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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덕☆ 충무공 이순신 1/2/3
게시물ID : history_47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장비를정지
추천 : 19
조회수 : 216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6/21 09:05:12
아주 오래전에 밀덕질에 꽂혔을때 썼던 글이라 반말체입니다.

수정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 올립니다.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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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무관 이순신이 두만강 부근 북방에 녹둔도로 부임한 시절.

 
둔도는 두만강 끄트머리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퇴적물이 쌓여서 만들어진 곳이야.

 
걸어서 갈수 있는 상태로 섬이라기보단 여의도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편안해
 

조선의 조정에서는 녹둔도를 여진족을 막는 최전방기지로 설정하고 거기에 둔전을 설치하지

  

 

둔전은 군대가 거기서 살면서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하며 버티는 거지.

 
젊은 이순신은 이 녹둔도를 책임지는 둔전관으로 발령받아 부임한다.

 
일단 농사를 지으며 주변의 상황을 빠짐없이 체크한 이순신은 지방 사령관에게 요청을 한다.

 
 

 

- 여기 요충지인데 적의 위협에 비해서 군사가 너무 적습니다. 충원좀 해주세요.

 
하지만 사령관은 쌩까버리지.

 
그리고 가을.

 


 

추수철에 식량을 노리고 여진족이 개때처럼 밀고 들어와.
 

녹둔도 주둔군은 열심히 맞서싸웠지만 압도적인 머릿수의 여진족에게 패배했고 군사 10명이 전사


백성 160명이 끌려간다. 이순신은 곧바로 군세를 재정비해 추격전을 시작했고 적장 3명을 잡아죽이고
 

백성 60명을 구출해서 돌아와
 

하지만 지방사령관은 패전을 이유로 이순신을 감옥에 가두고 조정에 보고를 하지.

 

  

 

이때의 왕은 선조.
 

병1신킹의 쌍두마차지만 이때만큼은 이순신을 감싸안는다.

 
비록 패전했으나 그건 머릿수가 너무 차이나서 였네. 그냥 보직해임 정도로 마무리함. 땅땅

 
이게 이순신장군의 첫번째 백의종군이야. 첫번째 백의종군은 그냥 장교신분 유지한채 대기발령만

 
받은 상태였어. 

 

 

그리고 세달뒤


중앙정부에서 병력을 지원해서 함경도 관할 사령관이 직접 2천 5백명의 군대를 이끌고
 

밤 2시에 두만강을 건너서 야간에 여진족 마을로 밀고 들어간다.

 
새벽쯤에 도착하여 마을을 통째로 태워버리고 주민을 모조리 몰살시킨뒤에 뺏긴거 도로 전부찾고
 

덤으로 여진족꺼도 싹다 가지고 돌아온다. 피해는 0

 

 

이순신은 이 전투로 백의종군을 벗어나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한편 조총을 받아들이고 여러열이 교대로 발사하여 연속발사의 효과를 얻는 전술을 개발한

 
일본은 내전 후 통일을 이룩한다. 통일 후 필요없어진 군사력을 소모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세웠고 조선은 일본의 침략의도를 파악하지만 내부의 분열로 인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며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혼란안에서도 조선은 전국적으로 성을 쌓으며 전쟁을 준비했고 반대파의 주장도

 
무리한 전쟁준비로 백성의 삶이 어려워진다는 것이었지 전쟁자체를 무시하고 당파싸움을

 
한것은 아니었다. 어쨋든 류성룡의 지휘아래 전국적으로 전쟁준비는 이루어졌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조선의 운명을 구하는 최고의 선택이 이루어진다.

 

  

 

 

 

 

 

 

 

 

 

 

1591년 초.

 
류성룡이 천거한 이순신을 수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북방에서의 활약을 이유로 들어

 
전라 좌수사에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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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덕★ 충무공 이순신 2 - 수군의 증강

 

 

조선이 수군을 유지한 것은 왜구대비용이었어.
 

단순히 배를타고 이동하는 군대가 아니라 배위에서 쌈박질을 할 군대의 필요성을 느낀거지
 

왜구를 때려잡고 얻은 인기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수군을 정식으로 편성한다.

 

 

수군은 6개월씩 2교대로 근무하는 형태였어. 2개월씩 6교대로 근무하는 육군과 달리 기간이 길어서
 

전문성도 확보할 수 있었고 훈련량도 괜찮은 평이었지. 하지만 실전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고(왜구)


훈련이 힘들어서 점차 천한애들 위주로다가 하는 일이 되어갔다.
 

물논 그래도 수군전력은 잘 유지되는 편이었지.

 

 

조선 수군이 폭발적으로 발전한건 세종대왕 시대야.


세종대왕 시대에는 수군의 병력이 조선군 전체전력 11만의 절반가까이 되는 5만명에 달했고

 
각종 무기와 화포의 개발도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전투함의 건조도 계속되어서


군선의 숫자가 800척을 넘어서기 시작했어.


더구나 세금수송업무인 조운을 독립시켜서 조졸이라는 조직에 전담시켜서 수군은

 
전문 전투집단으로 성장해 나갔지.

 
세종대왕을 보면 "" 문무겸비 한민족의 로또 "" 라는 말이 레알 떠오른다.

 
 

세조 시대에 들어 시들해졌던 군사력 강화움직임은 이후 삼포왜란을 거치면서 새로운 군선개발과
 

전투력 증강이 필요한걸 느끼고 다시 시작돼.

 
선조 바로 전의 왕인 명종때에 기존까지 쓰던 맹선을 대체할 신형의 대형 전투함이 탄생하게 된다.
 

그 이름은 판옥선

 

  

대규모 소형고속정이 연안에서 우수하다는 어디선가 들어본거 같은 여론을 물리치고 판옥선은

 
조선수군의 주력함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하여 속도는 좀 느리지만 회전반경이 작아서 빠르게 선회할 수 있었고


특유의 구조로 비전투원이 적군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은채 전투를 치를수가 있었어.
 

일본의 군선에 비해 대단히 견고하고 갑판이 높아 쉽게 일본놈이 넘어올수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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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의 초기행적은 기록이 없어


하지만 확실한건 이순신은 특유의 원리원칙 & 세심꼼꼼을 기본으로 수군진영을 빠르게 안정화 시켰을테고

 
전력을 착실하게 증강시켰을꺼야. 

 

 

그리고 그에 더해서 태종 혹은 고려때 개발되었다가 잊혀진 배를 이순신이 발굴(혹은 개발)해낸다.
 

배를 장갑으로 감싼채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선을 말야.

 
그 이름은 거북선.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서는 전력증강작업과 함께 거북선도 건조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 부임하고 1년이 지난 1592년
 

일본의 지배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28만명의 대군을 대마도에 집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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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덕★ 충무공 이순신 3 - 개전

 
 

1592년 4월 13일
 

고니시가 이끄는 28만의 일본놈들은 대마도를 출격. 부산으로 항해를 시작한다.
 

일본군의 앞을 가로막는 첫번째 요새는 부산진성

 
 

일본군은 병력을 상륙시키며 정찰대를 파견한다.

 
당시 부산진성의 총책임자이던 수군 첨절제사 정발은 이미 일본군이 상륙한 사실을 보고

 
해안의 선박을 일본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모조리 불태우고 성내의 군민을 모두 모아
 

방어전을 펼칠 준비를 한다.

 
 

상륙 다음날인 4월 14일.

 
부산진성은 28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일본군에 맞서 물러나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무너지고 말고 곧이어 지원 요새이던 다대포진도 함락당한다.

 

  

당시 울산에 있던 경상좌병사(육군사령관)인 이각은 병력을 모아 동래성으로 급히 내려왔고 

 
경상좌수사인 박홍도 병력을 집결시켰으나 본인은 도망친다(어?)

 
그리고 동래성에 있던 이각역시 일본군이 성 근처까지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도망친다(어?)

 

  

드디어 성 아래에 도달한 일본군은 항복을 권유하지만

 
동래성을 책임지고 있던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긴 어렵다 새퀴들아""
 

라고 대답하며 거부한다. 곧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고 치열한 저항끝에 동래성도 무너진다.

 
 

 

이후 작은 고을들에서 굴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했으나 일본의 대병력앞에 모두 무너지고

 
각자 방어를 위해 병력이 모인 밀양, 대구, 울산, 상주 에서는 최고지휘관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지휘체계가 무너져 싸우기도 전에 군대가 와해되고 만다.

 

  

 

침략이 시작된지 6일 후인 4월 19일 드디어 한양에 침략소식이 알려졌고

 
전쟁위기 내각(?)이 설립되어 유성룡이 대빵에 신립에 부대빵에 선임된다.
 

비록 부대빵이지만 무관인 신립이 가는게 옳다는 여론에 따라 정부의 병력을 모아서 신립은


경상도 방향으로 출격하고 조령, 추풍령, 죽령 등 요충지의 방어계획을 수립한다.

 

 
 

경상도의 최후방이었던 문경에서는 지휘관은 모두 도망치고 판관 권길이 혼자남아 농민이라도 

 
모아서 저항을 준비했지만 역시나 해일에 쓸린듯 무너져버리고 문경성에 결사대 20명과 남아

 
일본군 수만명에 저항했던 문경현감 신길원 역시 허무하게 전사한다.

 

 

한편 충주까지 내려온 신립은 8천의 병력을 모았고 일본군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정찰결과 부장이던 김여물은 문경새재를 막던가 한양으로 물러나 병력을 더 모으고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신립은 기병위주의 조선군이 활동할 수 있고, 도망병을 방지할 수 있게
 

금강을 뒤로한채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다.

 

  

 

하지만 탄금대는 기병이 활동하기 힘든 저습지였고 4월 28일 문경새재를 무저항으로 돌파해온
 

일본의 고니시군과 맞서게 된다. 
 

조선군은 기병돌파를 성공시키며 일본군에 최초의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대규모의 일본군에 결국 밀리게 되었고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으며 패배한다.
 

대장인 신립은 남한강에 투신하여 자결하고 부장인 김여물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다.

 

 

  

그리고 4월 30일.

 
충주의 패배를 전해들은 선조는 비를 맞으며 북쪽으로 도망가고 임금이 도망갔다는 소식에

 
노비문서 보관소인 장예원등을 포함한 도성의 대궐은 일본군이 한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궁궐로 몰려간 백성들에 의해 불타오른다.

 
대부분의 군대가 무너지고 임금까지 도망친 조선의 운명은 바람앞의 등불이 되어 위태롭게 흔들린다.

 

 

 

 

 

 

 

 

 

 

 

 

 

 

 

 

 





 

 

 

5월 4일.

 

전라좌수영에서 판옥선 24척을 주력부대로 하는 85척의 함대가 경상도를 향해 출격한다.

 

함대 사령관은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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