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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혀서 다시 재업 - 빌게이츠 악수 논란에 부쳐
게시물ID : sisa_3819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3
조회수 : 43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4/24 00:53:22

우리에게 더 나은 민주주의라는 것이 평등 지향적 관계와 더불어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우리에게 하극상이라는 것이 나타내는 유교적 도덕의 어떤 부정적인 이미지들은 사실 매우 구태적인 레짐이라고 보여지는 바, 이것이 비록 전근대 사회에서 어느정도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공동체를 주관하는데 긍정적인 가치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현대 사회에 이르러 거의 유명무실해졌다는 점은 둘 째로 차치하고서라도 그러한 긍정적 일면이 다소 의도적으로 유보된 측면도 없지 않다는 점을 상기해봐야 할 것이다. - 공동체는 엄밀히 말하면 내부 결속과 개별적으로 소속된 조직에 대한 애착심과 애정 이외에도 내부에서의 분열을 기술적으로 풀어내는 내용 역시 담고 있으며 이러한 분열을 ‘기술화’하는 것이 곧 제도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수 있겠다.


종종 이러한 공동체의 내부 결속을 단순히 충성과 복종의 상하관계 쯤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한데, 근본적으로 이러한 독해는 오독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아주 문제적인 인식을 낳을 수 있으며, 이러한 공동체가 급격하게 경화되고 폐쇄적이며 나아가 공격적으로 변질해버린 예가 바로 파시즘이자, 현대의 보수적 교회 공동체가 보이고 있는 광기의 근원이다. - 다시 말하면 바람직한 공동체는 내부의 끈끈한 유대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유대감을 더욱 더 탄탄하게 해주고 유연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똘레랑스라고 할 수 있다. - 다시 말하면 나와 다름, 즉 타자에 대한 인식, 레비나스식으로 언급하자면 타자와의 관계 속에 형성되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존재 자체로부터 생산되는 주체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똘레랑스는 성립하지 않는다. 볼테르가 했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격언, ‘난 당신의 생각이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생각이 탄압 받는다면 난 당신을 위해 기꺼이 싸우겠다.’ 라는 테제는 사실 비관용에 대한 투철한 투쟁 의식이 담겨 있는 언어다.


일전의 포스팅에서도 뉴데일리나 데일리안류 뉴라이트 멍청이들의 빈곤한 정신세계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을 것이다. 단순히 내가 좌파라서가 아니라, 이들의 민주주의, 그리고 국가에 대한 후진적인 인식과 더불어 그들이 멋대로 곡해하고 전용하며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내는 성리학적 세계 – 오로지 충성과 복종, 예절과 하대만이 남아 있고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윤리를 제시한 측면이 오롯이 무시된 채 기술된 – 에 대한 강한 반감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이들의 사고를 뜯어보는 것이 하나의 재밌는 일거리가 된 느낌도 없지는 않다.


데카르트의 <제 1철학에 관한 성찰 Meditation of the first philosophy>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과학적 믿음의 성취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믿음들 중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남아 있는 것에 대해 믿음을 보류하겠다는 태도를 언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모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 예컨대 내가 바위를 보고 있다는 것도 사실은 어쩌면 원통형의 수조 안에 우리의 뇌가 분리되어 양분을 공급받으며 전기 충격을 받아 바위를 보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의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감각, 지각하는 모든 것들은 의심해야 한다. 과학적 믿음 – 예컨대 물은 수소와 산소분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라는 사실 – 조차도 어쩌면 사악한 악령이 우리에게 ‘그것이 사실이다’라고 믿게끔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단언하겠는가? 모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 데카르트의 이러한 방법론적 회의는 실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 의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급진적이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방법론적 회의는 몇 가지 함정을 제공 - 예컨대 자기 자신이 ‘과학적 믿음’을 위해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라고 언명한 그 명제 자체를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느냐는 자가당착의 오류 등 - 하기는 하였으나, 데카르트의 그러한 방법적 회의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분명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의심해본 결과, ‘생각할 수 있는 나’, 즉 생각함으로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코기토’의 발견이다. 이 중요한 발견은 인간 주체를 종속적 관계로부터 분리하여 독립된 개체로서 정립하였다.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 따라서 문제 해결의 주체 역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는 중세 부패 신학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함과 동시에 인간 주체를 신 아래가 아니라 역사 위에 당당히 올려놓는 역할을 하였다. 조금 더 나아가면 데카르트의 주체의 발견은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 개인 주체가 신으로부터 분리독립에 성공하면서 개인들의 합의/동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근대 민주 국가의 탄생을 추동한 것이다.


이번 빌게이츠 악수 사건에서 드러나는 뉴라이트의 멍청한 사고는 개인 개별 주체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의 “감히 대통령 각하께” 수준의 복속적이며 전근대적 관계성의 사고를 가감 없이 드러내주는 바, 이 ‘바보’들의 행진을 보노라면 주권자에 의해 선출된 직책, 즉 반항과 비판이 자유로이 허용된 ‘대통령 박근혜’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 위에 군림 또는 올라서는 “각하 박근혜”를 호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의 두뇌 속에서 설정된 관계 맺기의 어떤 부분은 사실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주체적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아니라, “예의범절”로 표상되는 권위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전제하고 있다. 그들이 전개하는 좌익에 대한 망상과 그에 기반한 급진적인 의심 태도 - 팩트만이 우리를 구제할 수 있다! - 조차, 국가 원수 및 국가 원수로 표상되는 국가 체계 앞으로 가면 그들의 뛰어난 비판적 이성은 판단 중지 상태가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판단 중지가 아니라 새로운 믿음을 생산해낸다.


권위자는, 사실상 그 권력과 권위를 위임받았거나 혹은 공동체 집단 사이에서 ‘선출된’ 것으로 인식되므로 여기에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뜻하는 권위주의는 표상되지 않는다. 이들의 사고에서 표현되는 ‘국가원수’가 호명하는 주체는 권위를 인정받고 권력을 위임받은 개별 독립 주체가 아니라 사실상 북녘의 ‘수령님’급의 복종과 충성 - 흔히 저들 사이에서 ‘애국’이란 언어로 회자되는 그것 - 만을 담아내는 거의 절대자적 위치의 ‘전제적’ 주체다. 당연히 여기에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요소는 단 발톱만큼이라도 있지 않다. 민주적 주체 간의 관계에서 복종은 정확히 말하면 도덕적이지 않다. - 단, 그러한 복종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윤리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아쉽게도 여기에 데일리안류 멍청이들의 괴상한 도덕론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조롱해도 시원찮을 이 멍청이들에게 한 가지 로드맵을 그려줄 수는 있겠다.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자기 자신에 대해 회의의 칼날을 돌려보는 것이다! 팩트만이 실재라고 착각하며 궤변을 늘어놓기 전에, 자신들의 언어를 의심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 ‘조작된’ 헤게모니와 담론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믿을 것이 못된다고 생각한다면, 자기 자신들의 언어는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인지 반문해보아야 할 것이다.(사실 이는 데카르트적 회의의 함정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상전’에게 누가 될까 염려하여 괴악한 리비도를 엉뚱한 곳에 쏟아 넣기 전에, 차라리 여태껏 그래온 것처럼, 의심해보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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