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좌파가 들려주는 러시아 혁명사 #1
게시물ID : sisa_3745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5
조회수 : 283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3/03/27 00:40:22

1.     혁명의 전조

 

1905, 살을 에는 추위 속에 한 무리의 노동자가 짜르(황제)의 초상화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향하는 곳은 짜르가 있는 궁이었다.

 

시위가 너무나도 평화적이었기에, 주변의 경찰들은 그들에 대해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구호가 너무나도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 무리는 한결 같이 외쳤다.

 

위대하신 짜르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빵 한 조각을 허락해주시옵소서.”

 

그들이 페트로그라드의 짜르궁에 도달했을 즈음, 이미 궁 앞에 군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짜르의 군대가 설마 굶주린 인민을 쏘기야 하겠는가.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이었음은 곧바로 드러났다. 짜르의 군대는 굶주린 인민을 향해 총탄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수 백 명이 죽었고, 나머지는 도망갔다. 짜르의 초상화를 들었던 순진한 인민은 짜르의 군대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바야흐로, 혁명을 알리는 새벽종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난한 러시아는 더 이상 인민을 먹여살릴 힘이 없었다. 짜르만은 예외였다. 호사스러운 짜르와 그 주변의 귀족의 생활은 확실히 굶주린 민중과 대비되었다. 짜르는 더 이상 민중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민중의 적이었다. 민중은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페트로그라드 학살이 벌어진지 이튿날,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파업이 시작되었다. 파업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고,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몇몇 공장 위원회는 노동자들을 무장시키기도 했다. 사태에 문제의식을 느낀 몇몇 군대 위원회 역시 파업의 물결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농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장위원회의 무장한 노동자들은 경찰과 충돌했고, 일부 지역에선 총격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군대는 내분을 일으켰고, 장교는 권한을 상실했다. 수많은 공장이 노동자들의 통제 속으로 들어갔다. 러시아 전역으로 번진 투쟁의 물결은 더 이상 짜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혁명은 아주 작은 성과를 내었다. 짜르의 전제 군주 시스템에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제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의회가 설립되었고, 정당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정당이었던 카데츠(입헌민주당), 사회민주주의 노동당, 사회혁명당 등의 정파가 형성되고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혼란의 도가니에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은 두 분파로 나뉘었다. 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볼셰비키, 그리고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멘셰비키가 모이게 된 것이다. 혁명의 요구는 다양했다. 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진을 주장했고,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한 멘셰비키는 당면한 러시아의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기 때문에 강령을 낮추어야 한다고 맞섰다.

 

1905, 불리긴 수상은 타협책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그는 새로운 의회의 신설을 공표했다. 그러나, 이 의회는 굉장히 왜곡되고 극히 제한된 형태의 기구로서 대의기구의 역할을 수행한다기보다는 짜르의 자문기구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1906, 혁명은 점차 패색을 띄어갔다. 파업도 점점 잠잠해져갔고, 노동자들의 저항은 그 불씨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1907 3, 2대 두마(의회)는 돌연 해산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실시된 선거에서 제 3대 두마는 전제 군주정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던 극우 10월당이 지배하였다. 1905년의 혁명이 사실상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곧 닥쳐올 제국주의의 위협이 러시아를 또다시 혁명의 불길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는 것을!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