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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의 슈피겔 인터뷰-1
게시물ID : phil_61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에티카의정신
추천 : 3
조회수 : 104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7/16 00:04:27

* 하이데거는 1933년 프라이부르그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는등 히틀러 정권에 협력을 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에 2차 대전 종전후에는 공개적인 강의가 금지 되었다. 하이데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비난에 대해 오랬동안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 1966년 9월 23일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겔>지(誌)와 가진 이 인터뷰에서 하이데거는 비로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할 뿐만 아니라, 기술, 사유, 시(詩)등 후기 철학의 중심 문제들에 대해 논의 한다. 인터뷰는 하이데거의 요청에 의해 1976년 하이데거 사후에 공개되었다.
 


 

 


하이데거(오른쪽)의 집에서 진행된 인터뷰

슈피겔
아직도 해명되지 않은 그 때의 일, 비록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부인할 수 없는 그 일로 인해 당신의 철학적 저술들이 가려지고 있다고 우리는 여러 차례 말해왔다.

하이데거
1933년을 말하는 것인가?

슈피겔
그렇다. 그 전후를 말한다. 우리는 그 사건을 더 큰 맥락 속에 두고 거기에서부터 좀 더 중요해 보이는 문제로 나아가려고 한다. 예를 들면 철학이 현실에, 특히 정치적 현실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
내 가 그 문제에 대해 모두 답변 수 있는가 하는 것부터가 이미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우선 총장직을 맞기 이전에는 어떤 식의 정치 활동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1932/33년 겨울 학기에 나는 휴가 중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나의 오두막에서 보냈다.

슈피겔
그렇다면 어떻게 프라이부르그 대학 총장이 될 수 있었는가?

하이데거
1932 년 12월 이웃인 해부학 정교수 폰 묄렌도르프(von Moellendorff)가 총장에 선출되었다. 새 총장의 임기는 4월 15일부터 시작되었다. 1932/33년 겨울학기에 우리는 자주 당시 상황에 대해, 정치 상황뿐만 아니라 특히 대학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또 때로는 가망 없어 보이는 학생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판단은 이러했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한에서는 다가오는 사태 전개를 막기 위해, 그 때까지 여전히 남아있던 개혁의 힘을 시험해 볼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슈피겔
당시 독일 대학의 상황과 독일 전체의 정치적 상황에서 어떤 연관성을 보았다는 것인가?

하이데거
1933 년 1월에서 3월 사이에 나는 분명하게 정치적인 흐름을 알고 있었고 종종 거기에 대해 젊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나의 작업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에 대한 광범위한 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여름학기 시작과 함께 프라이부르그로 돌아왔을 때 폰 묄렌도르프 교수는 이미 4월 16일 총장에 취임해 있었다. 그러나 겨우 두 주가 지나서 그는 바덴주(州) 문화 장관에 의해 면직되었다. 대학 내에서 소위 '반(反) 유태 포스터'의 게시를 금지한 조치가 그들이 바라던 빌미를 준 것이었다.


1933년 책을 불태우는 나찌 학생들

슈피겔
폰 묄렌도르프는 사회민주당원이었다. 면직 후에는 어떤 일을 했는가?

하이데거
면 직된 날 폰 묄렌도르프는 내게 와서 "하이데거, 이제 당신이 총장 자리를 맡아야만 합니다"하고 말했다. 나는 행정집행 경험이 없다는 점을 말했다. 부총장이던 자우어(Sauer) 교수(신학)도 총장 선거에 입후보하도록 권유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黨)의 허수아비가 총장에 임명될 위험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수년동안 대학의 구조에 대해 함께 토론해 왔던 젊은 동료들도 총장직을 맡으라고 재촉했다. 오래 동안 망설였다. 결국 총회에서 만장일치를 얻을 수 있다면, 대학을 위해 총장직을 맡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도 내가 총장으로 적절한지에 대한 회의는 계속되었으며, 투표일로 정해져 있던 날 아침 총장실로 찾아가서 면직 후에도 거기에 머물고 있던 폰 묄렌도르프와 자우어 교수에게 총장직을 맡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이제는 더 이상 입후보를 취소할 수 없다고 말했다.

슈피겔
그래서 당신은 결국 승낙하게 되었다. 그러면 국가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이데거
총 장 취임 이틀 후에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학생 지도자'가 와서 다시 한 번 '반(反) 유태 포스터'의 게시를 요구했다. 나는 거절했다. 그들은 금지 결정이 '국가 학생 지도 동맹'에 보고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도 돌아갔다. 며칠 후 SA(나치 돌격대) 최고 지도부의 대학 담당 부서에서 SA 지도자인 바우만(Baumann) 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른 대학들처럼 포스터를 게시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만약 거절한다면 내가 해임되거나 그렇지 않다면 실제로 대학이 폐쇄될 거라고 생각해야 했다. 내 금지 결정에 대해 바덴주(州) 문화 장관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는 SA에 대항해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금지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슈피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하이데거
총 장직을 맡게 된 동기는 이미 1929년 프라이부르그 대학 교수 취임 강의인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 나와있다. "학문의 그 많은 분야들은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대상을 다루는 그들의 방법들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이렇듯 갈기갈기 찢겨진 전문 분과들의 다양함은 오늘날 대학 또는 학부의 기술적인 조직에 의해서만 겨우 결합, 유지될 수 있을 뿐이고 전문 과목들의 실용적인 목적 설정에 의하여 겨우 하나의 의미를 견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학문들이 공통적으로 뿌리는 내고 있는 본질 바탕은 말라죽어 버렸다." 대학의 이러한 상황과 관련해서 재임 기간 동안 하려고 했던 것들은 나의 총장 취임 연설에 모두 들어 있다.

 


국가사회주의(나찌) 학생들

슈피겔
우 리는 1929년의 그 주장이 1933년 총장 취임연설에서 말한 것과 일치하는지를 알아보았다. 그 중에서 한 문장을 찾아냈다. "자주 찬미되는 '학문의 자유'가 독일 대학으로부터 제거되었다. 그러한 자유는 소극적이기만 하기 때문에 거짓이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당신 생각과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이데거
그 렇다. 나는 아직도 그 것을 지지한다. 그러한 학문적 "자유"는 너무나 자주 학문적 탐구가 요구하는 성찰과 숙고에 참여하는 수고로부터의 자유처럼 소극적이기만 한 것이 되어 왔다. 그러나 당신이 인용한 구절은 그 자체로가 아니라 문맥 속에서 읽혀져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소극적 자유"라는 말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슈피겔
좋다. 모두 잘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총장 취임 연설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 히틀러가 연방 수상에 지명 된지 4개월 뒤인 그때 당신은 "그러한 새로운 여명의 위대함과 영광"에 대해 말했다.

하이데거
그렇다. 나 역시 인정한다.

슈피겔
거기에 대해 좀더 설명해 줄 수 있는가?

하이데거
물 론이다. 나는 그때 다른 대안을 발견할 수 없었다. 스물 두 개 정당의 다양한 의견과 정치적 경향의 전반적인 혼란 속에서 프리드리히 나우만(Friedrich Naumann)의 시도와 같이 국가적이고 무엇 보다 사회적인 하나의 관점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나의 총장 취임 연설을 훨씬 넘어서 있는 에두아르드 슈프랭거(Eduard Spranger)의 논문을 인용해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슈피겔
언제부터 당신은 정치 상황에 관여하기 시작했는가? 스물 두 개의 정당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리고 1930년에는 수백만의 실업자들이 있었다.

 


하이데거(오른쪽 x표)

하이데거
그 당시 나는 <존재와 시간>(1927)과 그 이후의 여러 저술과 강의를 통해 생겨난 물음들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그 것은 국가적, 사회적 문제에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관계되어있는 사유의 근본 물음들이었다. 대학 선생인 내게 직접적으로 제기된 물음은 학문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와 관련해 대학의 사명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노력은 <독일 대학의 자기 주장>이라는 나의 총장 취임 연설 제목에 나타나 있다. 그때까지 어떤 총장 취임 연설에서도 그와 같은 제목이 내 걸린 적이 없었다. 그 연설을 비방하는데 참여한 사람들 중 누가 그 것을 철저하게 읽고, 깊이 생각하고, 그 당시의 상황으로부터 그것을 해석하려고 시도 해보았는가?

슈피겔
그러나 그처럼 난폭한 상황에서 하는 대학의 자기 주장은 어느 정도는 부적절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 않는가?

하이데거
왜 그런가? "대학의 자기 주장"은 그 당시 당(黨)과 국가 사회주의 학생들이 요구하던 소위 말하는 "정치적 학문"과 대립되는 것이었다. 정치적 학문이란 명칭은 그 당시에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오늘날처럼 정치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 자체의 의미와 가치가 민족에게 주는 실제적인 효용에 따라 평가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학문의 정치화에 대한 반대입장이 총장 취임 연설에서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슈피겔
우리가 당신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 당신은 당시에 새로운 여명이라고 느꼈던 그것으로 대학을 이끌면서, 동시에 여전히 대학에 독자성을 허용하지 않던 지배적인 조류에 맞서 대학이 자기 주장을 하게 하려고 했다는 말인가?

하이데거
그렇다. 그러나 "자기 주장"은 단지 기술적일 뿐인 대학의 조직을 넘어서는 새로운 방향을 서양적, 유럽적 사유의 전통에 대한 숙고로부터 얻어내야 한다는 과제를 동시에 제기하고 있다.

슈피겔
교수님, 당신은 당시에 국가 사회주의를 통해 대학의 쇄신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이해해도 되겠는가?

하이데거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대학은 국가 사회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숙고를 통해 새로워져야 하고, 그럼으로써 앞서 말한 의미에서, 학문의 정치화라는 위험에 맞서 견고한 지위를 확보해야한다.

슈피겔
그 리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노동의 봉사, 군복무, 지식의 봉사라는 세 기둥을 총장 취임 연설에서 주창했다. 당신은 학문의 봉사가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허용하지 않는, 다른 두 가지와의 동등한 지위로 격상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하이데거
연 설에서 "기둥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지식의 봉사가 분명히 순서 상 세 번째에 오지만, 그 의미로 본다면 첫 번째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다른 모든 인간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노동과 군복무는 지식에 기초하며, 그것에 의해 계발된다.

슈피겔
그 러나 우리는 당신이 지금도 동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문장을 하나 더 끄집어 내지 않을 수 없다. 이 괴로운 인용은 이제 마지막이다. 당신은 1933년에 "이론과 이념이 당신 존재의 법칙이 되게 하지 말라. 총통 자신이 그리고 오직 그만이 현재와 미래 독일의 현실이며 법칙이다"하고 말했다.

하이데거
그 부분은 총장 취임 연설이 아니라 1933/34년 겨울학기 초 <프라이부르그 학생 신문>에서 나온다. 총장이 되었을 때 어느 정도의 타협 없이는 일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당신이 인용한 문장을 지금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이미 1934년에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슈피겔
다 시 한번 연관된 질문을 해도 되겠는가? 지금까지의 대화를 통해 1933년에 당신은 두 깃대 사이를 동요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 졌다. 당신은 공적 요구에 의해 많은 것을 말해야만 했다. 이것이 하나의 깃대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좀더 적극적인 것이다. 당신이 새로운 어떤 것, 새로운 여명이 여기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말로 표현했던 바로 그것이다.

 


하이데거의 스승 후설

하이데거
그렇다. 나는 현상만을 말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슈피겔
바 로 그와 관련해 당신이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나찌)와 그들의 단체에 협력했다는, 여전히 공개적으로는 부인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비난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학생 조직이나 히틀러 청년단이 책을 불태우는데 관여했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하이데거
나는 대학 건물 앞에서 계획되어있던 분서(焚書)를 금지시켰다.

슈피겔
당신은 또한 도서관과 철학 세미나에서 유태인 저자의 책을 치워버렸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하이데거
나 는 세미나의 책임자로서 해당 도서관에 대해서만 지시할 수 있었다. 나는 유태인 저자의 책을 치우라는 계속되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내 세미나의 참석자들이 유태인 저자의 책이 치워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저자들, 무엇보다도 후설(Edmund Husserl)이 1933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인용되고 토론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슈피겔
그렇다면 그러한 소문의 발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악의적인 것인가?

하이데거
그 소문의 원천에 대해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방의 동기는 더 깊은데 있다. 총장직을 수락한 것은 결정적인 원인이 아니라 단지 기연(起緣)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아마 계기가 주어진다면 논란은 되풀이해서 불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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