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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현장 21 일베 편을 보고 약간의 참고 글?
게시물ID : sisa_3712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4/2
조회수 : 78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3/13 01:00:51


파시즘에 관한 텍스트입니다..ㅎ 일국 사회주의와 더불어 인민전선이라는 전술을 통한 반파시즘 전선에 대해서도 이야기도 하고 있고, 파시즘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 대충 알아보실 수 있을겝니다. 읽어보시길~


http://left21.com/article/8927


인민전선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다 ①인민전선의 역사는 계급 협력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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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트21> 45호 | 발행 2010-11-27 | 입력 2010-11-25

인민전선 정책은 1935년 7∼8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7차 대회에서 처음 채택됐다.

그 직전까지 스탈린의 코민테른1은 ‘사회파시즘’론을 채택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쌍둥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둘의 계급적 토대가 다르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의 계급적 토대가 노동계급 조직이라면 파시즘은 중간계급, 미조직 노동계급 부문, 룸펜이 그 기반이었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은 칼의 양날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상호배타적 버팀목들이었다.

‘사회파시즘’론은 독일에서 재앙을 낳았다. 독일공산당과 독일사회민주당은 변변한 투쟁 한번 못해 보고 1933년에 히틀러에게 권력을 내 줬다.  

1971년 9월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저항하는 칠레 대통령 아옌데 칠레 인민전선은 비극적 결말로 끝났다.

이 점에서 인민전선은 ‘사회파시즘’론이라는 백치병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모험주의적 좌익주의가 우익 중도주의 유형의 노골적 기회주의”로 변신한 것이었다. “뜨거운 우유에 덴 고양이는 찬물도 피하는 법이다.”

인민전선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함께하면 파시즘의 악몽을 끝낼 수 있다는 정책이다. 실천에서 이것은 노동계급과 자유주의 자본가의 체계적인 계급 협력을 뜻했다.

과거에 사회민주당들의 민족주의적ㆍ계급협력주의적 정책에 반대해 그들과 결별했던 코민테른이 이제 사회민주주의 세력보다 더 노골적인 계급 협력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것은 코민테른의 기본 테제를 근본에서 부정한 것이었다. 레닌 등이 작성한 코민테른 가입 조건(‘21개 조항’)에는 공산당과 자본가 정당의 연합 반대가 포함돼 있었다.

일국 사회주의

인민전선은 1935년에 채택됐지만, 그 기원은 1924년에 발표된 일국 사회주의론이었다.

일국 사회주의는 혁명 방위의 성패를 국제 계급투쟁이 아니라 소련 한 나라의 힘에 건다는 뜻이었다. 한 나라 안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면 국제 혁명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덤 같은 것이 된다.

일국 사회주의론은 각국 공산당이 민족주의로 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그 결과 “각국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노선에 따른 코민테른 붕괴의 시발점”(트로츠키)이 됐다.

이 정책에 따라 각국 공산당들은 소련의 ‘국경수비대’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련에 군사적 개입을 못 하도록 막는 방패 구실이 공산당의 주요 임무가 됐다.

그러자면 공산당들이 잠재적 친구들과 사이가 나빠지는 일이 없도록 혁명 활동의 수위를 낮추고 자국 자본가들에게 개혁주의적 압력이나 행사해야 했다. 이 정책은 중국 혁명 등에 치명타를 가했다. 1920년대 중엽 중국공산당은 이른바 ‘진보적’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에 굴종했고, 1925∼27년 중국 혁명은 분쇄됐다.

인민전선도 소련의 대외 목표와 관계 있었다. 히틀러에 반대해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을 가능성이 있는 다른 나라 정부들에 압력을 넣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히틀러의 군비 증강 시도가 겨눈 목표물 중 하나가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영국ㆍ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맺고자 안달했다. 마침내 1935년에 스탈린은 프랑스의 중도 우파 라발 정부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스탈린은 이 관계를 공고히 하려면 공산당이 ‘자유주의적’ 자본가 정부를 지원해야 한다고 봤다. 그것만이 파시즘의 진격을 막을 유일한 ‘현실적’ 방도라고 봤다(그 핵심 논지는 40년 전에 베른슈타인 등이 설파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물론 레닌 시대의 소비에트 정부도 자본가 정부들과 조약들을 맺었다 —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1920년 에스토니아와의 조약, 1920년 10월 폴란드와 체결한 리가 조약, 1922년 독일과 체결한 라팔로 조약 등.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 지도자들 중 누구도 이 자본가 정부들을 “평화의 친구들”이라고 선전하지 않았다. 또, 독일ㆍ폴란드ㆍ에스토니아 공산당들에게 이 조약들을 조인한 자본가 정부들을 선거에서 지지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대중을 혁명적 의식으로 각성시키는 데 이용했다.

그러나 인민전선 시기 스탈린의 코민테른은 정확히 그 반대의 주장과 실천을 했다.

“현재 국면에서 많은 자본가 국가들도 평화 유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에 맞서 노동자 계급과 모든 근로 민중 그리고 모든 국가들을 아우르는 광범한 전선을 창출할 가능성이 존재한다.”(1936년 5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이 ‘전선’은 제국주의의 현 상태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자본가 정당들과 동맹을 맺으려고, 세계 체제를 강타한 공황에 대한 혁명적 대안들을 모두 포기했다. 혁명적 변화에 관한 논의를 먼 훗날로 미루고 자본주의 수호 임무를 지닌 정부들을 “관용”으로 대했다. 이 관용은 노동자 운동을 억누르는 것을 뜻했다.

(반半)식민지 나라들에서는 반제국주의 투쟁을 위해 노동계급을 이른바 ‘진보적 민족 부르주아지’에 예속시켰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과 민족해방운동을 지구상 최대 식민제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종속시켰다(7차 대회는 6차대회에서 두드러졌던 반제국주의 미사여구들을 조심스럽게 거둬들였다).

스탈린은 1943년에 동맹국들에 보내는 우호의 표시로 코민테른을 해체했다.

산수와 역학

△트로츠키

트로츠키는 인민전선이 고전적 멘셰비즘의 확장이라고 봤다. 그가 보기에, 1917년 2월 혁명이 인민전선의 역사적 사례였다.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자본가 정당인 카데츠와 연립정부를 구성해 긴밀하고 항구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볼셰비키는 인민전선에 조금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는 좌파 정당들이 카데츠와 맺은 동맹을 파기하고 진정한 노동자 정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러시아의 인민전선을 제압했던 10월 혁명의 이름으로 각국의 인민전선들을 지원했다. 

인민전선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정확히 산수의 법칙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말했다.

“단결한 노동자 세력(‘통일전선’)이 민주주의자들 및 자유주의자들과의 보다 넓은 선거적, 정치적 연합(‘인민전선’)의 토대가 될 것이었다. 

“독일의 세가 계속 확대됨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연합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연합체, 즉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신념과는 상관없이 파시즘(또는 추축국들)을 첫째 위험으로 간주하는 모든 세력의 ‘국민전선’으로 단결의 범위를 확대할 것을 고려했다.”

노동자들의 단결에다 자유주의 자본가와의 단결까지 더해졌기 때문에 인민전선은 공동전선의 진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정치의 영역에서는 “산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적어도 역학 하나는 더 필요하다. 

“힘의 평행사변형의 법칙은 정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평행사변형에서 합력(合力)은 분력(分力)이 서로 다를수록 더 작아진다. 정치적 동맹자들이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면, 합력은 0과 같아질지도 모른다.”

인민전선은 이해관계가 180도 다른 적대 계급 간의 동맹이다. 그래서 동맹의 성립은 노동계급의 양보를 전제로 한다. 

그래 갖고는 중간계급을 획득하지 못한다. 노동계급의 단호한 지도력 제공만이 중간계급을 획득할 유일한 방법이다. 

노동계급의 힘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하던 초기 코민테른은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제안한 공동전선은 (1) 노동계급 정당들의 협력을 뜻했다. 반대로 인민전선은 자본가 정당들을 포함시키는 계급 협력 전략이었다. (2) 공동전선은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려는 투쟁에 필요한 실천적 협정이었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공통의 선거 강령과 자본가 정부 지지를 포함했다. (3) 공동전선에서는 완전한 이데올로기적 독립성과 비판의 자유가 보장되지만, 인민전선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4) 공동전선은 혁명정당 활동의 한 부분이어서 다른 독립적 활동을 계속 수행할 수 있지만, 인민전선은 코민테른의 전체 전략이었다.

계급 연합 기구로서 인민전선은 파시즘을 저지하는 효과적 무기가 못 됐다.

예컨대, 1934년 프랑스에서 히틀러의 집권에 고무받은 파시스트들이 의회를 공격했다. 중도 좌파 정권이 몰락하고 강경 우파 정권이 들어섰다. 이때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이 극우파를 수세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1936년에 주류 친자본가 정당인 급진당과 단결하려는 시도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관용’ 정책과 똑같은 결과를 낳았다. 짧은 소강기를 거쳐 우파가 다시 주도권을 쥐었다.

물론, 노동 대중에게 인민전선이 ‘제3기’(사회파시즘) 백치병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히틀러의 승리는 정치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단결해야 한다는 열망을 고무했다.

코민테른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과 트로츠키가

주도해 1919년에 창립됐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하던 시절 코민테른(1∼4차 대회)은 혁명적 전통의 보고였지만, 1924년 이후 스탈린이 지도한 코민테른은 스탈린 정권의 외교 수단으로 전락했다. 7차 대회가 마지막 대회였다.

본문으로

이런 단결 염원 정서 덕분에 인민전선의 첫 번째 국면에서 공산당들은 큰 이득을 봤다. 프랑스공산당의 당원 수는 1934년 3만 명, 1936년 2월 9만 명, 1936년 12월 28만 8천 명으로 증가했다. 스페인공산당의 당원 수도 1934년에 1천 명을 밑돌았으나 1936년 2월 3만 5천 명, 1937년 7월 11만 7천 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공산당들은 처음으로 중간계급 당원과 동조자를 대거 획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8년에 인민전선의 실적에 대한 환상이 깨지자 상황이 반전했다. 공산당들의 당원과 지지자가 감소했다.

최종적으로 인민전선은 파시즘을 저지하지 못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에 권력을 내 주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미국에서는 공산당이 민주당의 루스벨트를 지지해 최종 독립적인 정당 건설 전망을 포기하면서 우울한 결말을 맞이했다.

인민전선의 운명은 그래서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였던 생 쥐스트의 예언, 곧 “혁명을 절반만 성공시키는 사람은 자기 무덤을 파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가 됐다.



+ 파시즘에 대한 개략적 정의에 관한 글

http://left21.com/article/3422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최일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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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불> 13호 | 발행 2006-09-23 | 입력 2006-09-18

조지 부시와 럼스펠드는 이슬람이 '파시즘'이라고 주장한다. 무슬림 전부를 파시스트로 싸잡아 매도한다는 점말고도 이런 주장은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 오늘날 프랑스의 장-마리 르펜, 인도의 쉬브 셰나 등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파시스트들은 단순한 극우가 아니다. 단지 혐오스런 인종차별주의자인 것만도 아니다. 단순히 소수자와 좌파에 대한 혹심한 억압과 강경한 탄압을 자행하는 권위주의자들인 것만도 아니다.

파시스트들은 민주주의를 ― 자유민주주의조차 ― 파괴하고,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노동계급 조직을 분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들은 선거를 폐지하고 싶어하고, 사회 대다수가 누려 온 자유를 전면 공격한다. 그래서 사회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활동한다. 히틀러는 아우슈비츠라는 홀러코스트 공장을 지어 유대인 6백만 명을 도살했다.

파시즘은 중간계급 대중에 기반을 둔 독특한 정치 운동이었다. 물론 소수 대자본가 개인들이 파시스트 정당을 지지해 자금을 제공하곤 했다. 또, 파시스트 운동이 노동계급의 비조직 또는 주변적 인자들을 일부 포섭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직 노동계급 운동의 상당 부분을 포섭한 적은 없다.

파시즘의 주요 지지 기반은 언제나 중간계급이었다. 중간계급은 매우 모순된 계급 지위와 사상이 그 특징이다. 그들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동요하며 심각한 위기 때 양쪽 모두를 비난하며 오락가락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효과들 때문에 삶이 어그러지지만 그에 맞서 싸울 조직은 없는 각종 자영업자들(소기업주, 농부, 소상점 주인 등)과 조직되지 않은 관리직ㆍ전문직 종사자들(노조원 아닌 공무원, 다수 변호사와 의사 등)은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집단적 힘도, 대기업주들의 경제력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들의 인생은 심각한 경제 위기와 대량 실업으로 망가질 수 있다. 그러면 이들은 대자본가를 원망하지만, 또한 노동자들도 원망한다. 특히 노동조합과 좌파를 증오한다.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에 더욱 끌린다. 이 때 파시스트들이 이들의 절망을 표현하는 기치를 제공하고 이들의 분노를 돌릴 속죄양을 제시한다면 대중적 세력을 규합할 수 있다.

파시즘 운동은 중간계급의 이러한 매우 모순된 처지와 사상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래서 모든 권위주의 정권이 파시즘인 것은 아니다. 박정희 정권도 파시즘은 아니다. 임지현 교수는 박정희의 ‘대중독재’론을 주창하고 있지만, 박정희는 중간계급 대중 운동을 구축하지 않았다.(새마을운동은 국가가 통제한 관치 캠페인으로, 포퓰리즘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박정희는 데마고기로 재벌에 대한 반감을 조장하지 않았고, 오히려 재벌을 옹호했다. 좌파적 미사여구는커녕 일본 메이지 유신 식의 이데올로기로 통치했다. 나치당의 정식 명칭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이고, 아우슈비츠 정문에 걸린 표어가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인 것과 비교해 보라.

박정희는 또, 비록 어용이지만 한국노총이라는 노동조합 기구도 존속시켜야 했고, 국회의원 선거도 허용해야 했다.

아우슈비츠

파시스트들이 중간계급 불행의 책임을 전가하는 대상이 꼭 유대인일 필요는 없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독일 파시즘(나치)과 달리 유대인을 속죄양 삼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파시스트들은 대부분(가령 인도에서도) 오히려 무슬림을 증오한다.

그러나 모든 인종차별적 정당이 파시스트인 건 아니다. 미국 공화당은 유색인종과 무슬림을 천대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지만, 파시스트는 아니다. 공화당은 중간계급이 아니라 대자본가들에 기반을 두고 있고, 또 대중 운동도 아니다.

또한, 모든 민족주의 정치세력이 파시스트인 것도 아니다. 2005년 봄 다양한 아나키스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비난한 민주노동당 내 좌파 민족주의자들을 파시스트로 매도했는데, 노동계급 정당 또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이거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염원하는 좌파 지식인들이 나치와 비슷한 성격의 세력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이 파시즘이라는 생각도 터무니없다. 이슬람주의(정치적 급진주의 이슬람)에 한정해 살펴보더라도 헤즈볼라나 하마스 등을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빗대는 건 아무래도 우습다. (더 자세한 논의는 아닌디야 바타차리야의 글을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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