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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과거] 산문 - 여의도 공원의 작은.
게시물ID : readers_51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머시멜로☆
추천 : 2
조회수 : 21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12/02 23:54:27

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있다. 왼손을 높이 들어 올려 그녀의 오른손을 잡고 있는 아이의 빨간 모자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꾀나 오랫동안 서있었을 텐데 둘은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이도 칭얼대지 않고 발치에 쌓이는 눈을 휘적거릴 뿐이다.

내가 약속시간에 너무 늦었다. 횡단보도 반대편에 서있는 나는 구둣발을 굴렀다. 그렇지만 신호는 더디게 바뀌었다. 아직 재설차가 지나가지 않은 도로길에는 차들도 느리게 움직인다. 나만 초조해 하는 것 같다.

자동차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스위치가 올라간 듯이 보행자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사람들 무리가 일제히 움직이자 나도 실려 움직인다. 각양각색의 머리꼭지 사이로 아이의 모자와 그녀가 어른거린다. 손을 들어 올리고 싶었지만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다. 백색의 배경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그녀와 아이는 마치 신기루처럼 다가가면 사라질 것 같다. 답답함에 손을 들어 올리고 싶었지만 팔이 자유롭지 않다.

드디어 반대편 보도블럭의 턱을 밟았다. 사람들도 제 갈길로 일제히 흩어졌다.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해 오늘…….”

“됐어. 당신은 항상 늦잖아 바뀌는건 변명뿐이지”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이 옷을 여며주며 낮게 중얼거렸다. 모자에 얹어진 눈도 털어주었다. 오래 기다린 티를 내기 싫은 것처럼.

“진짜 미안해. 나도 빨리 오려고 했다니까. 세명이는 아빠 안 보고 싶었어?”

세명이의 빨개진 볼을 보며 웃었다. 세명이는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부츠를 만지작거렸다.

이 눈과 추위 속으로 오기위해 스케줄을 몇 번이나 조정했는데 아무도 아는척을 안해준다. 섭섭하다.

그녀가 세명이의 작은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빨리 움직이자. 감기 걸리겠어”

“어? 어 나 요즘 감기기운 있거든 신경써줘서 고마워”

쪼잔한 티를 내기 싫어서 웃으며 말했다.

“당신 말고. 세명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그녀가 앞장서 걸었다. 불쾌하지만 세명이에게 더 이상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않다. 참아야 한다.

“어디로 갈까?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여의도 공원근처, 눈발 사이로 즐거운 사람들처럼 보이기 위해 그녀의 등 뒤로 최대한 즐겁게 말을 붙였다. 코트 뒤로 그녀의 머리만 찰랑거릴 뿐 아무 대답이 없다. 참자. 난 주머니로 손을 찔러 넣으며 세명이 옆으로 달라붙었다.

“세명이는 뭐 먹고 싶은거 없어?”

오랜만에 보는 세명이는 키도 커지고 살도 찐 것 같다. 커진 발바닥으로 씩씩하게 걷는 듯 싶지만 통통한 발 때문에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가기 힘든 것 같다. 조금이라도 추울까봐 겹겹이 껴입어서 살쪄 보이는 건가. 얼굴은 어떻게 변했을까. 내 아이의 웃는 모습을 보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세명이는 마치 처음 보는 듯이 낯가림 사이로 숨는다. 모자사이로 삐져나온 분홍색 뺨밖에 보이지 않는다.

“세명아. 아빠가 물어 보잖아.”

오랜만에 품안에 안아보려고 엉덩이를 팔로 감았다. 순간 세명이가 우는 소리를 하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내 팔을 밀쳐내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이를 안아들었다.

“하지마. 애가 싫어하잖아”

“왜. 나도 부모잖아. 안아볼 자격이 있어”

아이를 안은 그녀의 눈빛이 모성의 위협으로 가득 차있다. 나를 더욱 밀어내는 것 같다. 욱해서 큰소리가 나왔다. 바로 후회하고 목소리를 줄였지만 아이에게는 충분히 위협이 됐을 것 이다. 세명이는 우리의 냉랭한 분위기를 곧잘 읽어내곤 울음을 터트렸으니까.

“당신 만날 때마다 이런 식이야. 어떻게 조금도 변하지 않아”

내리는 눈발 연인들을 찾아가는 연두색 흰색 사람들 사이로 우리만 서있다. 멈춘 시간사이로 천천히 얼어간다. 멀리서 들리는 캐롤이 들려온다. 흔들리는 징글벨 소리가 점점 커진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넘어갈수 있을 것 같은데 자존심으로 꽉눌린 목구멍으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세명이는 훌쩍이기 시작했고 그녀는 어깨에 걸친 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징글벨 박자에 맞추어서 두려움을 털어내듯이.

“오늘은 이만 가자.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고.”

아무말없이 입술을 비죽거리던 그녀가 방금 만났을 때처럼 세명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난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다. 할수도 없었다. 그녀의 부츠가 빙글 돌아 여의도 공원을 가로질러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등과 머리카락. 그리고 세명이의 빨간모자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잘가라는 인사를 해주면 다음 기회가 좀더 일찍 올 것 같아서 눈으로 인사한다. 눈으로 사과한다.

캐롤이 끝나자 종소리가 울리자 녹색과 흰색의 무리가 섞여간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여의도 공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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