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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유주의 비판론에 부쳐 -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을 읽고
게시물ID : sisa_3856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3
조회수 : 35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5/08 02:45:50


 


       1.     몇 가지 기초적 관점

 

우선 자유주의를 비판함에 있어 기초적인 자유주의의 관점을 항목별로 정리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자유라는 단어가 수백만가지 뜻을 가지듯이, 그 이름만큼이나 포괄적인 이념이고, 또 여러가지 양태로서 작동해온 정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포괄성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가 전제하며 공유하고 있는 몇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첫 째, 인간은 천부적으로 자유로우며, 이는 신성불가침의 권리이다. 이는 존 로크가 노골적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며 사용한 개념인만큼, 사실상 해석에 있어서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상당히 협소하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유를 지향한다는 관점은 공통된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 자유란 자신의 재산을 지킬 자유로 한정될 것이다. – 이들의 자유는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실존적 자유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둘 째, 인간은 쾌락과 욕망의 동물이며, 이러한 욕망의 긍정과 고통의 회피가 인간의 본능이다. 이는 소위 우리가 성악설로 익히 전해 들은 내용이기도 하며, 홉스에 의해 정리된 개념이다. 홉스는 인간의 욕망 추구 다시 말하면 어떤 고차원적 정신적 쾌락이 아니라, 자기 보호 본능으로부터 긍정되는 욕망 - 의 추구가 합리적이며 도덕적인 것이라고 정당화하고 있다. 언뜻 경험적으로 보아 이는 맞는 말인 듯 하나, 사실 이 명제는 선언된 것이므로 그 자체는 사실로서 볼 수는 없다.

 

셋 째, 모든 인간은 고립되어 있다. – 다시 말하면, 인간은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하며 사회란 것은 이러한 고립되며 독립된 개인들의 결합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 , 개인은 원자화되어 있으며, 생존과 구제는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 이는 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딜레마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 예컨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은 자유주의자를 매우 당황스럽게 할 것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굶어 죽을 자유는 보편 타당한 윤리로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 – 존 롤즈에 이르러 자유주의가 가진 이러한 맹점에 대해 무지의 베일을 주장하며 분배적 정의를 어느정도 실현하고자 이론적 작업을 거치긴 하였으나, 최근 기승을 부리는 신자유주의를 보고 있으면 롤즈의 주장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듯 하다.

 

넷 째, 자유주의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면밀한 분석 및 과학적 근거로서 뒷받침되는 이론 체계라기보다는, 선험적인 주장에 기대어 있는 가설들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역사 속에서 등장한 이래 특별한 이론의 큰 변동 없이도 여러 가지 체제와 결합 및 공유하며 양태적으로 출몰하였다. 예를 들자면 자유주의는 근대 사상으로 출발하였으나 곧 제국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었고, 현재에는 그것이 민주주의와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 사회주의 체제가 그 이론적 견고함 때문에 다른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엄청난 이론적 논쟁을 펼쳤던 것, 예컨대 수정주의 논쟁이라던가, 혹은 소련 공산당 내에서 국제주의 및 일국사회주의 노선 간의 충돌이라던가 하는 논쟁들로 점철되었던 것과는 완전히 상극을 이루고 있다.

 

다섯 째, 자유주의에서 정치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다시 말하면, 정치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주체를 실현시키는 과정 및 참여로서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필요에 의해구성되고 계약된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받아들이고 있는 이 개념은 사실상 민주주의와도 연관 된다. – 다시 말하면, 이들은 민주주의 역시 얼마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들의 재산권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2.     자유에 대하여

 

이 책은 한국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수용했으며 어떤 양태로 바뀌어왔는지 서술하고 있다. 자유주의를 다루고 있는 책인만큼, 책의 앞 부분은 자유의 의미에 대해 다루고 있다. 두 가지 사항을 살펴보자. 먼저 자유주의에서 의미하는 자유란 무슨 의미이며, 나아가 본질적 자유란 무엇인지 생각해볼 것이다.

 

저자는 자유주의에서 주장하는 정치적 자유는 사실상 본질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부르주아들이 정치적 자유를 외치게 된 계기는 그들의 재산권 보장을 위해서이며, 자신과 관계 없는 이의 자유가 억압 당할 때 이들은 침묵했다고 말한다. 사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재산권이 침해 받지만 않는다면 전제왕권이든 권위주의든 상관하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을 조금 더 심화하면 자유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상 자유라는 포괄적 가치의 지향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자유가 중요한지 살펴보아야 한다. 사실, 자유주의자들은 타인의 자유에 대해 인색하기 그지없다. – 반공주의자들은 어떤 면에선 자유주의자일 수 있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로 인식된다. 따라서 이들의 포지션은 자유주의를 차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의 저자는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바로 독립이라고 말한다. 개인은 독립되어 있다. 그러나 독립하기 위해선 강해야한다. 원자화된 개인에게는 자력으로 생존할 것이 요구되므로, 독립이 허용된 개인은 강한 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아가, 강한 개인은 약한 타자’, 도태된 자들을 계몽하여야 한다. – 근대 계몽철학은 이런 맥락에서 파악될 것이다. 이는 사회 진화론 및 제국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저자는 이러한 독립의 가치는 근대 시기가 요구하는 필요에는 부합할지언정 진실은 아니라고 확언하고 있다. 분명, 독립에는 수많은 전제조건이 따라 붙어야만 한다. 홉스가 말했듯, 인간은 폭력적 죽음의 공포에 항상 시달리므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폭력적 죽음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자력으로 구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자유주의가 등장했던 근대 시기에, 왕으로부터 독립하여 자력으로 생존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부르주아들의 요구와도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든, 신자유주의자든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요구해온 자유는 명료하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온전하게 추구할 자유만이 자유이며, 자신의 이익 그것도 온전히 배타적 유효성만을 가지는 이익 - 을 위하여 왕으로부터, 혹은 국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보편적인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언제나 특수한 이익의 총합일 뿐이다. 자유주의자들에게 자유는 보편성으로 설명되는 측면보다는 그것이 목적성을 가지고 추구된다는 점에서 특수적이다. – 공공선 혹은 일반의지를 추구함에 있어 그것은 목적성보다는 오히려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

 

질문을 던져보자. 개인의 이익 추구가 타인의 이익에 위배된다면 규범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가? 저자와는 다르게, 나는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상충될 수 밖에 없는 부분으로 바로 이 대목을 꼽고 싶다. 저자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상충될 수 밖에 없는 대표적인 대목으로 자유그 자체가 자유주의의 주요한 내용이 아님을 꼽고 있다. 본디 자유란 민주주의적 가치인 것이다.

 

앞서서 자유주의는 일종의 양태라고 표현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유주의는 어떤 고정된 혹은 확립된 규범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 달리 말해, 이들은 몇 가지 순진한가정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 가정이 무너질 경우 이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다. 공교롭게도,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공통의 보편된 이익 혹은 규범적 가치에 의거한 윤리적 판단 및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정리 해고에 반대하여 투쟁에 나서는 것은 민주적으로 올바른 일이다. 그것은 정치 권력 위에서 선출되지 않은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는 자본에 대한 항거이기 때문이다. 모든 파업은 사실 매우 민주적 권리 및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자유주의자들은 그런 정리해고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옹호 내지는 심한 경우 경찰력을 동원한 폭력적 진압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어떤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규범적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제시한다. 과거, <독립신문>은 한국의 자유주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들의 자유주의는 제국주의 및 인종주의와도 결합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가 어떤 공통된 윤리적 규범이 존재하지 않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 다시 말하면, 거의 동물적인 수준의 본능 인간의 가장 저차원적인 욕망, 그러나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는 이익의 추구행위가 안전하게 보장되기만 한다면 자유주의는 그 어떤 폭압적 체제와도 결합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오로지 강한 개인만이 자력 구제에 성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의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것은 시대가 지나도 그 양태만 변화할 뿐 사고의 근대성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 신자유주의는 어째서 근대로 회귀하자고 했는가?

 

3.     한국형 자유주의”?

 

저자는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기원에 대한 논의이니만큼 책의 대부분은 사실상 근대 조선에 들어왔던 자유주의 사상의 해설하고 있으며 나아가 당대 자유주의 사상을 설파하는데 선봉으로 서 있던 <독립신문>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자유주의의 여러 양태 제국주의, 반민중적 이데올로기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

 

난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기원 뿐만 아니라 한국형 자유주의현재에 대해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자유주의는 이미 지배적인 사상이며, 동시에 지배계급의 사상이기도 하다. 나아가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여전히 뿌리 깊게 박혀 있으며, 심지어 일부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 자유주의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매우 높은 선호도를 보이고 있다. ?

 

한국의 보수주의자들, 정확히는 이들 우파와 좌파들을 가르는 기준선이 있다면 이런 질문이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왜 존재하는가?” 한국에서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질문을 듣는다면 우선 애국을 먼저 들먹거릴 것이다. 국가와 국민은 일심동체를 이루어야 하며, 그것이 곧 국가의 발전을 위한 길이다. – 나아가 국가에 저항하는 것은 곧 반정부적혹은 반국가적인 불순한 행동이며, 이는 통합을 저해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방식들에 자유주의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 적통은 사실 성리학적 국가관 , 군신관계로 표현되는 상명하복의 권위주의적 질서를 긍정하는데에서 시작한다. 웃기게도,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유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에서 자유주의가 그러한 종속적 관계를 청산하고 개인 주체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등장한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 주체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사고가 전개된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표면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애국자들로 포장되곤 했다.

 

아무래도 이런 애국자들이 이념형으로서 등장한 것이 현재의 뉴라이트가 아닌가 싶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유주의의 그것을 취하고 있다. – 이들은 신자유주의를 지지하고 있으며, 반공을 외치는 자들이다. 이들의 포지셔닝은 정확히 자유주의자의 그것과 맞아 떨어진다.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명백히 극우적인행동과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선출된권력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충성 행위를 마다하지 않지만, ‘선출되지 않은권력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옹호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들의 탄생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본다. 첫 째는 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자체적 모순으로부터 잉태된 반동적 결과물이란 것이고 둘 째로 냉소주의가 만들어낸 B급 문화의 전복이 만들어낸 현상이란 것이다.

 

자유주의는 본디 자유의 본질화를 추구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님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들의 자유는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물질적 권리만을 위해 작용하는 것이며, 정치는 항상 이러한 자신의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만 작동되는 메커니즘이다. 자신들의 저차원적 욕망의 추구가 무제한적으로 허용된다면, 따라서 개인의 독립과 더불어 재산권의 향유가 마음껏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이들은 정치에 대해 무관심할 것이다. – “이데올로기는 배고픈 사람들에게나 쓸모 있는 것이다!” – 실제로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공격할 때에, 그것을 배고프로 가난한 빈민들의 사상임을 강조하곤 하지 않았던가? 그 반대편에 있던 자유주의는 (어처구니 없게도) 풍요와 자유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정치를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 때에 따라 심지어 민주주의마저도 제한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와 사고로부터 비롯하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냉소주의가 그것이다. 대처가 광부 노동자들의 파업을 군대로 진압할 때,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침묵하였다. – 이것은 이들이 본질적으로 타인의 자유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자신의 개별 이익 추구에 이익이 된다면 어느 정도의 간섭도 허용해주는 놀라운(?) 관용정신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공익은, 언제나 그것이 사익과 일치할 때에 추구될 수 있다. – 이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이다.

 

개인의 사익은 보편적일 수 없다. – 그것은 언제나 특수한 것이며, 따라서 이런 사익 추구는 공공선에 대한 지향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익 추구가 공익으로 전환된다는 아담 스미스의 유명한 명제는 그 스스로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함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공공선의 추구에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진전되어 왔으며, 자유주의는 덕분에 궁지로 몰리는 신세였다. 그렇다면 공공선을 만들면된다! 개인의 자유와 생명을 지킨다는 명목도 챙기고, 공공선까지 추구하니 이 얼마나 이상적인가! 이게 현재의 뉴라이트다. 사악한공산주의로부터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지키기 위해, 혹은 시장경제를 지킨다는 명목(공공선)으로,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유주의로 색칠되어 있다.

 

부르주아지들의 정치에 대한 냉소적 태도는 B급 문화를 양산해내었다. 사회가 민주화 됨에 따라, 과거 권위주의적 통치의 잔재들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 –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에 의한, 그리고 자본을 위한 통치가 강화됨에 따라 대자본의 사익 추구는 종종 보편적 이익으로 치환되었으며, 그에 따라 자유주의는 보다 더 노골적으로 애국주의와 결합해 갔다. 이러한 애국주의 중 일부분은 다시 권위주의적 잔재들과 결합하며 B급 문화로 형성되었다. – 디씨, 일베 등 인터넷 커뮤니티 등이 흥행을 타기 시작하며 주류 문화와 이들 B급 문화 사이에서 전복이 발생하고 있다. 심심치 않게 주변에서 들리는 인터넷 용어들은 무엇을 반증해주는가?

 

분명한 지점은 이렇게 형성된 한국형 자유주의는 그 극우성으로 인해 얼마든지 전체주의로 치달을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자유주의는, 그것이 철학적 수준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일부 호의적일 순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자유개인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자유, 그렇게 축적된 자본을 마음껏 권력화할 수 있는 개인이란 점에서 상당히 문제적인 이데올로기이다.

 

4.     자유주의의 재논의를 위하여

 

현실 공산주의가 몰락한 뒤 자유주의는 기세등등하여 세계를 호령하고 다녔고, 심지어 중동 아랍권 지역의 문화에 대해 비민주적혹은 비자유적이라고 이야기하며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까지 사용되었다. 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린지 불과 1세기도 되지 않아 제국주의적 전쟁을 정당화하는데에 자유주의자들이 나선 것이다.

 

분명히 이는 문제적인 사안이며, 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전반에 대한 재논의가 부족했던 것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논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공산주의자와 동일어였으며, 따라서 사유재산권을 침해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자 쯤으로 인식되었다. 자유주의는 스스로 개인 위에 올라탔다.’ 개인들 간의 계약 관계로서 설명되는 자유주의는 한국의 보수주의적 우파들 사이에서는 거의 볼 수 없지 않은가? 자유주의가 단순히 경제체제일 뿐이라고만 말한다면 그건 순진하거나 멍청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보다 더 편리한 정치적 도구가 있던가?

 

바로 이 지점이 이데올로기를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보처럼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다.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 항상 존재해온 이데올로기로, 그 양태만 다를 뿐이었다.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그 역사도 짧거니와 권위주의와도 결합한 예가 있으며, 현재에도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정치집단에게 유용한 정치도구로서 사용되는 언어체계다.

 

저자가 언급했듯,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가 지니는 위치 및 의미와 그 실제적 관계에 대한 전반적 재논의가 필요하며, 적절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공동체는 파괴되고, 사회는 해체되고 있다. – 자유주의의 이름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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