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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年女優
게시물ID : animation_251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말련
추천 : 1
조회수 : 611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12/16 00:58:17

아아........


십년전에 보았을 때와 너무나 다르네요.


오늘 저녁부터 두 번이나 다시보기로 보았습니다...


ㅜㅜ






http://engweg.tistory.com/160


만화영화 [천년여우] - 길 잃은 역사의식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애니메이션 『천년여우』(감독: 곤 사토시, 2001)를 감상했다.(무연님,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_^) 혹시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을 위해 덧붙이지만 이 만화영화는 제목이 연상시키는 것과는 달리 천년 묵은 구미호 나오는 전설의 고향의 한 버전이 아니라 왕년에 이름을 드날렸다가 은퇴한 영화배우 후지와라 치요코의 사연을 그린 작품이다. 필시『千年女優』라는 제목은 치요코(千代子)라는 주인공의 이름에서 딴 것이리라 짐작되며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일편단심을 강조하는 상징어일 것이다. 

아직 연예계로 발을 내딛기 이전인 소녀 치요코는 일제 군국주의에 저항하는 운동가이자 화가를 자기집 창고에 숨겨준다. 치요코는 그를 사랑하게 되고, 그 남자는 "아주 소중한 것을 여는 열쇠"만을 치요코에게 남긴 채 사라진다. 그로부터 그의 자취를 좇는 치요코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녀가 배우의 길을 택하게 된 계기도 그가 있는 만주로 가기 위해서였으며, 이후 계속 배우의 길을 묵묵히 가는 이유도 그가 언젠가 스크린에서 연기하는 자신을 보고 자신을 찾지 않을까 하는 한줄기 희망 때문이다. 이 모든 자초지종은 치요코를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다치바나 겐야와의 인터뷰를 통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치요코가 풀어놓는 지난 이야기 속으로 다치바나와 카메라맨이 직접 걸어들어가 때로는 수동적 관찰자로, 때로는 적극적인 참여자로 활약하는 모습은 환타지적 요소를 가미해 이야기의 재미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며, 치요코가 출연했던 작품들은 연대와 장르를 막론하고 어지럽게 교차되면서 여배우 개인의 사연과 감정을 부각시키는 장치로 활용된다. 매우 세련된 구성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치요코가 들려주는 자초지종에 집중하고 싶은 관객들로서는 자신들의 성급한 호기심이나 안타까운 마음이 이런 복잡한 장치들로 인해 제어받는 느낌도 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지나친 신파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의도된 것일 수도 있겠고, 단순한 줄거리의 극복을 위해 예술적으로 살을 붙이는 시도였을 수도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약간 번잡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를 보고나면 무엇보다도 치요코의 "지고지순한 첫사랑"이 남기는 인상이 압도적이다. 반체제 화가에 대한 주인공의 집착적인 사랑은, 그 집착성을 관객이 어떻게 바라보든 간에 일단 보편적으로 슬프고 아름답게 다가오며, 그런 그녀를 조용히 짝사랑해왔던 다치바나의 곁이야기 또한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눈물 겨운 사랑타령이, 줄거리 속에서 조심스럽게 그리고 보기 드물게 모습을 드러낸 비판적 역사의식을 본의 아니게 (혹은 의도적으로) 흐리는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치요코가 애정의 대상으로 선택한 자가 하필 사상경찰에 쫓기는 반정부 운동가이자 예술가였다는 점은, 작가가 치요코의 그런 선택을 통해 뭔가를 말하려고 한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치요코는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할 뿐 그의 이념과 사상에는 무관심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혔던 사상경찰에 대한 분노는 파쇼적인 체제에 대한 분노라기 보다는 자신의 사랑을 방해한 자에 대한 분노다. 즉 치요코의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한 인간에 대한 집착이었을 뿐 어떤 역사적, 사회적 맥락의 욕구로도 진화 내지 승화되지 못했으며, 영화 어디에서도 치요코의 정치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지극히 "개인적"이고 탈이념적인 치요코의 애정과 행보의 이면에서 또 다른 메시지가 읽히기도 한다. 개인이 철저히 국가와 체제와 집단에 부복해야만 했던 일제 군국주의 치하에서, 혹시 치요코가 단호히 자유로운 "개인"이기를 주장했던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녀가 처음 여배우의 길을 가게 된 계기도 일본정부가 만주에서 선전용 영화를 제작하는 사업에 동원되면서 였다. 그녀는 그런 기회를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할 뿐 국가를 위한 봉사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사명감도 없었고 심지어 영화제작 진행 중에도 일은 내팽게친 채 그를 찾아 무단 이탈을 감행한다. 즉 개인성의 선명한 표출인 애정의 자유로운 추구라는 의미에서 적어도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그녀의 행보가 지극히 자유주의적이고 따라서 반정부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즉 치요코의 우연적인 사랑은 실은 우연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봤을 때 당시로서는 다분히 의식적인 반체제적 저항 행위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설령 그런 메시지가 담겨있다손 치더라도 이는 주로 전전戰前 상황에 비추어 의미를 지닐 뿐 줄거리에서 시간상 상당 분량을 차지하는 패전 이후의 시기에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더이상 체제가 치요코의 자유를 제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를 크게 잃는다. 다만 패전하기 이전에 이미 경찰이 사랑하는 이를 살해함으로서 (치요코는 끝까지 이 사실을 모른 채 사망한다) 사랑할 자유가 주어져도 사랑할 수 없다라는, 군국주의 역사가 개인에게 씌우는 굴레는 남지만, 치요코가 이 굴레에 저항하는 방법은 오직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한 남자를 혼자 그리워하는 행위로 한정될 뿐이다. 만화영화 『천년여우』에서 싹트다 만 자성적 역사의식의 한계가 바로 거기에 놓여있다. 또한 그게 바로 내가 『천년여우』를 보는 내내 손 안닿는 데 난 뾰루지마냥 뭔가 걸리적거리던 느낌의 정체가 아니었을까 하며, 또한 어느 시점에서인가 "신비스런 열쇠"에 대한 기대와 흥미를 잃어버렸던 까닭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나서 TV를 끄고 나니까 그때부터 그 열쇠가 자꾸만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다. 작품에서 열쇠가 주는 존재의 울림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그 정체가 도대체 뭐였을까. 이런 거친 추측도 가능할지 모른다. 열쇠는 일본이 다가가야 할 이상향을 상징하며 그 반체제 운동가는 치요코(일본)에게 앞으로 추구해야할 가치를 제시한 것이라고. 이 열쇠는 곧 그가 벽화로 남긴 어리고 아름다운 치요코의 초상화로도 재차 형상화되는데 이 그림이 전쟁의 폐허 속에 오롯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치요코는 그 초상화와 열쇠를 고이 품고 그를, 또는 그가 제시하는 이상향을 찾아 나서지만 결국 방향을 잃고 좌초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녀는 열쇠를 두 번 잃어버린다. 한 번은 남한테 빼앗기고, 또 한 번은 스스로 놓아버린다. 열쇠를 훔쳐 숨긴 자와 결혼하는 것은 현실과 타협함이요, 열쇠를 떨구고 은퇴하는 것은 포기와 체념의 제스처일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다치바나에게서 열쇠를 받아들고 감회에 젖은 치요코는 죽기 직전 이렇게 고백한다. 그 사람의 자취를 뒤쫒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좋았다고. 그게 한낱 자기애에 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렇게 그의 뒤를 좇고 있던 그녀의 모습은 분명 아름다웠다. 다만 그 자성과 숙고와 깨달음이 떠받쳐주지 않은 열정은 결국 대상이 구체화되지 않을 때 방향을 상실하고 뜨거움과 향기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는 것은 자기연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요코가 죽음 직전에 선선히 다시 받아든 열쇠, 지난 날을 돌아보며 자기자신과 대면하는 용기, 그리고 죽음 후에도 이어질 진리를 향한 여정에 대한 암시는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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