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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충이? 너무 호들갑 떨지 말고 이성적으로 봅시다~~
게시물ID : sisa_3778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11
조회수 : 646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3/04/08 00:22:12


요 근래 베충이들의 성격이나 속성 등을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꽤 많이 보이는데, 예전에 올라왔던 베충이 분석 글들 좀 모아봤음..ㅋ


1편 - 레비나스님


http://todayhumor.com/?sisa_343921


이런 부류들은 한국 근 현대사가 좌파 용공 세력에 의해서 왜곡 되었다고 개 오바질을 한다. 소위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역사 교과서 어쩌구 저쩌구 거리는 인간들 말이다. 이 부류들은 과거에 교과서가 좌편향 되었다며 비난하길 좋아한다.

 

난 이런 부류들이 베충이들과 결론적으로 같은 모순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들은 좌편향을 전체주의로 깔아놓고, 그에 반하는 팩트나 객관적 지식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즉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자유주의란 탈을 쓰고, 그런 구도하에 독재를 찬양하고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을 무슨 저항이라 되는 거처럼 정신승리질을 한다는 것이다.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의 어떤 성향이, 독재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극우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게끔 반동적 결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베충이들이나 뉴 라이트들은 87년 독재 종언 후 상식처럼 되어버린 민주주의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고, 그때부터 쌓아 온 민주주의 상식이라는 카르텔에 자신들 스스로 저항하고 있는 거처럼 세팅하고 있다. 독재는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나쁜 것이라는 상식에 도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작자들 눈엔 87년 후 사회는 좌파 용공 세력에 의해 지배당한 사회였을 것이다. 이미 민주주의가 지배 담론이 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불온한 극우 성향은 살 길이 없고, 고로 이 작자들은 그런 상태에서 논리적 전회를 한 것이 자신들을 저항군처럼 이쁘게 포장하고 자유주의 쁘띠로 색칠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즉 오늘날 뉴 라이트나 베충이들은 다른 포지션에서 독재를 미화하고 역사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작자들은 논리적 모순을 보일 수 밖에 없는데, 예를들면 역사 교과서의 근 현대사를 지나치에 정치화 시켜 보았다는 비판점이 그렇다. 일견 탈 정치적 혹은 실증주의적 비판처럼 보이지만(객관적인 역사 보다는 정치화 된 역사), 실제로 이들이 미화시키고 있는 박정희나 이승만은 한국의 헌법적 정의에 맞지 않는 인물들이고, 이들을 긍정적으로 치환했을때의 그 교과서가 탈 정치적이거나 혹은 객관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극우화 된 역사일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들이 오늘날의 교과서를 좌경화라고 깐 그 논점, 즉실증주의적인 거처럼 보이는 그 논점이 애초부터 왜곡된 시선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꼴이 되는 것이다. 본인들이 하는 짓을 실증주의적 비판이라고 포장하고 색칠한 것이 화장을 벗겨보면 극우적 역사론을 설파하는 무뢰배였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뉴 라이트와 베충이들이 겪는 논리적 모순의 실체다!!!!

 

즉 역사적 사실을 정치적 시선에거나 당위론으로 재단하면 안 된다는 실증주의적 비판을 가지고 좌경화 된 역사 교과서를 깠지만, 실제론 본인들이 그 짓을 교과서에 강요하고 있다는 외상적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이트를 장악하고 있는 뻑킹 일베蟲들을 보라. 아마 이 글을 보는 일베蟲들은 내 글에 아무런 감흥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안보니 뭐니 자신들이 정의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위해서 정치적 조작, 댓글 테러, 게시판 망치기를 기쁘게하고, 텍스트를 조작하거나 제 3의 입장에서 봤을때 과도한 비난조 글들을 반복해서 글을 올려도 그들은 기쁘게 할 것이다. 그런 행위들이 자신들이 비판하던 촛불보다 더 과격하고 더 전체주의적이고 더 일방적으로 심지어 더 폭력적이라도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근래에 일베蟲들이 하는 일련의 짓들은 본인들이 비난하던 촛불과 하등 다를 게 없다(아니 더 과격하고 우격다짐에 역겹기까지 하다...). 단 다른 게 있다면 내용일 뿐이다.

 

근데 왜 이런 것들이 스스로 일깨워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간단한다. 자신들이 저항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항이라는 그 당위성이 심지어 자신들이 비판하던 그 치들보다 더 과격한 짓들을 서슴없이 해도 기쁘게 할 수 있는 원인이 된다. 일말의 양심적 가책도 없을 것이고, 심지어 잘못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지고, 오히려 더 그러지 못함을 아쉬하는 오늘날의 베충이들은, 정확히 20세기의 파시즘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자신들이 모순에 사로 잡혔다는 것을 모를만큼 두뇌 용량이 딸리거나. 혹은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기차에 올라타 버렸거나.



2편 - 본인(무명논객)


http://todayhumor.com/?humorbest_602802


# 한국 사회가 좌경화 되었다?


염병. 좌파들이 해줄 말은 요거다. "지랄하고 있네." 그들이 한국 사회의 "좌경화"라는 것의 전제로 두고 있는 것은, 좌경화에 대한 도덕 판단을 그 기본으로 두고 있다. 그러니까 "좌경화되었다"라고 말하는 그들의 어법 속에는 이미 '좌파는 나쁜 것'이라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사고가 숨어있는 것. 왜 이런 호구같은 사고방식에 절게 되었나 하니, 이 새퀴들 대가리 속엔 자유주의의 탈을 쓰고 교묘하게 편집된 반공 의식이 근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한 - 북한의 냉전 구도를 선-악 구도로 치환시키고 그 안에 저항 - 침략 이라는 포장을 씌워서 마치 '좌경화'라는 것은 북쪽과 연계된 것 같은 환상을 심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저새키들 아가리에서 튀어나오는 단어는 조금만 진보적 성향을 보여도 북괴니, 좀비니, 빨갱이니 하는 이상스런 단어가 마구 나오는 것이다.


아싸리 그럼 한국 사회가 진짜 좌경화되었는지 봅시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랜만에 시사게 들어와서 본 글이 '민주당은 좌파다!'라는 글이었다. 과연 민주당이 좌파일까? 그들이 좌파로 불릴 자격이 있을까?


민주당을 보려면 노무현을 보면 된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민주당은 '정권 교체'라는 타이틀을 걸 수 있었으니까. 실제로, '정권 교체'를 외치는 대다수의 '깨시민'들이 지지한 사람은 노무현의 아지랑이를 품고 나온 문재인이 아니었나? 그럼 따져보자. 노무현이 좌파였나? 


좌파들이 평가하는 노무현은 그냥 "신자유주의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 가지만 보자. 노무현 때 노조에 청구한 손배가압류가 대체 얼마나 많았는지 아는가? 놀라지 마시라. 전두환 때보다도 훨씬 많았다. 독재시절 노조에 가해진 탄압이 물리적 탄압이라면, 이제는 노조에 가해지는 탄압은 신자유주의적 프로젝트에 탄력을 받아 더 가혹한 방식으로 변했다. 고 최강서 동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도, 이 손배가압류로 인한 노조원들의 생활고가 한 몫한 것이다. 목숨줄 틀어쥔 게 자본가 색키들인데, 이 색키들은 이제 경찰력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거대해진 자본으로 노동자들 목숨줄을 가지고 노는 거다. 18 아주 엿같은 상황이다.


아주 오랜 기간 좌파들은 이런 신자유주의를 줄기차게 비판했다. 하지 말라고. FTA 반대 투쟁은 이런 맥락이다. FTA가 신자유주의의 끝판왕이니까. 그런데 노무현은 이걸 밀어부쳤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진행되있던 걸 돌려놓을 수 없었던 것. 그게 신자유주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에게 좌파라는 타이틀을 걸어줄 여지가 있을까? 


없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뭘 바래? 노무현이 대체 무슨 복지를 했는가? 내가 기억하기로, 부동산 거품 조낸 만들어놔서 투기꾼 양산해놓고 제대로 된 복지는커녕 양극화만 심해진 걸로 기억한다. 대체 노무현이 이런 걸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내놓았는가? 부분적으로 조정책은 있었을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대타협'은 노무현에게서 허락되진 않았다.ㅎ 괜히 삼성공화국이란 말이 탄생했나?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노무현을 위시한 민주당 계열은 좌파가 될 수 없다. 좌파가 규정하는 민주당은 부르주아 정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ㅎ 좌파들이 이야기하는 대안정당은 최소 노동자 정당이다. 그래서 국민승리21이 탄생하고, 민주노동당이 최초로 창당되자 좌파들은 거기로 몰려갔다. 민노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탄력을 받아 탄생한 것이니까 최소한 '노동자 대중정당'의 타이틀은 걸 수 있었다. 최소한 베충이 색키들이 한국 사회에 좌경화 딱지를 붙이려거든 민노당이 국회 의석을 절반 쯤, 아니 3분의 1 이상은 차지해야 하지 않았겠나? 


그런데 베충이와 뉴라이트 이 색키들은 노무현에게 굳이 좌파 딱지를 붙인다. 아이고오~ 그걸 듣는 좌파는 속 터진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노무현 정부 내내 노무현과 투쟁했던 좌파들은 다 어디로 가고? 베충이류 사고 속에서 좌파는 그저 딱지 붙이기 일환일 뿐이다. 왜? 좌파라는 말 그 자체는 이미 '악'을 함유하고 있는 덩어리일 뿐이니까..ㅎ 좀비라느니, 좌경화되었다느니 하는 그들의 어법에 나타나는 '좌'의 의미는 그냥 '악'일 뿐이다. 악에 대해서 무슨 사유가 필요한가? 악은 그냥 배척하고 척결해야 할 대상이다.


다시 한번 되짚어보자. 베충이류 사고는 기본적으로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의 보편적 인식을 부정하는 어법을 취한다.ㅎ 그러니까, 과거 수구냉전적 카르텔을 들이밀고 그 위에 소위 자신들이 말하는 '팩트'를 얹어놓는 거다.[물론 그 팩트도 엄연히 구조화된 것이지만..] 그리고 거기에 '자유주의'라는 데코를 해놓고, 스스로에게 '애국보수'라는 타이틀을 걺으로써 "좌경화된 저 악마의 무리"들과 싸우는 "숭고한 존재"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오류는 뭐냐면, 자신들에게 저항적 리비도를 투사하면서 스스로를 소수화한다는 점. 그리고 자신들이 '적대적'으로 규정하는 반대편을 크게 부풀린다는 것. 실상은, 심각한 경제 위기로 인해 양극화가 첨예해짐에 따라 정치적 양극화가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 북한의 존재와 더불어 그로 인한 '빨갱이 사냥'의 재현 등 실질적 헤게모니의 축은 오른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 세력 관계를 왜곡한다는 것..ㅎ 제발 그 좌경화가 되었으면 좋겠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체 대중적으로 활동하는, 인지도 있고 세력도 있는 좌파 조직이 몇이나 된다고?


그들이 공격하는 좌파는 정작 실체가 없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저 "개혁을 원하는 대중"을 두고 좌파라고 비난하는 것 뿐.ㅎ 왜? 그들에게 좌파는 '악'이니까. 에라이 18 놈들. 정작 좌파들은 조~기 숨어서 희희낙락하는데...


제발 좌경화의 시대여 오라! 제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3편 - 놀놀이님


뉴라이트와 베충이 껍질 홀딱 벗기기 시리즈 #3

(내용은 제목과는 다를 수가 있다. 그것은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시도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들의 실제 모습을 드러난다고 해도 - 그들을 나와 선명하게 구별할 수 없다는 점을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 대한 비난을 넘어 나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의 위선 그 자체일 뿐이라는 사실도 알기 때문이다.)

1.
'어떤 현실이든 지식의 오독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 그것이 지속적인 질서를 가정하는 한에서 - 질서는 그 위기를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어갈 뿐이다. 그래서 외부는 없다. 
그것은 현실의 한계- 나아가 그 현실이 지식이 관여하고 관계하는 규명된 것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 사이의 불확실성이 증대하면 증대할수록 그리고, 그것이 이미 규명된 것들조차 믿을 수 없는 하나의 가정적인 견해로 한정되는 상황이 반복되어 갈수록 - 지식 오독의 범위는 차츰 커져갈 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현실'은 일정 지식을 통해 규명된 것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이 개입되고 관계하는 것들이며,- 나아가 양자 간의 관계 속에 주관적 기호, 정념과 소망이 투사되고 그 공백을 일시적으로 매꾸게 되는 믿음과 선험적인 것의 권위 자체의 문제일 뿐이다. 
-  그 사이에 관계를 규정하고 위계를 서술하게 하는 권력-이데올로기적인 효과와 맞닥드리는 주관적 경험의 산물이 개개의 현실과 불합리의 총체적 인식이며, 이런 종합적 판단 속에서 현실은 존재한다.) 

- 현실은 다양한 차원에서부터 종합적으로 판단된다. 
하나는 사실의 층위(우리가 언급하는 법칙,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인 명제들, 그것은 과학적으로 규명된 것들, 대중의 광범위한 합의를 통해 일정 하나의 믿음으로 굳어진 역사적으로 계승된 판단들, 그 전통들, 지역적 기질을 바탕으로 단일한 공통체에 계승되는 분명한 사실들-그 이질적인 차이와 차이의 방정식들 그 편견들. 그리고 이런 편견들이 단순한 편견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하는 일면적인 사실들 - 즉 사실은 현상을 분석하지만 현상의 이면과 이 이유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오직 판단의 근거를 다루는 차원이며, 여전히 해석이 필요한 문제의 차원이다. 이 차원은 그런 점에서 모든 차원들과 관계한다.) 

둘은, 이념적 층위(국가-단일 공통체에 대한 사회적 발전에 대한 지향성, 대중에 제시된 국가 권력의 역사적 전통성을 기반으로 사전에 판단되고 있는 옳고 그름의 문제들, 이와는 다르게 실제 개별 지역, 산업, 각 집단, 계급, 계층 간의 - 개별 공통체가 일정하게 공유하고, 그들 각자의 이해관계 차원에서 제시되는 옳고 그름의 문제들, - 그 선험적인 - 그 편견들을 사전에 고려한 종합적 인식들, 그 보편적 노력의 산물들, - 그러나 여전히 보편적이지 못한 것들, 여기에 사회의 법이 규정하는 원칙적인 것들은 원칙 그 자체가 아닌 그들 이해관계 간의 관계적 차이와 적대 속에서 - 이념적 지위의 우위성은 비로서 해석될 뿐이다. 이 차원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차원과 관계한다.)

셋은 문화적 층위(문화적 층위는 우리가 상상하는 사회 그 자체와 비교적 비슷한 시공간을 형성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불안정하게 반복되고 실제 문화적 차원 속에서 이 일정한 시공간은 뒤틀려 있다. 그런 점에서 문화적 차원에서의 과거와 미래는 공존한다. 그리고 이런 뒤틀림과 공존을 이론과 지식이 뒷바침하는 상호협조성 속에 정당화하는 문제가 관여, 개입하고 있다. 
- 그런데 근본적으로 각자의 삶이 사회에 존재한다고 - 국가 권력이 요구하는 이념적인 일체성으로부터 비교적 독립적이다라고 상상하면 할수록 그렇게 믿고 있다는 가정 하에. - 사회 자체는 존재한적이 없다고 상상한다면 문화와 문화적인 것의 독립성은 이념적인 층위와 네번째, 단순한 믿음의 문제로 남게될 뿐이다. 하지만 실제 믿음의 차원은 대단히 복잡한 차원이고 오히려 근본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이 문화적 선호는 단순한 문화 산물을 소비하는 개별의 특이성을 규정하는 영역이 아니라 각자의 삶의 방식, 선택, 그리고 선택의 당위성을 구성하는 이떤 이론과 정보 지식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공간은 똘레랑스한 공간이 아니다. 오직 상상적인 것들이 관계하는 미적 취향의 문제들이 상상적 적대를 통해 어떤 대중의 기호를 판별하고 지극히 실제적인 배제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현재의 권력은 이 차원에서 실제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나아가 이곳이 '정치적인 것'들이 잠재적으로 거주하는 차원이기도 하며 가시적인 적대가 - 이 상상적 적대가 일정한 한계치를 가시적으로 넘어서는 순간에 정치적인 차원이 이곳에서 도래한다. 그러나 정념적인 것은 극복되거나 그 자체로 배제되어야 한다. 정치가 실패하는 것은 언제나 이것이 문제로다!)

네번째는 믿음의 차원이다. (우리가 의심없이 믿는 것, 나아가 어떤 주장의 전재가 되는 것, 이것없이는 어떤 주장도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이 없으면 사실의 차원도, 이념적 요건들도 문화적 층위의 문제들도 퇴행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실제 이 믿음의 차원이 인간이 지녀야 할 정치적인 것들이 근본화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 이곳에서 인간이 존재하고 그것이 부정되기도 한다. 인간이 부정되었을 때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긍정되었을 때, 이 두가지 진리의 가능성........ 그것은 구조에 대한 그것에 결박된 두개의 인간에 대한 판본이 공존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이 두가지 진리의 가능성은 그래서 상반된 인식이 아닌 균열적인 서술 방식일 뿐이다. 실제 철학이 관여하는 공간 - 그 진술의 공간이며, 실제 무의식이 주체에 빌붙어 거주하는 개입의 가능성의 공간이다. 
과거에는 윤리적인 것이 이념적인 차원과 동일시되기도 했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런 오류의 시대는 끝이났다. 동시에 이 공간은 언뜻 단일한 믿음, 일방적인 믿음만이 존재하는 단일한 지향성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믿음은 두개의 진리의 가능성을 두고 일정 균열하고 적대하고 있는 차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이 차원에 존재하는 많은 지식과 명제들이 근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 차원은 첫번째, 사실의 층위로부터 늘 무의식적인 개입-(주관적 명제들이 객관화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두번째, 이념적 이해의 - 시대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호출-정당화-되는 공간이고, 실제 인간의 윤리적인 것에 있어 '진보란 없다'는 단순한 동어반복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 믿음의 차원은 믿음 자체의 정당성과 합리성이 요청되는 지식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과학적 지식을 통한 종교 비판의 지식들이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을 비판하는 과정 속에서 - 다른 형태의 믿음이 그 전통적인 권위를 대체하는 헤게모니적 공간 - 개별 집단의 이해관계 늘 개입하고 현실에 적용되는 선험과 선험적인 것들의 우위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상징적인 적대는 어떤 점에서 이런 믿음의 문제를 근거하지 않는 한 실제적인 것일 수 없다.)

다섯번째, 정치 차원 (정치적 차원은 어떤 우위성, 어떤 당일한 복합적인 관계의 차원의 정당성이 사전에 전재될 수 없는 공간이다. 우리가 언급하는 정치의 차원은 실제 사전에 전재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모든 차원의 대립과 갈등을 경유하고 - 현상의 문제를 분석하여 법제화하고, 법의 정당성을 규정하거나 부정하고, 제도화 하거나 그것을 박탈하는 행정과 정치의 순환관계가 이 차원에 관계한다. 
정치 차원은 오직 이것 뿐이다. 이는 실제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기도 하다. 모든 차원들과 관계하면서 동시에 어떤 차원의 이해와 지식도 이 차원의 우위성을 점유할 수 없다. 나아가 모든 차원들이 지니고 있는 권위적인 것들을 박탈하고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현실의 질서는 - 그 자체로 상징적인 것이라는 정치적인 것들의 진술 공간이기도 하다.) 



일베와 보수(뉴라이트)는 바로 사실의 차원 속에서 발생된 지식을 근거로 - 두번째, 네번째의 공간에 대한 해석과 사고의 다양성, 적대와 갈등을 무력화하고,(그런 점에서 네번째 차원 - 믿음의 차원은 근본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며) 나아가 마지막 정치적 차원에서 제시되어야 할 - 제도화의 가능성과 가능성의 박탈에 어떤 기능도 담당하지 못한다. 이는 곧장 과거의 권력적 형태가 반복되는 재현에 복무하고 만다. 
즉 두가지의 증상 - 일베와 친노는 사뭇 다른 듯 보이지만, 정치적으로 무능력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런데 이런 사실-정치 차원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논리적 방법이 친노나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일군의 정치 소비자들이 개입하는 정치적인 것의 운동의 방법들 나아가 과거 현실 운동권들이 일정하게 공유했던 문화 운동의 방법론에 대한 대응의 차원이라는데 있다. 그런 점에서 대단히 오랜 문법적 접근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들이다. 
즉 일베는 - 문화적 층위에서 정치적인 것들이 만들어내는 과잉된 의식의 흐름 - 대중의 운동과 대중 운동의 가능성이 실제적인 정치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분명한 사실을 기반으로 - 그저 상상적 적대만이 계속되는 무능력이 반복되는 과잉 그 자체로부터 탄생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단순하게 반동적인 것도, 정당한 것도 아니다. 
그들이 진정 접근해야 하는 것은 - 친노든 일베든 - 네번째 차원의 근본화한 인식에 대한 접근 외에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단순한 어그로 행위자(일베)나, 문화적 취향을 고집하는 나르시즘(친노)에 빠질 뿐이다.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이고, 정치 이전의 근본적인 인식이다. 
- 그들 모두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싶지만,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역사적인 것이고, 그 실패로부터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과거의 것들을 비판한다고 극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의 발명이고, 이를 위한 네번째 차원 - 믿음의 차원을 근본화하는 길 뿐이다.



2. 첨언  -


과거의 사회적 변화, 혁명에 대한 상상력은 이전 시대의 상징들과 많은 부분 변화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더이상은 광범위한 대중 동원의 집단적 움직임을 상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낡았거나 촌스럽거나 폭력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선에서 일정한 금지가 실제로 행사되고 있다. 그래서 정치는 무력화되었다.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정치적인 것은 출몰하며 정치의 필요성을 호출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의 그 상징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개개의 인식의 층위에 결박된 그것-정치에 대한 고정적인 진술들을(그러나 역설적으로 혁명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이상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즉 사회의 변화가 그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고, - 이런 대중의 판단에 대해 과거 혁명이 치루어야만 했던 폭력적인 현상들을 - 그리고 이는 대중의 판단에 일정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그것이 희열을 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데 소비된다. 
그렇게 사태의 폭로와 사실의 층위에서 현재의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다시 평가하는 관점을 전환하는 방식을 통해 - 그것을 다시금 위치 지우려는 의도 속에서 실천되고 있다. 
- 이런 시도들은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 분명히 대중의 집단적인 행동을 통해 실천되었던 혁명과 그 사건들은 사실 대부분 폭력적이었고, 지극히 광기에 사로잡힌 폭력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과 현상은 어떤 세력이 일방적으로 전유하지 않으며, 그것이 여전히 사회 질서와 그 구조가 그것-폭력- 그 자체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데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냐면 대중과 사회의 집단적 폭력을 반대하는 차원에서 국가라는 폭력 자체에 결박된 하나의 단일한 질서에 대한 희구의 목소리가 그들 모두에게 공통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런 공통된 목소리 - 그들 존재의 이면을 비판할 수 있는가? 문제는 좌파라는 이들조차 이런 시각으로부터 근본적으로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데 있다. 즉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무언가 위험스러운 것이 오고 있다는 사실이고, 어떤 선택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고민 뿐이다. 대중이 폭력과 그 가능성을 더이상은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것-위험스러운 것의 도래 가능성을 지연하고 있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현실 정치 세력을 실제적으로 무력화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의 과잉을 억누르는 안정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는 이중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어떤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고민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 지금 당장은 아무 것도 없다.


4편 - mayro 님

http://todayhumor.com/?sisa_347058

일베의 구조도

 

1. 피라미드 계급

 

전에 올라온 적이 있는 일베의 구조도 간단 그림이다.

 

 

위와 같은 구조도를 통해 일베들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1. 운영자.

 

운영자는 3인으로 구성되어 있다할 뿐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최근들어 국정원 서버를 이용한다는둥의 말이 있지만 그야말로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

철저한 폐쇄적인 정책으로 인해 좌파.진보인사들의 글쓰는걸을 시스템적으로 막고 있다.

 

실제로 필자는 2회 정도의 블럭을 먹어본 경험이 있으며 그외 다수의 진보주의자들의 글쓰는 행위 및 접속자가 제한된 적이 있다는 경험담이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일베유저들은 자유롭고 제한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어디까지나

 

1.패드립

2.보수주의발언

3.성관련

4.욕설

 

에 자유로울뿐 상식과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에는 심각한 제한을 가하고 있다. 이쯤되면 북한사이트 혹은 중국사이트 아니면 전제 왕조사이트가 아닌가 의심될 지경이다.

 

그 배후를 캐내 보자면 40Gb/s (기가비트) 급의 공격을 버텨냈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국정원 요원의 선거개입.및 추천조작을 미뤄보아 국정원 메인서버를 사용하고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막강한 자본력을 가지고 있다.

 

2. 정보생산자

 

일베유저들은 어디서 가져온지 모르는 체계잡힌 자료들로 무장하고 있다. 사실 90%에 거짓 10%를 섞는 교묘한 자료 조작으로 인해 100%의 거짓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일반 유저들로선 도저히 하기 힘든 행위다.

 

최근 국정원 및 새누리당 불법사무실이 적발된 점을 미뤄보면 이러한 정보생산자는 사무실을 차려 정보를 생산 가공 유통시키는 존재들이 아닐까 의심된다.

 

보통 일반유저는 자료를 모아두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유저일경우 그때그때 기사및 구글링을 통해 자료를얻지만 이들은 이미 정리된 자료를 가지고 오기때문에 의심의 여지는 충분하다.

 

3. 돌격대장

 

포어시어러.mc.여왕.골품제.자유.등등의 오유에서 활개치는 일베유저 및 각종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일베유저들로서 하루에 10시간가까이 눈팅을 하며 일반유저들과 전쟁을 벌인다.

 

이들의 특징은 보통 일베 유저하면 그냥 홍어.운지 등의 단어를 사용함으로 유저들을 조롱하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2번의 정보생산자가 생산한 자료를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일레반으로 언뜻보면 보이지 않고 보수 논객유저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따라 아직 정치적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은 2번이 생산한 자료를 보고

 

"어? 얘들이 맞는건가?"

 

하는 인식을 갖을 수 있다.

 

이들은 오유 하드유저들과 매번부딪히는 사람들로서 이기고 지는데 매우 민감하다.

 

4. 일베죽돌이

 

일베 죽돌이의 경우 눈팅을 하는경우가 매우 많으며 타사이트에로 나가지 않으며 내부에서만 홍어.운지와 같은 단어를 쓰며 고인모독등을 즐긴다. 사색이 없는 부류이며 그저 정치를 재미로만 이해하는 부류들이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니 그냥 내벼려두는편

 

5. 중고딩

 

중고딩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질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기전까지의 저학년 대학생들도 포함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다. 이들의 특징은 장소를 구별못한다는 점이며 게임.채팅 등을 이용하다보면 전체채팅창으로 언제나 도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반인들이 매우 짜증나 부류가 이부분이나 하드유저들에게는 그저 귀여운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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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간이 구축한 체계중 가장 효과적인 체계가 바로 피라미드식 체계이다. 지시의 전달속도가 매우 빠르며 온라인이라는 날개가 달아졌으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발전하지 않은 시절 피라미드식 제도 (카스트제도, 양천제, 사농공상, 피라미드 다단계)는 이해하기 매우 쉽고 관리하기 쉬운 조직이기 때문에 성공률도 굉장히 높다.

 

지금이야 피라미드가 안좋은 방향으로 인식되고있어서 조금 힘들어졌지만 포장만 잘한다면 얼마든지 써먹을수 있는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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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베스트 저장소는 보수의 담론 생산장으로서 새누리당과 뉴라이트의 온라인 소통구역을 하는 것으로 보고있다.

 

대선 기간동안의 신천지 논란의 커버를 한 곳도 일간베스트 저장소였고

문재인 대통령의 서민이미지에 타격을 준 호화의자 논란역시 일간베스트 저장소에서 나온 것이었다.

 

소통을 중요시한다는 민주당은 솔직히 대선기간에 온라인 전쟁엔 거의 무심했다고 볼수 있다. 실상 온라인 전쟁에서 민주당은

일반유저에게 거의 모든 온라인 투쟁을맏겼지만

 

일베의 DDOS 공격을 당했을경우 새누리가 논평을 낸것만 봐도 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지능적으로 온라인여론을 자신으로 끌여들이기 위함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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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충이의 일밍아웃

 

베충이들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일베를 한다는 사실을 매우 부끄러워 하며 일밍아웃이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로 일밍아웃한 모학교 학생회장의 경우 오유에서 이런사람이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 테러한것은 같은 일베유저들이었다.

 

그들에겐 적.아가 분명치않고 오직 재미만을 위한 재미를위한 행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스스로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일베를 끊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5편 - 지난줄거리 님


http://todayhumor.com/?sisa_359273


1. 베충이


중세를 넘어 현대로 접어들며 인류는 3번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

첫째, 갈릴레오에 의해 인류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란걸 깨달았을때
둘째, 다윈에 의해 인간이 한낱 원숭이의 후손이란걸 깨달았을때
셋째, 프로이트에 의해 인간은 그냥 원숭이가 아니라 "병든 원숭이"라는 걸 깨달았을때

 

이렇게 3번, 인류는 종족전체 단위에서 사유의 거대한 충격을 받는다.

 


이를 바탕으로 베충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한가지 그들에 대해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베충이들은 그냥 벌레가 아니라 매우 깊은 병에 걸린 벌레"라는 사실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듣기 좋은 명분에 유혹되어 
극단적 터부를 끊임없이 표현해내야만 한다는 본체없는 의무감에 취해버린 병든 벌레>
이것이 베충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집단광기에 접근가능하게 해주는 1차적 키워드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베충이들이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하는 그 "표현"에는 매우 일관된 방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정치색을 제외하더라도 단조로운 표현방향에 대한 관찰이 너무나 쉽게 가능하다.. 대표적인 단 몇가지 케이스만으로도..  
그들의 표현문법이 치우쳐진 방향을 살펴보자면
대표적으로 1.성적인 농담, 2.범죄 모의, 3.지역비하, 4.고인비하 등인데
제목만으로 선입견을 갖지 않고 표현물의 내용을 잘 살펴보아도 매우 일회적이고 어떤 사유나 고뇌의 흔적도 없는 저차원적인 배설성 표현이며 매우 단방향적이며
표현의 주체인 창작자(혹은 작성자)가 단순히 표현했다는 것에(혹은 작성했다는 것에) 만족하고 그렇기 때문에 표현물(창작물,작성물)에 대한 애착심이 없다.
왜냐하면 배설은 이미 표현하는 순간 끝났기 때문에....
배설적 표현(혹은 창작)의 특성은 그것이 "싸버린 행위" 자체에서 완성된다는 데 있으며 순전히 욕망만을 해소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에 있다..
(그나마 성적인 터부를 표현창작의 영역까지 승화시키려면 사드나 자허마조흐,폴린레아주,존 클레렌드 정도는 되어야 최소한의 담론가치라도 가지는 것이지..)
즉, 그저 불나방처럼 맹목적인 터부에의 투신이며 주체할 수 없는 리비도의 폭발인 것이다.(프로이트에 의하면 이게 바로 전형적인 병든 벌레의 모습이다.)

 

표현의 자유까지 운운할 것도 없이
남근기를 잘못 보낸 유아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원시적인 "표현"들은 
1차적으로는 베충이의 수준을 보여주기도 하지만(정상인이라면 여기까지만 보아도 실소가 나온다.)
2차적으로는 베충이의 집착점을 알려주기도 한다.(그리고 이 부분에서 짜증이 난다.)
그리고 그러함으로 인해 베충이들 뇌내 병변의 형태를 알려주는 가이드라인이 되기도 하다.(보통은 짜증나서 여기까지 따져보진 않게 된다.. 당연히..)

 


그렇다면 먼저 이들이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란 무엇이며
무슨 절대명제라도 만난듯이 그 표현의 자유를 입에 달고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생각해보자..

 


역사적으로 보건데, 표현의 자유란 파시즘적 억압에 대항해 예술적으로 승화된 "투쟁"이나 다름없는 것이며 
이것은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철저하게 객체(창작자, 옹호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소명의식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이 처절한 투쟁의 결과가 투철하고 깊은 심도를 가지고 있을때에만 살아남은 텍스트로써의 가치를 가지며
반대로 즉흥적이고 단조로울때는 여지없이 폐기되는 것 또한 이런 이유때문이다.(물론 베충이들의 경우는 후자에 집중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충이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명제를 이용하면서도 그에 대해 진지한 접근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레지스탕스라도 된것마냥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다..
(초등학교때 슈퍼맨 영화보고나면 자기도 초인된듯한 기분.. 딱 그 정도 수준의 착각)
이런 연유로 인해 고찰없는 대전제화가 이루어지고 비판을 수용하지 않게 된다. (핸들이 고장난 8톤트럭이 변속기와 브레이크마저도 고장나 버린것이다.그런데 연료는 가득하다.;)

고장난 베충이의 사고는 비판자 전체를 공적화 하고
원래대로라면 그들이 저항해야 마땅한 파시즘을 그대로 닮아 비판자로부터의 논리적 파훼에 대한 공포를 느끼며 동조자들끼리 똘똘뭉쳐 먼저 십자포화를 쏟아부음으로써
자기들끼리 동류의식을 느끼며 안도감을 가지게 된다.
나의(우리의) 표현을 재밌어 해주는 사람은 우리편, 비판하는 사람은 적..단순한 이분법으로 담론의 깊이는 점점 얕아지며, 결국 진영논리안에 갖힐 수 밖에 없어서
자유의 미명하에 표현압제를 향해 투쟁하는 척 하지만 단지 전형적인 우중의 모습을 보여주게 될 뿐이다.(구조적으로도 이 멍청함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결코 스스로 깨달을 수는 없다.. 불쌍하게도..

안도와 동질감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그들의 진영 안에서 자신들의 것보다 단단한 진영밖 논리는 배워볼만한 미지가 아니라
거대한 공포의 대상이기에 선재공격의 타겟이 되어버렸다..
(소통을 원한다면서 그것은 말뿐이지.. 근본적인 크로스인카운팅이 불가능한 한계를 지닌 베충이들의 현실이다.)

베충의 공격방법은 크게 두가지이다
물량공세, 귀막기
허접한 자료를 들고 단순하게 반복되는 물량공세는 적을 향한 것이며
귀막기는 스스로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포식자가 나타나면 머리만 땅속에 처박고 안도하는 타조(낙타?ㅋㅋ)와 같다. 못들었다고 우기면 없는 얘기인줄 안다;)

앞뒤가 꽉 막힌 이 아이들의 폭발지향적이고 기형적인 리비도가 위험한 것이 위에 제시된 두가지 전투방식 때문이며
이런 면은 묘할 정도로 반드시 정신적 반달리즘을 동반하고 이것이 원래 예상하지 못했던 두번째 쾌락으로 승화된다.(감정이 상하는 누군가를 보고 매우 기뻐한다.) 
적이 상처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그 상처의 형태가 슬픔이든, 분노이든, 짜증이든 게의치 않고)

그저 부정적 상대에게서 부정적인 감정을 유도하기만하면 될뿐 
자신들을 비웃는 자와 논박하는 자가 아니라면 이 기형적 섭식의 대상이라 여긴다.(상대가 강하면 도망가고 약하면 잡아먹는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말로 표현하고 체계화하지 못했을뿐 직관적으로 자신들의 졸렬함과 근거없는 얄팍함을 알고는 있기 때문에
(물론 그조차도 모르는 최저급 베충이들도 다수 존재한다만.. 이건 그냥 질럿(광신도)일뿐이다.. 골치아프지만 기반이 무너지면 제일 먼저 와해되는 그냥 진짜 벌레..)
겁 많은 개가 짖어대듯 무조건적인 공격본능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만큼 또 자신들을 보호해줄 강력한 실드를 갈구하기도 한다.
즉, 자신들의 주인이 있어주길 원하는 갈망이 또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수꼴들은 베충이들을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인과가 마련된다.

 

 

 

2.수꼴우익

 


일제시대의 실증주의 사학자 쓰다 소우키치의 존재가 우리역사를 할퀴고 간 흔적은 너무나 크다.(고대사부터 근대사까지 전부 다 물어뜯었다)
민족사관을 말살하고 식민사관을 주입시킨 핵심인물인 그는 
후에 현대 한국 사학의 거두인 이병도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이병도학파의 후학들이 떡주무르듯 하는 한국 사학계에서 쓰다의 입김은 아직도 살아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역사를 공부하기 전에 역사가를 공부하라고 했던 E.H.카의 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쓰다의 세례를 받은 이병도학파는 베충이와 비슷한 욕심을 부리고 있는데
욕심의 발현방향이 권력, 즉 학계에서의 절대적인 힘을 휘드른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이들은 심지어 그들의 학계집권을 영원불멸화 하기 위해 "현대사는 객관성을 갖기 힘들다"는 모호한 근거를 바탕으로 "현대사연구금지원칙"을 만들어 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사관을 배제한 문헌고증사학의 객관성을 방패로 삼는다.)

수십년전부터 한국의 어린이들은 이병도학파에 의해 역사를 배워왔고
알게 모르게 식민사관에 푹 젖었으며 그것은 곧 패배주의로 연결된다.("엽전들이 다 그렇지 뭐.." 아직도 어른들이 흔히 쓰는 불쌍한 셀프디스 자아성찰이다ㅋㅠㅜ)
(이병도학파는 지금도 건재하다. 전 서울대총장 이장무와 이명박정부의 문화재청장 이건무가 이병도의 손자이다..
이들은 이병도가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주입되는 식민사관은 각 객체의 위치에 따라 두가지로 발현되는데
1/ 일반서민에게는 패배주의를
2/ 기득권층에게는 패배주의에 빠진 서민을 이용할 빌미와 수단
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사대주의와 계급주의의 바탕이 된다.

 

여지없이 이런 빌미를 이용해 먹은건 대한민국의 건국 초대 대통령에서부터이다.
셀프훈장의 전통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위해 마련된 건국공로훈장령의 초대서훈자가 이승만대통령과 이시영부통령뿐이었으며
그 후 1960년까지 독립유공자 서훈은 단 한건도 없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오만한 자기얼굴에 금칠하기를 위해
위정자들은 민중의 마음속에 패배주의를 강화해나가며
패배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이미 수없이 검증된 방법인 식민사관을 여과없이 계속 공급한다.

 

왜 그토록 수많은 국민들이 원하고 있는 일제잔재청산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일제의 잔재가 아직도 설치고 다닐 수 밖에 없는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 사관을 입맛대로 이용하는 위정자들에 의해 파시즘이 강화된다.
이승만 독재를 비롯한 그 후 현대사 한국의 모든 정권은 강력한 친일파와 그 후손에게 지원 받아 완성되며
이제는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 둘은 섞여 버렸다. 
때론 위정자들이 친일파의 얼굴이며 때론 친일파가 위정자 그 자체인
독재와 식민사관 합작의 서클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해 강력한 파워를 가지게 된 이들이지만
본질적으로 민족의 배신자를 품고 간다는 데에서 비판의 화살은 피할 수가 없다.(이또한 당연한 인과관계이다. 강약을 떠나서....)

그래서 이들은 그 비판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십년간 수도 없이 많은 방법을 사용해왔다

때론 어르고 때론 누르고 때론 때리고 때론 만져준다.

그러다가 결국 비난의 화살을 돌려버릴 절대적을 발견하였다.
우리가 적이 될 것이 아니라 진짜 큰 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주자!
그 역할을 하는데 공산주의 이상 어울리는 것은 없다!
마침 세계정세의 흐름에서 또한 이렇게 딱 맞는 적을 발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으니 이제 이용만 하면된다.

그렇게 건국이후 수도 없이 발생한 사건들과 수도없이 주입된 반공주의 사상이 그 단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거의 모든 독재는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유지된다.
얼마나 잘 써먹느냐가 관건인데
수십년을 써먹어도 마르지 않는 좋은 소스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매카시즘이다.
그리고 메카시즘적 공포를 이용한 파시즘의 엄청난 강화이다.

실제로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핵심세력중 하나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사족이긴한데, 이것은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현재 종교가 받는 대우는 그나마 훨씬 좋기 때문에 짧게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실제로 80년대까지의 노동자 운동의 선봉에는 개신교가, 농민운동의 선봉에는 천주교가 있었다.
그후로부터 우경화된것인지 내포된 본성이었는지 너무 썩어버린 한국 개신교가
오히려 좌파 지식인들에게 이제는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에 또한 권력중추의 깊은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애석하다. 
작성자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래도 깔껀 깐다ㅋㅋㅋㅋ 일부라는 말로 물을 타봤자 좌우튼 개신교 썩은거 맞으니까ㅋㅠㅜ
기독교가 썩었다는 사실을 기독교 내부의 윗대가리들부터 좀 인정하고 개선해나갔으면 한다.
본디 한국의 기독교는 무교회주의,만민사제주의가 원칙이었으며 민중친화적이었다. 김교신, 함석헌, 송두영등을 잊어선 안된다.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에는 민족종교화의 움직임도 있었을 정도이다.
한국안에서 기독교의 존재가치는 온전히 그들이 민중의 눈높이에서 민중과 함께 피를 흘리는 데에서만 가치가 있다. - 제발 이제 좀 깨닫자. 예수가 뭘 했던 "사람"인지..
근데 지금 즐비하게 흩뿌려진 드높은 교회의 첨탑들을 보면서 죄책감이 안드나요 극히 일부를 제외한 수많은 목사님들아? 양심팔아먹고 살고 계시잖아요ㅜㅠ)


이때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지금은 어줍짢게 종북주의와 섞어 혼용하고 있지만
여운형, 박헌영등 아직 한반도 공산주의의 정신적, 실제적 절대권력자가 
오직 김일성 1인이라고만 보기에는 큰 범주의 사상안에서도 견제세력 또한 건재하던 시기였다(단지 공산주의로만 봐도 그렇지만 민족주의등 다른 이념들을 함께 관찰하면 더 복잡해진다.)


-수꼴우익의 본격 파시즘적 행태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의 전편 작성자분들이 다양하게 언급하였기에 따로 기술하지 않고
추후 따로 관련글을 작성해보도록 하겠다
(초근접의 현대사만 보아도 할말은 무진장 많다. 전태일, 부마, 사북항쟁, 탁경명, 동아투위,학림
518, 신군부 국보위 관제야당, 야당공작, 꼼수국풍81, 김용택의 팔유팔파, 부미방사건, 사노맹사건, 박종철, 이한열, 강경태, 지금의 한진, 쌍용, 콜트, 재능교육까지....
하..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 이 와중에 희생된 선배님들ㅜㅠ.. 선배님들 덕에 투표할 수 있습니다..)

 

좌튼 파시즘과 매카시즘에 추가해 그들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인터넷의 우경화이다.
그리고 필요할때 써먹기만 하면 되는 적절한 전위부대(아방가르드)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으니
현실에서 쌓인 울분을 똥을 싸듯 인터넷에 토하고 있는
앞으로 뜨거운 감자가 될 디씨정사갤에서 서식중이었던 포스트베충이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만화 헌터X헌터에 나오는 키메라앤트가 연상된다. 위험성은 내포되어 있었고
종종 발현되기도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그마한 개미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섭식진화가 포텐터지기 직전의 모습)

 


3. 베충과 수꼴우익


그렇다면 수꼴은 베충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으며
베충은 수꼴에 어떻게 빌붙고 있는가? 왜 수꼴을 열망하는가? 따져본다.

베충이가 베충이화 된것이
디씨 정사갤에서부터 였는지 
디씨때는 간헐적으로 사건 터트리는 단순 애벌레였고
일베가 완성되고 유입된 이후였는지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시각에 따라서는 일베의 탄생 자체에 큰 목적성이 있어 보일 정도로 많은 것이 의구심 덩어리이며 그만큼 또 가리워져 있다.

 

다만 수꼴측에서 베충이들을 아주 잘 이용해 먹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인듯한데
시시때때로 베충이들의 주장에 단발성 논리를 탑재시켜주는 장황하게 정리된 출처없는 자료의 등장빈도가 너무 잦다는 점이 이것을 은유적으로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베충이의 좌성향 공포증은 사실 베충이로부터 발현되지만 근본적으로 수꼴우익의 공포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베충이는 수꼴의 자발적 자료전달용 셔틀이며 수꼴의 포지션은 자료생산자이다.
(자료생산자의 포지션이 성립되는건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념의 중심이기때문에 가능하다.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사이트인데 본질적 구조는 상하구조.ㅋ)

중요한 것(혹은 위험한 것)은 베충의 움직임이 몹시 자발적이라는 점이다.

베충은 왜 자발적으로 하고 많은 이념중 수꼴의 이념을 따를까?
이것은 베충이 그들본진(일모사이트)에서 서식하는 이유 그 자체와 밀접한 부분도 있고(광란의 렙업시스템. 본질은 상하구도인데 겉으로 봐도 계단식 구조.ㅋ)
베충이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는 부분과 밀접한 부분도 있으며
터부를 자행하며 리비도를 폭발시킴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배덕한 부분에도 얽혀있다.


생태학에서는 상식처럼 되어버린 이야기이지만
자연계에서 생물의 보호색은 사실 거의 의미가 없다.
보호색이 있던 없던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비율은 거의 비슷하다.
보호색은 이름만 보호색일뿐 보호의 역할은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과거 미국에서는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광범위한 조류해부실험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보호색이란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것을 20세기 인문학자들은 거울단계이론을 가지고 설명하고는 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라캉의 잘 알려진 이 이론을 통해
인간은 이상적 자아를 투사해 놓고 현실의 불완전함을 심리적으로 보상받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베충이들은 상상계속의 아기처럼 자신의 이미지를 투사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상호작용의 대상으로 수꼴을 상정해 놓은 것이다.
(물론 알고 분석해서 결과를 내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미지를 무한히 반복생산하여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지켜봐주는 누군가가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표현의 강도를 떨어트릴 수가 없으며 
더 자극적이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한 대의의 미명아래 도덕성은 뒷전으로 미루어둘 수 있는 개인적인 명분이 필요하다.
병들고 불쌍한 베충이들이 외치는 것은 사실 "날 좀 봐달라"는 것이다.(사춘기 꼬꼬마들의 평범한 관심병이란 말로 요약해버리면 인과해석이 너무 어려워 풀어서 썼을뿐ㅋ)
단지 삐뚤어진 표현의 달리는 열차위에서 스스로 내려올 방법을 모르는 것뿐.
그들이 외침에 부도덕함과 비윤리적임이 강해질수록 그들내면에서 그들 스스로의 외침은 간곡해지고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격동의 역사속에서 피튀겨가며 살아남은 낡은 변신의 귀재 수꼴우익들은 알고있다.
어리고 멍청한 리비도덩어리들을 다루는 방법을.....
1910년 76인의 조선지도층 인사들이 일본에게 유사일본식 공후백자남 작위를 수여 받은 이후로 지금까지 주구장창 많이 해봤으니까.. 주특기니까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정체불명의 사명감을 심어주고 고무시키는 것은 정말 비열할 정도로 잘해왔다..)

그저 재밌는 먹잇감(=공격거리)들을 계속 제공해주면 되는것이다.
흐름을 크게 변화시킬 필요도 없이 적절히 방향만 제시하면 되는 편한 작업이다.

 

무관심과 좌절속에서 병든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하던 베충이들은(스스로 괴로운지도 모르고 괴로움의 정체도 모르는....)
스팀팩 맞은 마린처럼 물불 안가리고 달려들어 수꼴의 적들을 물어뜯으며 보장된 자유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있다.
그리고 지네들의 영도자인 수꼴들을 닮아가고 있다고 확신하며 자위한다.
이용당하는거? 그런건 상관 없다ㅋ나름 이해관계가 맞아들었거든..
(1/비근한 예로 근현대 민주화운동의 시대에 수꼴의 수족들-경찰,프락치,서북청년단,계엄군..뭐가 되었던지-은
전기고문, 통닭구이 같은 비인간적인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스스로는 애국을 하고 있다는 착각속에서 본인들의 리비도를 폭발시키는것을 합리화하고 더욱 정진하였다.
이때 이들은 내가 이용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성찰은 하지 않고 그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엉터리 사명감에만 도취되어 있었는데
양심 어디에선가 이것을 멈추려고 하는 작용이 있었다고 해도 조작된 대의에 밀려 곧 사장되어 버렸다.. 그 결과가 낮은 곳으로부터의 자발적 탄압과 고문으로 나타났다.)
(2/518민주화운동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상명하달의 구조속에서 별달리 이의제기 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를 돌이켜보건데
기왕지사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으니..라고 결론을 내면 구조의 최하위 객체들은 더욱 잔인해지고 비겁해진다. 
누군가 언젠가 자신들의 그 어떤 행동까지도 실드를 쳐줄 것이라고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런건 없다..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저 팽의 대상이 될뿐이다.. 
이런 구조는 필연적으로 피라미드 구조이며 구조의 최하위 계급을 유지할 객체들은 너무너무 많이 생산되고 유입되기 때문에 구조유지가 가능하다.)

 

여기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욕구가 베충이들한테 또 있다
똑똑한 척 하고 싶은 욕구.
아주 초보적인 단계의 비틀려진 권위욕이다.
수꼴들이 이용하는 또 하나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출처를 알수 없는 수꼴들에게 얻은 조작된 자료 몇개를 팩트라며 들고나서서 마치 자기 생각인냥 착각하고 큰소리 치는 이유이다.
욕망만 있고 소스가 없었는데 조건없이 소스를 던져주는 주인님들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좋을꼬..

수꼴들은 베충이강아지들한테 뼈다귀 던져주듯 소스를 던져주며
이것봐! 너 똑똑하자나! 누가 감히 너한테 틀렸다고 하니? 가서 물어!
라고 주문한다.(원래 개다룰땐 칭찬이 최고 보약이다 -애견인ㅋ)
그러면 베충이들은 더욱 신이난다.
초보적인 권위라는 나름 만족스러운 외투를 입었기 때문에..........(완장을 찼기 때문에라고 바꿔 말할수도 있다.)

이때 수꼴이 베충을 조종하기 위해 써먹는 방식 몇가지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수꼴의 파시즘적 속성은 온전히 수꼴의 것이지 선동의 방식은 아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첫째로, 자료를 제공한다.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그 원본의 출처가 조선일보인가, 한겨레인가, 국회도서관인가, 실증사료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료들이 제시된 논지에 대해 제대로 된 논박의 과정에 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엉뚱하며->물을타며..)
객관성의 탈을 쓴 조작의 여지가 충분하며(군데 군데 손을 본 흔적이 있거나 팩트의 일부만을 제공 혹은 조명하며)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말초적으로 이미지화 되어있다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베충이들이 이렇게 제공된 자료들에 대해 자발적 검증을 전혀 하지 않는 이유는
일단 검증해볼 능력이 안되어서인 점이 제일 크겠지만
검증과정 자체가 덮어진 양심의 존재를 수면위로 끄집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두려워서이기도 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해버리면 놀잇감이었던 대상이 괴로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말로설명은못해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로, 계단식 계급구조의 토대를 만들어 놓은 레벨업시스템의 제공이다.
이것이 누구나 개인의 노력만으로 계단을 밟고 한칸한칸위로 올라와 자아의 실현(굉장히 의미없긴 하지만..;)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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