낸 거짓말이었지만, 실제로도 속이 좋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심사라고나 할까. "그래? 괜찮냐? 양호실이라도 가봐." '잘됐네. 씨발 이왕이면 죽도록 아파서 그냥 콱 죽어버려라.' "괜찮아. 좀 있으면 낫겠지." "그러냐?" 경식. 민택이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책상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한숨을 푸욱 내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봐보자. 솔직히 사람이란 게 다 이런 거 잖아? 좋아도 싫은 척, 싫어도 좋은 척. 민택이였기에 상당한 충격은 확실히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르겠지.' 그는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여자친구인 은지에게 가기로 결심했다. "안녕, 은지야." "어? 안녕안녕. 좋은 아침이야?" 귀여운 눈동자에 붉은 입술. 게다가 특유의 해맑은 미소. 보기만해도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그만의 천사였다. 하지만, 안경을 쓴 오늘. 바로 지금만큼은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아, 이 놈 얼굴을 아침부터 보네. 재수없게.' "으. 응. 좋은 아침이야." "뭐 할 말 있어?" "아니, 딱히." "으응, 헤헤." '할 말 없으면 빨리 꺼져줄래? 네 얼굴 보고 있기 역겹거든?' 도저히 어떻게 대처를 해야될지 모를 상황. 게다가 믿었던 인지의 솔직한 마음에 제대로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다행히도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는 도망치듯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고, 충격과 실망이라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늪에 빠져 수업을 받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오늘 수업을 모두 끝마쳤다. 그렇게 기다리던, 평소와 다름없던 방과후였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욱 기다렸다. 주변에 보이는 학우들의 마음에서, 마치 들리는 듯한 '너 같은 건 죽어버려!' '힘만 믿고 까부는 병신.' '깡패같은 새끼.' '인간 말종.' 등등의 마음이 보였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그는 속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고등학생이라면 방과후라도 야간자율학습이라는 게 있었지만, 그가 할리가 없었다. 특히나 오늘 같은 기분으론 말이다. "경식아, 선생님 좀 보자." "예?" 하교하려든 무렵, 갑작스런 담임선생님의 부름에 그는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향했다. 평소 아이들 사이에서 인덕이 높은 선생님이었다. 막나가는 그 역시,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호감이 가던, 그런 타입이었다. "너도 이제 고3이잖니. 대학교라도 나와야 나중에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지. 물론 대학 나온다고 다 잘 산다, 이건 아니지만 요즘은 학벌 사회인 거 너도 잘 알잖아." '너 같은 게 공부는 무슨. 기술이라도 배워 공장들어가서 막노동하며 평생 먹고 살겠지. 아니면 나이먹어서 까지 깡패짓 하다가 칼침맞아 죽던가.' 실망, 분노, 충격. 아니,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자괴감? 자멸감? 허무함? 아니 뭐라 표현해도 좋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아마 없을테니까. "선생님도 별다를 게 없군요." 경식이는 교무실을 뛰쳐나와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밤거리, 쌀쌀하지만 자신의 마음보다 싸늘할 순 없었다. 그는 밀려오는 짜증에 인상을 싹 찡그리며 집을 향해 걸어갔다. '뭐야, 고딩 새끼가 교복이. 양아치 같은 녀석. 저런 새끼 부모는 자식 관리 안하고 뭐하나 몰라?' "야이 개새끼야! 그래, 나 양아치다! 근데 뭐? 씨발 오늘 죽어볼래?"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분노를 폭파시킨 그의 표적은, 얌전히 지나가던 한 중년인이었다. 뭐, 표현상 얌전히 지나가다라는 것이 틀릴 수는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경식이에겐 그럴 수가 없는 것이. 마음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원흉. 이 안경이었다. 그렇다고 벗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불안했다. 이 사람이 또 무슨 욕을 하는지, 보기 싫어도,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게다가 이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버렸으니. 벗어도 큰 의미는 없었다. 그는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라 도저히 자신으로써는 감당키가 어려웠다. 그때. 그가 종종 괴롭히는 민수가 보였다. 어제 자신에게 죽도록 맞아서 오늘 결석한 녀석이었다. 경식이는 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녀석에게 풀기로 결심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야, 김민수. 너 오늘 잘 만났다." "어! 겨. 경식아." 경식이는 다짜고짜 녀석의 멱살을 쥐고 근처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 이유없이 민수에게 주먹을 날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녀석의 생각이 보였기 때문이다. '경식이 화가 많이 나 보이네. 엄마가 학교에 전화해서 선생님한테 뭐라고 한 건가? 그래서 선생님이 경식이를 혼낸 건가? 아니, 그럴리가 없는데 분명 엄마한텐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했는데.' '에이, 뭐,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나보지. 어렸을 땐 뭐 친구들끼리 치고박을 수도 있는 거지. 게다가 학교에서 왕따인 나에게 이렇게라도 관심 가져 주는 건 경식이 뿐이고. 맨날 때리긴 하지만, 실상은 착한 녀석일 거야. 종종 먹을 것도 챙겨주고, 의외였지만 저번 생일때 선물도 준 녀석이니까. 그래. 맞자. 아프겠지만. 이걸로 경식이 화가 풀린다면야.' 민수. 평소 괴롭히기만 했던 녀석. 뭐, 녀석의 생각대로 과자도 주고 한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녀석의 입막음 용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녀석들과는 차원이 다른, 달라도 아주 다른 본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녀석. 경식이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 "야, 어제 때린 곳은 괜찮냐?" "어? 아. 으응." "쩝. 지금까진 미안했다. 앞으로 너 괴롭힐 일 없을 거야. 잘 가라." '이것봐! 경식이는 역시 착한 녀석이라니까. 드디어 마음 고쳐 먹었나 보다!' 경식이는 민수에게 환한 미소를 전해주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엄마, 저 왔어요." "어, 아들 왔어?" 경식이는 신발을 벗고, 안경을 신발장 위에 올려놨다. 아니, 그러려던 찰나, 내심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부모님은 과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다시 안경을 쓰고,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의 입장에선 호기심이라는 것도 크게 비중이 있었지만, 친구들에게 당한 배신감.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에휴, 내 아들이지만, 저렇게 한심한 놈이 태어날 줄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낙태해버리는 건데. 저런 천하의 쓰레기같은 놈이 태어날 줄이야. 아들, 지금이라도 좋으니, 죽어줄래?' 뭐랄까.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옳고, 정확하고, 이해하기가 편할까? 아니, 뭐라고 표현해도 이해할 수 없다. 판단할 수 없다. 이 감정, 이 처참한 배신감을 직접 당해보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경식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손톱을 물어 뜯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생각하는 본심. 친구들이 생각하는 그 마음. 견디기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마저. 이건 도저히. 힘들었다. 너무나도 힘들었다. 이렇게 사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개과천선이라고, 지금부터라도 착하게 지내볼까? 아니.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는지도 몰라. 그래. 죽자.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죽어주마! 경식이는 칼을 들고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목을 찔렀다. "크윽." 고통스러웠지만,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당했던 그 배신감에 비해선 약한 고통이었다. 그는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다. 의식이 점점 몽롱해지는 가운데, 눈동자가 풀리며 시선이 방에 걸려진 거울에게로 옮겨갔다. 그곳엔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고, 또한 자신의 마음 역시 보였다. '살자.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거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은 분명 죽기로 결심했. "컥. 커억. 민수. 이. 개새끼." "으잉. 못 된 놈. 그 안경을 훔쳐가다니. 뭐, 그거가지고 행복하게 살면 된 거지." 노파는 해가 질무렵 노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구석에 있던 한 검정색 안경을 발견했다. "응? 이 안경이 왜 여기에. 아, 키키키키킥! 그 녀석에게 미안하구먼, 이 늙은이가 노망이 들어서 그런지 다른 걸 진열해뒀었네 그려. 킥키키키키킥." 3 지하철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곳.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어느 누구하나 자신보다 무거워보이는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노파를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모두가 모른 척. 두 눈이 멀쩡히 있음에도 모른 척할 뿐이었다. "할머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 삭막하기만한 매쾌한 곳에서 한 청년이 나섰다. 그의 이름은 박민태. 올해 24살인 그는 무거워 보이는 노파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계단을 올라갔다. 생각보다 무거운 무게였지만, 그는 인상하나 찌푸리지 않고 노파를 도와줬다. 아니, 오히려 이 짐을 들고 반이나 계단을 올라온 노파에게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와, 할머니 대단하시네요. 제가 들어도 이렇게 무거운 걸." "어이구, 고맙네 청년." 노파는 인자한듯 미소를 지었지만, 왠지모르게 사악한 기운이 감돌았다. 청년은 그것이 그간 힘든 삶은 대변하는 듯해, 오히려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었다. "할머니, 그럼 저 이만 가볼게요." 솔직히 대학 수업시간에 쫓겨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이었던지라, 급하게 가봐야만 했던 민태. 그러나 노파가 워낙 안 되보여서 도와준 것이었다. "청년 잠깐만." "네?" "청년은 오늘 안에 죽겠구먼." "예?" 이건 도대체 무슨 날벼락같은 소린가. 기껏 도와줬더니만 악담을 퍼붓는 게 아닌가? 오늘 죽는다니. 민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아졌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분명히 운세가 그려. 잠깐만 있어봐." 노파는 그렇게 말하고선 자신의 짐보따리에서 무언가를 찾더니 이내 한 종이를 민태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죽음을 피하는 부적일세. 저승사자가 오걸랑 이 부적을 보여주면 자네는 살 수 있을거야. 하지만 저승의 법률에 따라 자네 대신 한명을 대려가야 하네. 청년이 할 일은 그저, 근처에 있는 사람 한명을 대리로 지목하면 돼." "아. 예, 알겠습니다." 노파의 치매기가 보이는 말에 민태는 오히려 안타까웠다. 노파를 더욱 불쌍하게 여기게 된 그는 얼덜결에 부적을 받아들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내려갔다. "으으, 피곤하다." 강의 시간에 늦어 지각으로 체크되고, 또 강의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다음 시간이 기말고사인데 이건 아주 큰 타격이었다. 그래도 노파를 원망하진 않았다. 오히려 힘든, 그것도 치매에 걸린 듯한 노파를 도와 뿌듯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친구들과 간단히 밥을 먹고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얘기치않게 일이 커져 술을 마시고 노느라 시간이 꽤나 지체됐다. 술기운도 술기운이지만 늦은 시간 때문에 더욱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민태는 지하철 시간이 끊기기 바로 직전에 간신히 탈 수 있었고, 안락한 지하철 의자에 앉아 곤한 몸을 주물렀다. 비록 술기운 때문일테지만, 오늘따라 유독 싸늘한 기분이었다. 특히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승객이 자신 혼자라는 것은 왠지 모르게 으시시했다. 아니, 승객이 한 명 있긴 있었다. 도대체 지금 이 시간에 왜 지하철을 탔는지 의문인 한 꼬마, 넉넉 잡아도 14살 안팍으로 보이는 녀석이 타고 있었다. 뭐, 그거야 그렇다고 치고, 이 으시시한 기분. 그리고 갑자기 낮에 노파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민태는 문득 소름이 돋아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1시 59분. 그리고 잠시 후, 0시가 됨으로써 오늘이 어제가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애초에 믿질 않은 얘기였지만,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지하철이 한 역에 멈춰서자, 어떤 검정 복장을 입은 사내가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리고 수많은 빈 자리 중, 유독 자신의 옆에 앉는 것이었다. 사내가 옆에 붙자, 싸늘한 냉기는 지독할 정도로 자신의 살갗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의 입에선 사기, 죽음의 기운이 범인인 그가 충분히 느낄 정도로 짙고 강했다. "가자, 박민태. 오늘 너의 수명이 다한 날이다." "!" 거짓말, 혹은 미친소리라고 여길 수 있었다. 아니, 분명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찾아와 저런 말을 한다면 헛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민태에겐 그럴 수가 없었다. 노파가 미리 언질을 줬기 때문에? 아니다. 이 사내에게서 뿜어져 나온 말. 그건 인간이 낼 수 없는 기운이며 음성이었다. 그 누가 듣더라도 이 사내. 저승사자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자가 수명이 다했다고 한다. 믿기 힘들지만, 죽는 것이다. 자신이 죽는 것이다. 24살. 아직 젊은 나이. 인생을 막 살아갈 나이에 죽는다니,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문제였다. 민태는 순간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불현듯 떠오르는 하나가 있었다. "잠시만요! 어, 어디다 뒀더라." 민태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 핸드폰, 담배, 라이터. 등등 쓸모 없는 것들이 잔뜩 나왔다. "찾았다!" 그 중에서 그가 가장 원하던 것. 노파가 준 죽음을 피하는 부적. 물론 믿진 않는다. 그것 받았을 때부터. 심지어 지금 그것을 저승사자에게 보여주고 있는 바로 지금까지. 그러나 한번 시도 해봄직하지 않는가? 죽음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한 일말의 가능성. 충분히 시도해볼만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이 부적. 어디서 났는지 모르지만, 꽤나 귀중한 걸 얻었구나." 저승사자의 반응. 정말로, 노파의 말대로다. 죽음을 피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좋아, 오늘 너를 살려주마. 자, 그 대신 너를 대리로 저승에 갈 사람을 지목해라. 단 이 근처에 있는 사람으로 해. 괜스레 내가 찾아가는 수고를 끼치지 않도록." "예. 이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면." 민태는 주변을 둘러봤다. '젠장.' 그제서야 생각이 난 것일까. 술기운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죽음이란, 저승사자의 존재 때문에 미처 생각이 떠오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이 주변의 사람이라곤. 꼬마. 그것도 14살 정도로 보이는. 자신이 살기 위해 저 꼬마를 희생해야 한다고? 그래, 어차피 모르는 꼬마다. 그것을 떠나 자신의 목숨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민태는 아무것도 모른 체 자고 있는, 꼬마의 모습을 슬쩍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죽음이다. 자신의 죽음! 상대가 꼬마라 할지라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저승사자님." "말해라. 누굴 너의 대리로 삼겠는가." 민태는 허무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절 데려가세요." "장난하는 거냐? 이 주변에 사람이 없다면 기다려줄 순 있다. 하지만 저기에 꼬마가 있지 않느냐." "아뇨. 저 대신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설령 저 꼬마. 아니 그 누구라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제가 죽겠어요. 어차피 제 수명이 다한 거라면서요?" "좋다. 그럼 너의 뜻대로 너를 살려주마." "?"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앳된 목소리에 놀란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언제 왔는지 꼬마가 옆에 앉아 있었다. "할매말대로 보기드문 청년이군. 좋아좋아, 아주 기분 좋아. 원래 네 수명이 2010년 3월 8일이었는데, 이걸 이렇게 고쳐서. 2050년으로 고쳐주겠다. 그때까지 잘 살아라." "자, 잠시만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비록 꼬마였지만, 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민태. 게다가 옆의 저승사자 역시 꼬마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점을 생각한다면 보통 꼬마가 아니라는 생각에 절로 존칭이 나오는 그였다. "말 그대로네. 너의 그 착한 마음씨에 너의 수명을 늘려주는 것이야. 착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이 사바세계가 좋아지지 않겠냐?" "그, 그럼 절 시험하신 건가요?" 그의 말에 꼬마는 "음." 하며 대답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부적은 진짜다. 네가 너의 희생양으로 날 지목했다하더라도 너는 살았을 것이야." 꼬마, 매우 음흉한, 꼬마에게서 아니 인간에게서, 아니 옆의 저승사자와는 비교도 안 될 사악함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 기간은 단 하루일 뿐이지. 너가 그 부적으로 살아봤자, 하루란 얘기다. 자, 그럼 나는 이만 가마. 잘 살아라." 화륵! 부적이 갑자기 불타오름과 동시에 순식간에 사라진 꼬마의 모습. 그리고 저승사자. 이 믿기지 못할 상황에 그는 자신이 술에 취해 헛걸을 보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종이조각이 탄 재의 흔적이 지금 이것이 실제상황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이, 할멈." "오, 귀백도령 왔는가?" 꼬마, 나이 지긋한 노파에게 반말을 내뱉는 이상한 관경이었다. "오늘 할멈 부탁 들어줬으니까, 다음번엔 내 부탁을 들어줘야돼. 알았지?" "물론이다마다. 킥킥." 이번에도 순식간에 사라진 꼬마의 모습. 노파는 그 꼬마가 떠난 자리를 보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오늘은 이 간판처럼 됐구만, 낄낄." 노파, 행복노점상 이라는 간판을 툭툭치며 미소를 지었다. 4 최재욱. 이제 고3으로 올라가는 그에겐 수능이란 것 이외에도, 아니 오히려 큰 압박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을 괴롭하는 녀석. 그 녀석이랑 같은 반이 됐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금까진 같은 반이 된적이 없어서 괜찮았다고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쉬는시간만큼, 아니 수업시간만큼은 괴롭힘당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녀석은 그의 뒷자리에 앉아 항상 그를 괴롭혔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과 이름이 같다는 것. 최재욱. 그를 괴롭히는 소위 일진인 녀석도 최재욱이었다. 흔치 않은 이름이었지만, 놀랍게도 동명이인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일 역시 10월 1일로 같았고, 생김새역시 묘하게 닮았다. 아니, 언뜻봐선 완전 판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은 바로 싸움실력과 몸집. 녀석은 축구나 다른 운동을 하지 않고 오로지 싸우기 위해 몸을 달련했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오늘도 역시나 녀석의 괴롭힘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했다. 심부름같은 건 이미 괴롭힘이란 범주에서 벗어난지 오래. 담배빵을 시키는가 하면, 수시로 때리는 건 기본에 온갖 치욕스러운 일까지 당해야 했다. 길거리에서 모르는 여자의 가슴을 만지고 오라는 둥, 어린 꼬마에게 니킥을 날리라는 둥, 결코 평범한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시켰다. 그런 일들로 경찰서에 간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때문에 요즘들어 부모님이 녀석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이 시켜서 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바로 지금.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매우 수치스런 짓을. 해야만했다. "크큭, 야 빨리해!" 여자애들, 물론 여자애들이라고 해봤자, 일진 최재욱과 더불어 같이 어울리는 노는 애들이었지만, 어쨌든 여자는 여자였고, 사람들 앞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건. 절대로 불쾌한 일이었다. "어쩜, 생각보다 크네?" "왜 저걸로 쑤시고 싶냐?" "풉, 꺼져. 너 같으면 저딴 새끼랑 하고 싶겠냐? 그건 그렇고 빨리 싸봐. 보고 싶으니까." 정말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수치스럽고도 수치스러운 일, 아니 짓이었다. 최재욱. 그는 사람들 앞에서 사정을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일진 최재욱에게 죽도록 맞으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사정을 한 그를 보며 여자애들은 깔깔깔 웃었고, 그건 다른 남자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그걸로도 모잘라 일진 최재욱은 그의 옷을 갈갈이 찢어 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꽤나 친근한 목소리로 "잘가라, 킥킥." 웃어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장난감. 그래, 그는 한낫 노리개감이었다. 이런 생활 견딜 수 있을까? 아니, 못 견딘다. 도저히 힘들다. 그럼 콱 죽어버릴까? 아니. 그건 또 아니다. 왜 자신이 죽어야 되는가? 죽어야 될 건 최재욱, 자신을 괴롭히는 그 일진 놈이다. 그래! 죽이자. 죽인다. 정말로 죽인다! "죽여버린다!" 마음을 굳게 먹은 그는 알몸인 상태였기에 최대한 으슥한 골목을 통해 집까지 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바로 내일. 녀석을 죽여버릴 것이다. 반드시! "어이, 학생." "?" 누군가의 목소리. 아니, 말을 하지 않았다면 단지 짐승의 음성으로 착각할 정도로 사납고 매서운 음성이었다. 부름에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한 노파가 노점을 차리고 앉아 있었다. 최재욱. 그는 자신이 알몸이란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노파의 무시무시한 기운에 압도되어 대답했다. "저 말인가요?" "그래. 학생말여. 아주 온 몸이 독기로 꽉차 있구먼." 노파. 날카로운 눈매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누군갈 죽이고 싶구먼? 아니, 이미 결심했군." "!"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저 노파 뭔가 신비한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아주 굴욕적이고 괴로운 일들을 당한 모양일세. 그런데 고작 간단하게 죽인다면, 그 응어리가 해소 되겠나?" 맞다. 죽인다고 해도 결코 후련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으로썬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아니지, 아니야. 더 좋은 방법이 있네. 이건 과거로 가는 약이라네." "과거로 가는. 약이요?" 그는 노파가 들어 보여주는 노란색 알약을 바라봤다. "그래. 10년 뒤로 돌려주는 약이지. 시간을 역류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부작용이 있지만, 충분히 그 가치는 있을게야." 믿기지 않는 말. 아니 있을 수 없는 말이었다. 분명히 저런 약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묘했다. 신뢰감이 든다기 보단, 뭔가 묘한. 그런 기분이 그를 이끌었다. '과거로 간다.' 분명 노파의 말대로 큰 장점이 있었다. 과거로 가서 힘을 키운다. 그리고 그걸 고스란히, 지금까지 당했던 것을 일진 최재욱 그놈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거다. 지금까지 당해왔던 것을 모조리! 10년이다. 10년이면 충분히 강해지고도 남는다. 온갖 격투기, 싸움을 위한 운동. 그것을 위한 단련을 한다면, 최재욱 그놈도 별 수 없다. 녀석을 굴복시킨 뒤. 똑같이 해주는 거다. 어느새 그는 노파에게 다가가있었다. "근데 부작용이란 게 뭐죠?" "킬킬. 별 거 없네. 기억마저 과거로 되돌아가는거지." 기억마저 과거로 간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복수를 이룰수가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당해왔던 것을 한 번 더 당하는 꼴이지 않는가? 노파 역시 이 생각을 꿰뚫어 봤는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아주 강하게 소망코자 하는 것을 생각하고 각인시킨다면, 자신이 그것대로 행한다네. 예를들어 이 약을 먹기 전에 '열심히 공부하자' 라는 생각을 가지면, 과거로 돌아간 자신은 열심히 공부하게 되는 거지." "생각만 하면 되는 건가요?" "물론이야." 그렇다면 간단했다. 그가 원하고자 하는 생각은 단 하나. '최재욱을 최대한 괴롭힌다. 그리고. 죽인다!' 이 생각. 너무나도 강렬하다. 노파의 말대로라면 100% 이루어질 것이다. "얼마죠?" "킬킬. 학생에겐 공짜로 주겠네. 이 간판대로, 난 누가 행복해지는 걸로 만족하거든." 노파가 톡톡 건드린 간판에는 행복노점상이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시선을 간판에서 다시 노파가 건넨 알약으로 옮긴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세긴 뒤 그것을 삼켜 먹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쯧쯧. 어린 녀석이 어쩌다가 이런 일을." 한 중년인은 출근길에 신문을 보며 혀를 끌끌찼다. 신문 내용은 이러했다. '9살 소년. 스스로의 몸을 학대하다 결국 자살.' 도대체가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하는 건지, 참 세상이 말새였다. 고작 9살 밖에 안되는 소년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귀백 도령. 이걸로 빚은 갚았네." "고마워, 할매. 그 녀석 원래 10년 전에 죽었어야 되는데, 저승사자들이 약간 실수를 해서 말야. 그건 거렇고, 쿡쿡. 역시 할매야. 이런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내다니 말야!" "별 거 아닐세." 꼬마, 고작해야 14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가 버릇없이 노파에게 반말을 내뱉었지만, 노파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듯 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정상으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아냐아냐, 정말 대단해. 동명이인이라는 점을 이렇게 이용해 먹다니 말야. 어떻게 하면 10년 전에 죽을 수 있나 고민했는데, 역시 할매는 대단해!" 꼬마,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킬킬 웃어댔다. 5 한 번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과거로 간다면. 현재의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공부는 못하는 편이지만, 어릴때로 돌아간다면 분명 영재소리 들을 것이 뻔했고. 앞으로 일어나는 예언을 할 수 있으니 꽤 재밌을 것 같다. 그보다 가장 먼저 할일은 로또를 사는 일이겠지. 이런 꿈에서만, 상상에서만 펼쳐지고 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러니까 할머니. 이 시계가 정말 과거로 돌아가는 거란 말이죠?" "물론이다. 시간을 입력하면 과거로 갈 수 있지. 몇 가지 제약이 따르긴 하지만." 청년. 24살 정도로 보이는 청년은 그리 잘생긴 편도, 못생긴 편도 아니었다. 키는 조금 작은 편이였지만 그냥 보기에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흔하디 흔한 타입이었다. "제약이요?" "그래. 과거로 가긴 가는데 30분 밖에 갈 수가 없다는 점이지." "흐음." 30분이라. 로또는 꿈도 못 꾸겠구만. 하지만 단지 30분이라도 과거로 갈 수 있는 메리트는 충분하다. 뭐든지 해도 상관 없다. 어차피 30분 뒤로 돌아가면 모든 게 초기화. 청년, 김진수는 순간 머리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거 얼마에요?" "그냥 가지게." "예? 왜요?" "글쎄. 오랜만에 다시 장사를 시작하는 기념이라서라고 해두지." "아, 그래요?" 진수는 그 시계를 받아 자신의 손목에 찼다. 그때 노파는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었다. 진수에게 그 미소는 마치 등골이 서늘해지는 미소였다. "한 가지 단점이 있네." "단점이요? 제약말고도 단점이 있나요?" "그래. 5만 번밖에 쓸 수 없다는 거지." 5만번. 무한이 아닌 것에 비해선 단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건 오히려 장점으로 구분해야 된 일이 아닌가? 이유는 모르지만 진수는 크게 나쁘게 받아드리지 않았다. 아니 누구나 그럴 것이다. 5만번. 5만이라는 숫자는 매우 크다. 거의 무궁에 가깝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진수는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시계의 성능을 한 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간단하게 집안을 어지럽히고 시계를 설정해 10분 전으로 설정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집안은 어지럽히기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또 그는 편의점에 가서 물건을 사고 시계를 20분 전으로 되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편의점에 가기전, 그러니까 시간 상으로 집에 있던 시간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물건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미래의 일이니까.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분명 기억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이 시계가. 진짜라는 것이었다. 진수는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이 계획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밤. 어두운 밤.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적막에 쌓인 어두운 밤은 계획된 것을 실행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그는 조용히 골목에서 먹잇감을 기다렸다. 평소에 좋아하던, 아니 남몰래 사랑하던 여인. 이름도 모른다. 나이도 모른다. 다면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시간대에 그녀가 이곳을 지나간다는 점과, 무지하게 섹시하다는 점이었다. 또각또각. 오늘도 역시나 그녀가 하이힐을 신고 골목을 지나간다. 새끈한 각선미와 화려한 외모는 진수의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진수는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그녀를 덥쳤다. "꺄악!" 비명을 질렀지만, 굳이 막을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반항이 그를 더욱 흥분시켰다. 진수는 웃옷을 찢어버리고 치마역시 벗겨버렸다. 검정색 스타킹을 찢고, 그녀의 입술과 혀, 콧잔등을 혀로 핥았다. 남몰래 항상 밤마다 꿈꿔왔던, 상상에서만 가능하던 섹스를 드디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수는 그녀의 깊은 곳을 사정없이 찔렀다. 고통스러운지 비명을 질렀지만, 진수에겐 오히려 그게 쾌감성으로 다가왔다. 절제하지 못한 까닭인지 아니면 너무 흥분된 것인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고, 그녀의 얼굴에 사정없이 사정을 했다. 그러자 때마침 경찰들이 나타났다. 누군가가 신고한 모양이다. 그것도 재수없게 바로 근처에 경찰이 있었던 모양. 하지만 상관 없다. 그래 상관 없었다. 그는 시계를 10분 뒤로 되돌렸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신이 숨어있던 곳에 있었다. 또각또각. 다시 그녀가 등장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진수는 다시 그녀를 덮치고 반복했다. 이번엔 다른 체위를 하며 그녀의 모든 것을 가졌다. 유린하고 또 유린했다. 그녀의 맛있는 몸은 계속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는 다음을 기약했다. 이 시계만 있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진수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져갔다. 버스. 그곳에서 정말 색기가 잘잘 흐르는 여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무슨 맛일까, 하는 야한생각이 먼저 지배했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상상할 것도 없었다. 직접 해보면 될일이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버스에서 그녀를 정열적이게 쑤시며 매만졌다. 사람들은 소리를 치며 버스에서 내릴 뿐, 여자를 도와주거나 그럴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단 한 명. 버스기사만이 도와주러 오긴 했으나, 늙었다. 아무리 키가 작은 진수라 할지라도 젊은 그는 충분히 늙은 버스기사를 때려 눕힐 수 있었다. 그리고 한바탕 사정을 끝낸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 그리고 질릴 때까지 이 일을 반복했다. "후우우우. 정말 끝내주는구만!" 아직도 42019라고 뜬 숫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숫자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는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버스를 탄체 더 이상 섹스를 하지 않고 집으로 가려 결심했다. 그런데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버스가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다리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콰아아앙!' 부서진 철대와 유리 조각에 온 몸이 난자당한 진수. 괴로웠다. 내장이 흘러내려가고 피가 흥건히 몸을 적혔다. 내장하나하나가 느껴질 정도로 놀랍게도 정신이 맑았으며, 고통스러웠다. 유리조각에 하나하나 찔려진 피부는 괴롭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하얗게 들어난 뼈마디에서 흰 액체가 흘러가고 있었다. "크어어억, 크으으." 그는 애써 시계를 조작했다. 과거로, 과거로 가면 살 수 있다. 사고가 나기전의 과거로 돌아가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띠딩. 시계가 작동되는 특유의 알람이 울렸다. 다행이었다. 다행이도 작동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살 수 있. '콰아아아앙! 푸슈우우욱!' "크으윽. 도,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분명 과거로 갔는. 고장났다. 사고로 시계가 고장나 버렸다. 30분전으로 입력한 것이 30초 전으로 입력되버렸다. 빌어먹을. 다시 한번! '띠딩 쿵아아아아앙! 푸슈우우욱!' "크아아아아!" 이번에도 실패.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시계는 분명히 고장나버린 것이다. 또다시 내장의 미끈거리는 것과 이 참을 수 없는 고통. 그럼에도 맑디 맑은 정신. 이것을 또 되풀이 해야했다. '다시. 다시.'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과거로 가서, 이 시계가 고장나기 전. 그 짧은 시간에 다시 과거로 가면 된다. 해본 적은 없지만. 가능할 것이다. '띠딩. 쿠아아아앙! 푸슈우욱!' 타이밍이 없다! 시계를 조작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시계는 정확히 사고가 나는 그 시점으로 가버려서 조작이 불가능했다. "크. 크."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가장 현명한. 선택.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다시 시도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 이대로 죽는 것이 오히려 낫다. 이대로 죽어버리. '띠딩 쿠오아아아앙! 푸슉!' "크아아아. 도대체?!" 고장난 시계는 스스로 과거로 회귀했다. 스스로 과거로 가버리는 것이다. '띠딩. 쿠와아앙! 푸슉.' "크아아아아아아!" 피가 사방으로 튀며, 하얀 끈적이는 액체가 몸을 타고 흘렀다. 내장은 여기저기 널부러졌으며 드러난 뼈에선 지독한 냉기가 스며들었다. 그럼에도 정신은 놀랍도록 맑았다. '띠딩. 쿠아아앙! 띠딩 쿠아아앙! 띠딩띠딩. 띠딩.' 30265 시계에 적힌 숫자는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5만. 그것은 진수의 생각대로 무궁에 가까운 숫자였고. 노파의 말대로 치명적 단점이었다. "이제. 30265번만 더 죽으면. 돼." '쿠아아아아앙!' 웃대 리드백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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