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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게시물ID : gomin_3878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lueRose
추천 : 1
조회수 : 476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2/08/21 02:59:29

어릴적 나의 가족은 이상한 가족이었다.

 

정말 천제와 같은 두뇌를 가진 아버지는

무척이나 기분파여서 아버지가 기분이 좋으실 때에는

가족이 행복했지만 기분이 나쁘실 때는 지옥과도 같았다.

 

무척이나 많은 부부 싸움 속에서 나는 현실 도피를 하였다.

 

부수고 던지고 이어 들려오는 비명소리...

 

하지만 어린 나는 그저 바라 보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티비를 보거나

어머니가 보시던 드라마를 녹화해 놓고 아버님께 드릴 커피를 타 놓으며

부부 싸움이 끝나면 어머니께는 녹화된 비디오를 드리고

아버님께는 커피나 물 한잔을 드렸다.

 

"싸우지 마시고 웃으세요, 이거 보시고 이거 마시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건내었던 그것들...

그때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천제 같은 두뇌를 가진 아버지는 여러가지 발명품으로

기업에 스카웃 되어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인천으로 이사가게 되었다.

 

넓은 집, 쾌적한 공간, 자가용.

 

몇년 간이지만 부유했다.

하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부부싸움은 끊이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아버지는 외로우셨던 것은 아닐까.

아마도 어머니는 감당하지 못하셨던 것은 아닐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본다.

 

그러다 아버님은 사업을 시작하게 되셨고 IMF가 터지기

몇년 전쯤 사업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아버님이 무너지셨다.

 

집에 빚쟁이가 찾아오고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성을 잃으셨고

계속 잠을 못 이루셨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웬걸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막내 삼촌이 초인종을 눌렀다.

 

"XX야, 놀라지 말고 들어."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자."

 

그 전날 아버지는 계속된 불면증에 시달리시다가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시고는 영어 사전에 싸인을 해주시고

 

"미안하다, 아버지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다."

 

라는 말을 남기시고는 집 밖으로 나가셨다.

그렇게 다시는 돌아오시지 못했고.

 

나는 삼촌 차에 타고 아무 말 없이 장례식 장으로 떠났다.

 

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도, 하늘도 평소와 같은데

아무련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도 한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웬지 어머님 앞에서 눈물을 흘려서는 안될 것 같았다.

 

훗날 외삼촌은 내게

 

"장하다, 어머님 앞에서 눈물도 안보이고"

 

라고 말하셨다.

 

그 후 나는 지금 까지도 눈물을 흘리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며칠 후 인천의 넓은 집에서 서울의 매우 좁은 집으로 이사왔다.

 

그때 나이 초등학교 6학년 이었고 어머님은 내 걱정에

아버지께서 안계시다는 소리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내가 처한 환경에 그 어떠한 불만도

불편도 느끼지 않고 덤덤하게 살았고 그것이 익숙했다.

 

1년은 어머님 말씀이라 지켰지만 중학교 입학 후 나는 숨김 없이 털어 놓았다.

 

어찌된 일인지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가족은 평화로웠다.

전부 어머님의 피나는 노력 끝에 이루어진 성과였지만 난 그 나름의 행복을 누렸다.

 

슬프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할 시점에 대학에 들어가면 돈이 들어야 하고

어머님의 짐을 덜어 드려야 겠다는 생각에 어차피 공부에 관심도 없는 것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뛰어 들었다.

 

음지에 가려진 일.

양지에 들어난 일.

 

가리지 않고 이것 저것 다 했다.

 

어려서 부터 가족들은 내게 항상.

 

"네가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

"네가 어머니 지켜드려야 한다."

 

라는 세겨진 강박관념에서 였을까, 아니면 원래 호기심이 많은 성격에서 였을까.

나는 꿈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아서 이것 저것 닥치지 않고 했다.

 

그 사이에 연애도 하고 아주 폭 넓은 대인관계를 가졌다.

 

그러던 어느날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나는 외로웠다.

나는 슬펐다.

나는 힘들었다.

 

뒤 돌아 보면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던 것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언제나 밝고 유쾌하며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던 나에게 염증을 느꼈다.

 

그렇게 핸드폰에 500명도 넘게 등록된 전화번호를 200개 이하로 줄이고

그렇게 사람 만나고 술자리 좋아하던 내가 사람을 가려 만나고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

 

고졸임이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정도 안정된 직장에 직함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염증을 느낀 나는 사표를 제출하고 1년 만에 수료되어 퇴사를 하였다.

 

퇴사하기 몇달 전, 언제나 가보고 싶었던 나라 일본으로 휴가를 떠났다.

 

혼자 떠났다.

 

평소에도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있는 것을 즐겼다.

어쩌면 모든 것을 등지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마치 혼자 무언가를 하는 것이 벼슬 인냥 고독을 씹으며 일본을 다녀왔고

몇달 후 아는 형의 권유로 미국으로 떠났다.

 

어차피 돈은 있었다.

그래서 떠났다.

 

물론

 

혼자 떠났다.

 

미국에서 뭔가 돈 될만한 것은 없을까 이래저래 살피던 중.

 

한 여자를 만났다.

 

나보다 3살 연상의 여자.

너무도 생활력 강하고 혼자임에 지쳐있던 여자.

마음속에 상처와 같이 피해의식을 품고 있었던 여자.

무척이나 기분파 였던 여자.

 

그 여자를 만나 3개월 채류, 한국으로 돌아와 10일도 되지 않아

또 다시 미국으로 떠나 3개월을 채류 했다.

 

모아 놓았던 돈은 온데간데 없었지만.

사랑을 얻었고 이 여자라 생각했다.

 

나는 줄곧 미국에서 홀로 고생하는 그녀에게 한국으로 가자고 말했다.

미국에서 투쟙, 쓰리쟙을 뛰며 고생하는 것의 반 만으로도 훨씬 더 풍족하게 생활 할 수 있었으니까.

 

LAX 5개월 출입 금지만 풀리면 내가 미국으로 떠났을 터인데

그녀가 한국으로 왔다.

 

그녀는 한국에 가족이 몇 남아 있었지만

나와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초대 했고 두달쯤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 어머니는 집을 얻어 나가시고

우리는 월세 집으로 이사를 하였고

그 사이에 나는 취직을 하여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몇달 후 결혼 신고 먼저 하게 되었다.

또 몇달 후 살던 도중 회사가 망했고 나는 실직자가 되었으며

그녀가 먼저 취직을 하게 되었다.

 

모든 업무가 컴퓨터와 관련된 이 나라의 직장에 겁을 먹은 그녀는

그녀의 스팩에 훨씬 못 미치는 직장을 잡아 쉬는 날도 거의 없이 일을 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처럼 일 밖에 모르는 여자가 되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느꼈을 뿐, 그녀의 마음엔 언제나 내가 있었다고 말했다.

 

다시 나도 새 직장을 얻었지만, 그녀의 일밖에 모르는 모습은 바뀌지 않았고

강박관념 처럼 남의 욕, 환경 탓을 하는 것에 점점 지쳐갔다.

 

내가 퇴근 하면 그녀는 없었다.

내가 출근 할때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내가 쉬는 날에 집안일을 하면 하루가 지났고

우리가 함께 외출 하면 다투기 일수였다.

 

문화의 차이.

언어의 차이.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면 어이 없을 정도로 별거 아니면서 큰 차이.

 

나는 그것을 전부 안고 가기에는 아량이 없는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울증과 같은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숱하게 털어 놓고

숱하게 대화 해도

10시간이 넘는 대화 속에 새벽 6시에 잠들어 30분 자고 출근 하는 일이 반복 되어도

 

그녀와의 벽은 좁혀 지지 않았다.

 

어렴 풋이 느꼈지만 그녀의 성격은 과거 아버지의 성격과 닮아 있었다.

일 밖에 모르고 엄청난 기분파...

 

나는 은연중에 아버지와 닮은 여자를 찾고 있었던 것일까?

 

문득 두려워 졌다.

 

시간이 흘러 우리 아이가 생기고 식탁에 가족이 앉아 식사를 하는데

서로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두려웠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간청했다.

 

묵살 되었다.

 

그렇게 이혼을 제의했고 그녀는 언니네 집으로 떠나 별거 생활이 6개월 정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혼하였다.

 

서로 수 많은 노력을 했고

서로 수 많은 대화를 했고

서로 수 많은 사랑을 나누었지만...

 

우리는 맞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 없이 서로 참으며 결혼 생활을 지속 할 수는 있었겠지만...

 

과거 나의 부모님, 나의 가족이 떠올랐다.

 

그런 나의 가족이 싫어 친구도 만나지 않고 퇴근 후 바로 집으로 오고

퇴근 후 피곤 함에도 그녀의 직장으로 찾아가 하루에 서로 얼굴 보는 시간을

30분으로 늘려 봐도 소용이 없었다.

 

언제나 나는 그녀 밖에 몰랐고

처음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가족을 이끌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나도 그녀도 행복할 수 없다라는 것을 느꼈다.

계속되었던 다시 시작하자는 그녀의 제안을 나는 묵살 하였다.

 

이혼 후에도 계속되는 그녀의 제안을 나는 묵살 하였다.

그렇게 몇달이 지나고 별거 생활을 빼면 8개월도 안되는

서로가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인 결혼 생활의 끝을 맺었다.

 

정말 모든 노력을 다 쏟아 부었기에 미련은 남지 않았다.

 

그토록 눈물을 흘리지 못했던 내가 그녀를 만나고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슬프거나 괴롭지 않다.

 

아니, 어쩌면 나의 고질적인 문제.

슬픔과 괴로움을 담담히 넘기는 일종의 현실 도피였을 지도 모른다.

 

지금도 괴롭거나 슬프지 않다.

 

논리적으로 서로 불행 할 수 밖에 없었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고 자위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휴가를 맞이하여 또 2박 3일을 홀로 드라이브 여행을 떠났다.

 

4번의 일본 여행.

2번의 미국 여행.

1번의 한국 여행.

 

모두 혼자 다녀온 나는 서른이 되어 깨달았다.

 

이제 나도 고독을 씹으며 즐기는 사람이 아닌

고독에 씹혀 괴롭혀 지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조금씩 성격을 고쳐가려 노력 중이다.

 

아무리 잘난 척, 논리 적인 척, 똑똑한 척 해봐야 인간은 혼자의 삶을 견딜 수 없다.

 

슬픔을 짖 눌러 없애고

고통을 짖 밟아 없애고

눈물을 씹어 삼키는 사람이 아닌...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고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고

눈물을 시원하게 흘릴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대로 라면...

다시는 똑 바라른 사랑을 하지도

다시는 똑 바로 사랑을 받지도 못 할 것 같아 두렵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그만 냉정해 지고...

좀 더 넓은 아량을 가지고

좀 더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다...

 

단단한 나무는 모진 태풍에 부러지지만

유연한 버드나무는 결코 부러지지 않으니까.

 

나는 지금 부러져 버렸지만...

딛고 일어나 버드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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