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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안아드릴까요."
게시물ID : readers_47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향유
추천 : 13
조회수 : 55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12/02 01:53:14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베이지색 기모 코트는 꽤 두툼해 보였지만 가느라단 목이 텅 비어서 안쓰러웠다. 목도리를 하나 감아주고 싶었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안아드릴까요.

-아니요.


들고 있는 피켓조차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대답이었다. 옆에서 K군이 킥 웃었다. 민망함에 약간 짜증이 났다. 필요 없으면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왜 그렇게 서서 쳐다봐.

하얗게 입은 남자 셋이 P양에게 다가왔다. 역시 인기 폭발이다.


-메리크리스마스


P양이 그들을 차례로 ‘안아줬다.’ 물론 그 모양새는 난쟁이 P양이 안기다 못해 사내들 품에 파묻히는 꼴이었지만 김 교수님 말에 따르면 프리허그란 “포옹을 통해 외롭고 지친 현대인의 파편화된 정신을 치유하는 캠페인”이고, 우리 중 유일하게 커플인 P양은 비록 모타리는 주먹만 하더라도 정신 건강은 가장 완벽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 그녀는 정서적 갑의 입장에서 외로운 솔로들을 ‘안아줄’ 능력이 충분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문득 시선이 돌아가 그녀를 찾았다. 긴 생머리 위로 눈발을 하얗게 쌓아올리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그부츠로 눈을 꾹꾹 밟으면서 스킨푸드 쪽으로 가더니 그 건물 1층의 처마 아래로 쏙 들어갔다. 시간이 꽤 흘러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습관적으로 확인하다가 이따금 이쪽을 쳐다볼 뿐이었다. 종종 발도 굴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내가 여고생 한 무리를 안아주던 때에 다시 스킨푸드 옆으로 나와서 내 쪽을 한번 돌아보고는 거리를 따라 좀 내려간 다음, 네이처 리퍼블릭 근처에서 잠깐 머뭇거리다 버거킹을 지나서 마침내 거리 저 아래로 사라졌다.


캠페인은 예정보다 삼십 분이나 길어졌다. 여덟 시가 좀 넘어서 P양은 연애질을 하러 갔고 K군은 소개받은 여자를 만나러 갔다. 피켓은 근처 휴지통에 버렸다. 곧바로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버릴 작정으로 을지로입구역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연인들이 득실댔다. 지나치는 순간 들리는 짧은 몇 마디, 한 줄짜리 영화평, 선물에 대한 감동, 모텔에서 보낼 밤에 대한 미지근한 농담. 옷깃을 여며주고, 어깨를 감싸주고, 깍지를 끼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세심한 움직임.


내 머리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사소한 말이며 행동에서 전 여자 친구의 파편을 하나씩 찾아냈다. 그리고 윈도우 조각 모음을 하는 것처럼 그걸 짜 맞췄다. 교양 수업에서 그녀를 만나 다섯 명이 하는 조별 과제를 둘이서 하던 4월부터 시작했다. 올해 여름이 유달리 뜨거웠던 까닭은 우리가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가을에 낙엽이 지면서 우리의 사랑도 한 장씩 떨어졌다. 애증의 첨예한 경계에서 다투고, 싸우고, 투정에 지쳐서, 실수와, 진심의 오해와, 결국 부질없는 내 자존심 때문에 끝으로 몰고 가 마침내 모든 것을 박살내버린 게 2주 쯤 되었다.


명동 3길에 지난 1년이 차례로 굴러와 레드카펫처럼 깔렸다. 그러자 애달픈 발이 점점 무거워졌다. 스무디킹 사거리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도착할 때 쯤엔 상태가 최악이었다. 난 고개를 푹 숙이고 근처 빌딩 아래 주차장으로 도망쳤다. 희뿌옇게 번진 어둠 속으로 간신히 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제일 구석진 곳 파란색 모닝 옆에 잡초처럼 주저앉았다.


난 정말 울고 싶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간 인연 아름답게 간직하며 살고 싶었다. 희미하게 잊혀지길 바랐다. 이렇게 명동 길 한복판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어느 주차장에 쪼그리고 앉아서 초라하게 흐느끼는 건 정말로 싫었는데, 프리허그를 하러 나오면서 그렇게 다짐했는데. 묘한 억울함이 감정을 더 북돋우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오늘 나를 한 번 쯤 생각은 해줄지, 한 여름이 아니면 항상 추위를 조금씩 타는 사람이었는데 오늘처럼 날씨가 찬 날에 옷은 따뜻하게 입었는지.


숨을 헐떡대며 울다가 지쳐서 고개를 들었다. 주차장 저 끝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황급히 뺨을 닦는데 그녀가 보였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딱 봐도 상태가 최악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떨었다. 목을 텅 비워놓으니까 춥지. 파란색 모닝을 양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리허그…… 하시던 분이죠.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네.

-아직 하나요.


대답이 늦자 그녀는 화장이 번져 엉망이 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안아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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