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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그녀
게시물ID : readers_44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설가j
추천 : 4
조회수 : 369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2/12/01 20:04:45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만큼 새하얀 그녀는 눈부시게 웃으며 나를 보고 서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 항상 존재해 왔던, 하지만 그랬기에 더욱 기억하기 어려웠던 그녀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언제였을까... 내가 이토록 빛나던 그대를 처음 만났던 순간은...


어린 시절부터 우린 함께였다. 난 그녀를 바라보며 자랐고, 그녀는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것을 알려주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고, 배우고, 익히며 자랐다. 그녀는 나의 인형과도 같았다.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꾸미고, 치장하고, 화장했다. 어렸을 적에 나는 변덕이 심해서 내가 입힌 옷이 맘에 안 들 때에는 그녀를 원망하고 또 질책했다. 힘든 일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항상 웃어 주었다. 또 그녀는 모든 꽃을 담을 수 있는 화분이었다. 빨간 꽃도, 파란 꽃도, 향기로운 꽃도 모두 그녀의 화분 속에서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그러다 나른한 봄날의 오후처럼 눈이 감기는 날이면, 그녀는 포근하게 두 손으로 나를 감싸 안아주곤 했다. 그녀를 내 마음대로 꾸미고, 입히고, 또 그녀의 품에서 자던 시절,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은 지나 나의 10대 때 나는 그녀의 겉모습을 바꾸는 것을 그만 두었다. 어떤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지 깨달은 뒤 난 그녀를 다듬어갔다. 그녀를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다. 누구보다 빛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화려해진 그녀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사람들의 환호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자랑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불안했다. 눈을 뜨면 그녀가 사라져 있지 않을까, 내가 다듬어 준 모습을 싫어하면 어쩌나...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이었다. 내가 그녀를 이대로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그녀의 다듬어진 모습을 내가 싫어하진 않을까, 그녀의 손을 절대 놓지 않을 거라 다짐했지만 과연 내가 이 손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했다. 따뜻한 그녀의 품을 벗어나지 않을 거라 말했지만 그녀의 열기가 사라지진 않을까 걱정했다. 더 이상 그녀를 꾸미지 않겠다고 대답했지만, 커지는 내 욕심이 그녀를 또 다시 바꾸게 만들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나에겐 더 이상 그녀가 내 삶의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 가야만 했고, 공부를 해야 했으며, 미래를 준비해야 했다. 하루, 또 하루. 내가 그녀를 보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녀를 보지 못하면 못할수록, 나의 열망은 커져만 갔다. 그 때의 나는 꽃샘추위가 끝나고 따뜻한 여름이 오듯이, 잠깐의 이별이 끝나면 더욱 뜨거운 사랑을 하리라 믿었다.

그리고 20대 초반의 나는 그녀와 항상 함께 있었다. 이별 뒤 맞이한 그녀는 더욱이 아름다운 미소를 띠고 있었고, 난 다시 그녀에게 빠졌다. 그녀와의 만남이 시작되고 난 깨달았다. 그녀는 그녀 자체로 가장 아름다웠다. 그래서 난 그녀를 벗겼다. 그녀의 몸을 더듬고 그녀와 사랑을 나눈 그 순간들은 당신과 나 사이의 여름이었다.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게 된 나는 그녀에게 더더욱 깊이 빠져들었고, 그런 그녀는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에겐 군대가 찾아왔다. 수많은 고민을 했으나, 내 과거를 떠올리며 그녀와는 마지막이 될 잠시만의 이별일 뿐이라 자위하며 국가의 부름에 응답했다.


군대에 있던 모든 순간순간 그녀를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내 삶 모든 곳에는 그녀의 손길이 닿아 있었고, 그것을 잊고 살기엔 나의 모든 관점은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녀를 보지 못하던 시간 동안 내 그리움은 커져만 갔고, 그 그리움은 또다시 그녀에 대한 타는 듯한 갈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군대에서 제대한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에게 달려가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 때도 내가 떠났던 날과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겨 주었고, 우리는 다시 한 번 불 같은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여름의 타는듯한 뜨거움에 지쳐갔다. 그녀는 나를 변함없는 모습으로 반겨주었지만, 나는 이제 그 익숙한 아름다움이 지겨워졌다. 그녀는 언제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군대에서의 생활은 나를 사회에 눈뜨게 하였다. 바뀌지 않는 그녀가 너무 아이 같았고, 나의 마음은 그녀를 떠나기 시작했다. 익숙한 습관처럼 그녀를 부르고, 그녀와 몸을 섞었지만, 난 더 이상 사랑을 느낄 수 없었다. 결국 뜨거웠던 여름의 마지막 날, 난 그녀를 떠났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게 된 30대부터, 난 그녀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겐 코 앞에 주어진 일이 너무나 많았고, 뜨거웠던 그녀와의 사랑을 추억하기엔 내 몸은 너무 지쳐있었다. 가을의 낙엽이 떨어지듯 그녀와의 추억들은 하나 둘씩 내 기억 속에서 떨어지기 시작했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게 될 때까지 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나이가 들고, 내 사회적 위치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 삶도 더욱 더 안정되어 갔고, 난 내 아내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다. 모나지도, 그렇다고 움푹 들어가버린 삶을 살지도 않고 평평하고 원만한 인생을 살았다. 가끔 낙엽 밟는 소리에 그녀의 생각이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난 그녀의 모습조차 어렴풋이 기억할 뿐,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녀가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좋았던 한 때일 뿐이라 내 자신에게 말했다.


내 나이게 60이 되어갈 즈음에, 나는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남은 생애를 충분히 살아갈 만큼 노후계획도 세워 놓았고, 나의 자식들은 결혼을 해 귀여운 손자도 보았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 믿었고, 또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자신이 기특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내 옆자리를 지켜준 아내와 함께 오순도순 살다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겨울이 오며 나뭇잎이 떨어진 나무에 눈꽃이 피었다. 나는 불현듯 그녀를 기억해냈고, 그녀와 나누었던 사랑을 떠올려본다. 젊음의 패기와 야망이 뭉쳐있던 그 때를 기억해내곤 괜히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파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좋은 추억이라 웃음지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눈꽃이 필 정도로 시린 겨울이었지만 그녀와의 기억 속에서 따뜻했다.


나는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만큼 새하얀 그녀는 눈부시게 웃으며 나를 보고 서 있었다. 먼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여름의 마지막 날 내가 그녀를 떠난 모습 그대로 그녀는 나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왜 몰랐을까, 그녀는 계속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나의 봄, 여름을 같이 보내고 내가 그녀를 떠난 가을에도 그녀는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음을. 그녀를 다시 보게 되자 후회한다. 내 가을을 그녀와 같이 보내지 않았음을. 삶에 지쳐 내가 만들고 꾸미고 다듬고 만졌던 그녀를 버렸음을. 하지만 버려진 피조물인 그녀는 아직도 나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정말 안다. 그녀의 몸 위를 포근히 덮어주는 저 눈들은 이 겨울이 흘릴 마지막 눈들인 것을. 이게 내 삶의 마지막 장면인 것을. 그래서 더욱 슬퍼한다. 더욱 더 빨리 그녀를 찾지 못한 자신을 원망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던 그 사랑을 떠나간 것을 후회한다. 그녀가 이제 손을 뻗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손을 잡으면 다음 봄엔 다시 그녀 품에서 잠들 수 있을까. 그리고 얘기한다.


안녕, 그 어떤 것보다 찬란하게 빛났던 나의 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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