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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ente님께 다시 반론드립니다.
게시물ID : sisa_3579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1
조회수 : 238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3/02/06 23:58:40

1. 직접적으로 사민당의 배신이라는 단어까지 썼으면서 변절자라고 하지 않는 다는 말이 참 아이러니 하군요. 

제도권 정치에 종속된다고 해서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버리는건 아닙니다.개혁입법을 꾸준히 하는 그들이 제도권정치에 종속된다는것은 그들이 노동자들의 현안에 대해서 귀를 닫고 부루조아정당으로 된다는 말인가요? 전혀 아닙니다. 사회주의좌파들은 유토피아를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나가는 것이며 사회주의우파들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수천 수만번 반복되면서 변하는 언젠가 모를 그 지점이 유토피아라고 하는 겁니다. 그들은 제도권 정치를 이용하는것이지 현실에 안주하는게 아닙니다. 베른슈타인이 비판받는것은 사회주의좌파와는 다르게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제시하지 못하고 방법론도 모호했기 때문이지 그가 부루조아적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사회주의자들이 있다면 마르크스를 버린 죄에 대한것이겠죠. 마르크스를 버렸다고 사회주의를 버린건 아닙니다. 


-> 제국주의 전쟁에 찬동한 것을 배신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요. 제도권 정치에 종속됨으로써 나타난 현상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의 줄기찬 비판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베른슈타인이 비판받는 것이 유토피아를 제시하지 못해서 비판받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결코 아닙니다. 그의 실천편향을 "기회주의"라며 비판한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 투쟁 시기에 사회주의자들이 사민주의자들을 변절자라고 부릅니까? 그들 역시 정치적 동지입니다. 대체 왜 그렇게 기계적으로 사고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2. 공산당이 다수당이 되고 나서 의회를 공산주의 혁명의 수단으로 쓴다면 이는 사민주의입니까? 아니겠죠? 그럼 이는 볼세비키즘과도 다른거고 사민주의와도 다른거고 애초에 마르스크가 생각했던 방법이겠지만 자본주의의 대처능력 향상으로 인해 자본주의의 명이 길어지고 노동자들의 현실요구가 커지면서 사회주의정당이 다수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일어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현실정책에 신경쓰게 되면서부터 그들은 필연적으로 사민주의자가 된겁니다. 대부분의 유럽사회주의 정당이 사민주의정당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며 러시아는 유럽의 현실과는 다르기 때문에 볼세비키즘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들은 공황을 격지 않았고 노동자들도 매우 적었으며 노동자들의 현실요구도 많이 않았을뿐만 아니라 이제 막 봉건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후진국이였기 때문에 가능한거였습니다. 이는 매우 아이러니 한 상황이며 따라서 사민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필연인것이고 볼세비키즘이 변종인것입니다. 


-> 이제서야 당신 주장의 요체를 알았네요. 사민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필연이라? 그럼 다시 되묻죠. 혁명에 대해 당신이 생각하는 "사민주의"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혁명이라는 전복적 과정 없이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능할 것이라 보십니까? 이제까지의 역사적 경험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맑스 역시도 혁명론자였습니다.


3.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말이 자본주의를 넘어서자는 말이라면 자본주의에 대한 대체적 경제학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이런 구체적인 강령이 존재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복지정책과 노동자중심정책으로 자본주의가 극복될까요? 이는 민주당에서도 주장하는 겁니다. 단지 자본주의는 나쁘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악마의 시스템이다라는 말을 한다면 사민주의정당에 걸 맞게 그 구체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죠 이게 현재 사민주의정당의 의회중심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그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친다면 제2인터내셔널의 에르푸르트 강령과 다를게 없습니다. 100년이 넘게 지나도 발전이 없다면 이게 자본주의타도라는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도 왕년에는 열혈 마르크스주의였는데 그저 복지나 늘리는 현실정치를 하는게 존심 상해서 추가한 강령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안드네요. 


-> 사민주의자들이 수정자본주의를 바탕으로 복지 시스템을 그래서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일상적 투쟁시기에 주장되는 복지 요구는 이런 맥락인 것입니다. 다만, 사민주의자들에게 복지는, 수정자본주의가 주장하는 복지와는 성격이 다르죠. 이런 복지 요구는 굉장히 낮은 단계의 요구인 것이고, 보다 대승적 차원의 요구,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대전제는 남겨두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에르푸르트 강령의 모순은 이 지점에 있죠. 사회주의라는 대의를 명시하긴 하되, 일상적 투쟁, 낮은 단계의 요구들이 어떻게 대의적 명분을 가지고 의의를 지니는가, 이런 둘 사이의 긴장관계를 명확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겁니다. 현재 벌어지는 사민주의 논쟁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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