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짧지만 생소한 역사이야기]해방전후의 한국사학
게시물ID : history_73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바가바드
추천 : 3
조회수 : 42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1/27 00:56:57

일본사학에 이어 한국사학입니다.

 

월래 우리나라는 그리고 세계적으로 특히 동양에서 역사란 함부로 접하지도 배우기 힘든 학문이였습니다.

소위 제왕학의 일종으로 왕위와 관계된자들 혹은 신분질서상위층만 접하는 학문이였습니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중요성은 지금과는 질적으로는 다르더라도 높은 편이였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이루어진 제국주의침략과 한일 병합은 역사학에도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작용합니다.

민족이 수난을 당하는 상황에서 연구는 민족정신과 국가의식을 고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즉 중국위주의 역사집중이 청일전쟁이후로 약해지고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한국사 중심 그것도 고대사에 집중됩니다.

신채호선생님이 고대사에 집중적으로 메달렸던 이유는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배를 받는 입장에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기르기위해선

우리나라가 화려했던 시절로 수렴해야하고 대개는 고대 그것도 고구려나 발해사쪽으로 진행되게됩니다.

따라서 그 당시 역사학자들도 정치적의도로 역사를 접했고 상당한 왜곡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고대사연구가 극과 극을 달리는 요인중하나입니다.

즉 민족사가들은 민족의식고향이라는 목표의식을 일제식민사가는 식민지배이용적 측면이라는 양측다 다분히 정치적이유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이중 민족사가들의 이론은 환단고기라는 소설로까지 확장되고 일제식민사가들은 식민사관으로 일본 우익과 한국뉴라이트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는

실정입니다. 물론 해방이후 여러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대사연구는 분명 정치적의도를 뺀 사실을 추구하려는 연구성과가 많이 발표됬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사가들은 크게 두부류입니다.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사학자와 일본과 유착된 사학자들입니다.

대개 후자의 경우는 일본유학파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일본사학에서 말씀드렸듯이 1870년 이후 일본을 지배한 실증주의는

일본유학파출신 사학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됩니다. 우리가 많이듣는 이병도선생 등이 그들입니다. 

한가지 말씀드릴건 일본유학파 혹은 일본과 유착된 사학자가 정치적 이유만으로 식민사학이라 불리는 연구를 진행한것은 아니란점입니다.

실증사학은 철저한 사료고증적 학파로 그 학풍에 따라 이루어진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들어 사료를 일본이 쥐고있는상황에서 사료의 선별은

일본위주로 진행되고 그 선별된 사료만을 고증할때에 나오는 해석상 오류도 있다는점도 있다는 것입니다.

 

해방직후는 민족사학자들이 주류를 형성하지만 그놈의 6.25를 기점으로 민족사학자들의 경우는 거의 월북(대개 강제로 끌려간경우가 많음)의 길로, 남한쪽에는 일본유학파 사학자들이 주류를 잡게됩니다.(이과정도 길게 서술될 수 있지만 생략)

가장 큰 병폐는 고대사에 관한 문제인데. 식민사학이니 모니하는 문제는 여기선 접어두시고 그외적인 문제를 보자면 일본유학파인 실증주의 사가들이 고대사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사료를 쥐고있는 형편이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발표나 연구성과가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지요. 문제는 이러한 사료의 독점과 그에따른 문제입니다.

 

우선 이들은 대개 사료에 출처, 얻은방법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 대개 어떤 어른으로부터 물려받았다식으로 얼버무립니다.

왜냐고요?

일제식민지기관과의 밀접한 협조를 통해 얻었던것을 해방이후 그대로 간직한것이기 때문에 출처를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친일행각을 밝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연구의 사료접근도 어려울뿐더러 사료의 출처또한 불분명한 상황에서 해방직후 연구성과는 사실 제대로 검증하기가 어렵게 됩니다.(물론 그 분들의 연구과정 노력까지 폄하하는것은 함부로 말 할 것이아닙니다. 말하고자하는건 그들의 사료독점적 경향입니다.)

 

이러한 연구와 사료독점경향은 후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당연이 한국사를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료를 독점한 이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실증사학적 학풍은 그대로 이어지는겁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실증사학적 학풍에서 사료의 존재유무에 따라 해석은 크게 달라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식민사학을 의도했냐 안했냐부분보다 사료에 그렇게 나온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는 문제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해방직후 사학자들을 단지 식민사학자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굉장히 과격한 문제란걸 알아야 합니다.

 

어찌됫던 소위말해 재야사학과 강단사학은 연구기법과 사료적부분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기때문에 괴리감이 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사를 전공(여기서 전공은 박사학위수준)하고자 한다면 일본유학이 필수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한국 사학이 1970년대까지 실증주의 사학으로 흘르는 이유이며 현재에 비해 그 당시 서술이 식민사학이라 불리던 이유의 하나입니다.

당연이 한국사 연구에 일본적 해석이 많이 적용될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소위 주류에 편입되지못하는 재야사학자의 경우 민족사학의 흐름을 이어받은 형편이기 때문에 강단사학의 연구에 대한 많은 비판과 함께

식민사학이라 지칭합니다. 추가로 강단사학속에도 민족사학의 흐름을 이어 받은 분들이 남아있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주류적이지 못했다는 점

물론 진짜 식민사학도 존재하지만 모든 연구결과가 식민사학과 유사하다고 식민사학이라고 말하는건 문제가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실증주의적 사고는 그 자체의 오류도 존재하며 그 자체의 신뢰도도 존재합니다. 단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입맛에 않맞기 때문에

식민사학이라 지칭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예를 들어 고조선의 영역 문제를 보면 해방이후 남한은 이병도의 평양중심설이 주축 북한은 민족사학기류가강해 요동중심설이 였습니다.

여기서 이병도말기에 남한은 요동중심설로 북한은 평양단군릉 발견을 기점으로 평양중심설로 옮겨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평양중심설을 외치면 식민사학이라느니 하고 말하는데에는 이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학계의 인식은 중심이동설 요동에서 평양으로)

또 한사군문제가 나오면 허구라느니모니 하지만 엄연한 사실은 한반도내 한사군 지역에서 출토되는 그시기 중국유물의 존재와 문헌사료적

기술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한사군의 범위문제는 논의가 분분하더라도 한사군의 존재자체는 현재 사료상 사실적입니다.

고대사에서 민족주의적 경향과 맞지않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식민사학탓이라느니 실증주의사학이 마치 잘못된 사학이라느니 하는 것은

과격한 행동입니다.

 

요약하자면 식민사학의 문제점은 분명 사실입니다.   다만 일본사학의 해석이 전적으로 모두 오류가 아니라는점 식민사학이라 칭해지는 오류속에는 우리자신의 과잉민족주의적 해석이 존재한다는점 실증학파=식민사학자 라고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 우리나라 사학이 일본사학과 긴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