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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추도문
게시물ID : readers_46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에프켓
추천 : 2
조회수 : 28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01 23:59:19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있었다. 사실은 서있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관계는 굉장히 일방적 이었으므로, 그녀의 거짓말 같은 소식은 나에게 덤덤하게 다가왔다. 은밀히 고백하자면, 언젠가 몇 번, 죽었으면 하는 바램을 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지난 몇 달 정도, 아니 몇 년 정도, 나는 그녀에게 지쳐가고 있었다. 닿지않는 나의 목소리는 메아리로도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처다도 보지 않은 채 어딘가를 바라보는 동공이 풀려버린 눈이 - 사실은 남들보다 눈동자가 큰, 꽤나 매력적인 그 눈이 나에게는 점점 커다란 구멍으로 다가왔다. 촉촉한 코, 그리고 아직 솜털이 남아있던 그 얼굴, 깎지 않아 물어뜯어버린 손톱과, 산발한 머리카락, 나는 너에게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게 언제인지는 사실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렇게 네가 나에게서 떠나버린지, 벌써 오래되었다. 사실은 오래되진 않았다. 아직 사람들이 팔다리를 다 가리기에는 조금 거부감이 들던 그 계절, 시몬, 너는 낙엽밟는 소리가 들리기는 하느냐면서 일부러 낙엽을 골라밟던 너는, 그 해, 그 가을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내앞에서 사라졌다. 솔직히 꽤나 일방적인 관계였으므로, 나는 사라지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술에 취해 혼자 남은 방에 들어와, 소리소리를 지르며 잠들었던 어느 쌀쌀한 토요일. 아니, 술이아닌 외로움에 취한 그날 밤, 나는 내가 게을러서 생긴 부주의를 실감나게 맛보고야 말았다. 침대에 남아있던 너의 흔적, 나는 왜 깨끗하게 청소를 안했을까. 그날, 너는 내방에 들어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는 그런 너의 모습을 보기 힘들어, 침대로 눕히고 나는 어디서 잘까 망설이다가, 그녀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 그녀와는 아무 감정이 없었으나, 단지 명색이 집주인인데 추운 바닥에서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내 등뒤에 닿는 그녀의 숨소리와, 등에 닿는 그녀의 코, 또 어딘지 모를 그런 온갖 해산물같이 역겨운 비린내가 내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렇게 썩은 생선처럼 밤을 보낸 기억이 난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손에 잡힐 듯 부드러운 머릿결, 나는 그녀에게 그 머리카락에 한눈에 반했다며 상투적인 고백을 했다. 그녀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단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볼 뿐이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내 이름도 모르지 않았을까, 지금도 모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된다. 사실은 별 신경 쓰이지 않는다. 단지 그녀와 나는, 말그대로 그녀와 나 이면 그 존재 자체로 충분했다. 그 이상은 단순히 마음이 가지고 싶었던 허상의 사치, 닿으면 허공에 흩어져 먼지처럼 사라질 것들에 불과한 감정이었다. 그녀와 나는 생불학적으로 그녀와 나 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은 사실은, 너무 많은 상처를 내다가 결국 스스로 잠들었다.


  겨울, 그날도 역시 술에 취해 내몸 가누지 못할 그때에, 그녀는 눈을 맞으며 창밖에 서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머리와, 커다랗고 초점없는 눈동자, 맨발로 밖에 서있는 그녀는, 이번에는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입을 열어 무슨말을 해도 좋았을 것이다. 사실은 그리 달갑지많은 안았을 것이다. 내가 문을 잘 잠그고 들어왔던가, 지금 경찰을 부르면 저 사람 집에 가지 않을까. 혀가 꼬여서 제대로 주소를 말할 수 있을까, 창문은 잘 잠궜을까. 한번에 너무 많은 물음이 떠올라 제대로 대답해주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는 도중, 그녀는 사라졌다. 어쩌면 원래 그자리에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 그녀의 소식을 들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멍하니 앉아있었다. 너와 나의 관계에는 아무런 방향조차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사실 슬퍼해 줄 수가 없다. 다만 차갑게 땅이 얼어버린 요즘, 너를 위해 땅을 파야할 수고스러울 인부들의 안위가 걱정이 될 뿐이다. 다만, 너 들어갈 때 나는 꼭 한 번 가겠다. 가서 그녀 자는 자리 위에 밟히지 않은 낙엽 한장 구해 주겠다.


  나는 슬프지 않다. 언젠가 내가 술을 마실 때, 누군가가 나에게 너의 안부를 묻는다면, 나는 호쾌하게 웃으며 너의 비보를 알릴 수 있는, 그런날을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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