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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주의자들(혹은 그를 자처하는 멍청이들)에게
게시물ID : sisa_4177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10
조회수 : 439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3/07/25 02:39:46

Written by 무명논객


진보가 무엇인가? 누가 진보를 자처하는가? 내가 화나는 지점은, 속칭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벌이는 몇몇 멍청한 행각들 때문이다.

- 롤즈의 <정의론>은 '최소수혜자의 최대 혜택'을 언급하며 분배 및 시장 정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 이러한 롤즈의 정의론에 기반하여 볼 때 소위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정의"는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잣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 왜? 국정원 사태 등 일련의 부르주아적 민주주의를 지탱 및 유지하려는 일련의 흐름으로부터 소위 "진보" 혹은 "진보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의 언어, 즉 그들의 "정의"는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정의"와는 맞닿아 있지 않다.
- 논리적으로 연결도 어렵거니와, 한국 사회의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즉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려는 노력을 무위로 돌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노력들이 소위 '진보'의 대의를 자처하기에는 그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보'란 무엇인가?

- 단순히 사회가 '좀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순전히 계급적 이익을 반영한 것이다.
- 예를 들어, 부르주아가 '사회가 좀 더 나아졌다'라고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들 손에 떨어지는 이익이 좀 더 증대되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혹은 중간계급에게 사회가 '좀 더 나아졌다'라고 이야기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정치적 권리, 그리고 경제적 기반이 확장되었다는 뜻이다.
- 결코 이것은 지배자,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바라는 사회상은 아니다.
- 필연적으로 이러한 사회의 '진보'는 계급적 이해, 즉 계급적 '정의'를 따르기 때문이다.

무엇이 '계급적 정의'인가?

-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되어 있다는 것은 유물론적 진실이다.
- '진보'라는 가치는 단순히 정치적 지표로부터 왼쪽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 그 사회의 계급적 이익을 얼마나 반영하는가, 혹은 그 사회의 변화와 관련한 이데올로기적 현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 바로 이런 지점으로부터 '진보'라는 가치는 발현된다.
- 정의는 보편적이지 않다.
- 그렇다면 정의는 필연적으로 특수성을 띌 수 밖에 없다.
- 이러한 논리적 추론으로부터, 정의는 "계급적"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정의"란 우리 사회의 질적 변화와 관련한 여러 이데올로기적 충돌 및 물질적 관계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근거는?

- 일차적으로 나는 '환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 우리는 '정의'의 실현을 이야기함에 있어, 그 '정의'라는 언어가 환상에 둘러싸여 있음을 종종 망각한다.
- 예컨대, 학교 폭력에서 정의란 '폭력의 근절'이지만, 이조차 우리는 '폭력'의 환상에 매달려 있다.
- 즉, 매스미디어 등이 만들어낸 '폭력'의 이미지에 매달리는 것이다.
- 폭력의 실재는 사실 미디어의 그것과는 관계가 멀다.
- 다시 말하면, 우리의 도처에 폭력은 존재하며, 이러한 폭력의 근원적인 부분과 표면성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이러한 환상에 둘러싸인 우리는, 결국 환상에 근거한 '정의'만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 예를 들어, "NLL"이라는 논제는, 사실 그것이 이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정치적 절차의 문제라기보다는 '애국'이라는 정념에 근거하여 '느껴지는' 문제일 뿐, 사실 그것이 '정의'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 NLL문제는 핵심도 아니거니와, 그것을 문제 삼는 소위 '우파'들의 행각은 다분히 환상적인 측면이 강하다.
- 쉽게 말해, '애국'이라는 정념적 가치는 실재라기보단 '환상'에 가깝다. 국가는 통념적으로 지배되는 집단인가, 혹은 이성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구분선인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 '진보'라는 가치는 소위 보수주의자들, 혹은 애국주의자들의 그것에 매일 필요는 없다.
- 다시 말해, '진보'는 그 독자성을 유지할 때에 비로소 의미가 있다.
- NLL 문제에 목을 매는 것이 실질적으로 사회의 '진보'에 의미를 부여하는가?
- 그것이 '아니다'라고 결론이 내려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보'라는 가치에 실질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 국정원 문제가 가벼운 것이 아니고서야, 이것을 NLL 문제와 동위선상에 있는 것으로 취급하기에는 사실 논리적 근거가 불분명하다.
- 우리에게는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지켜야만 하는 '사명'이 부여됨과 동시에 '진보'의 대의를 찾아야만 한다.
- 소위 '정의당'이 이야기하는 추상적 '정의'로는 이 사회의 '진보'를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 '어떤' 방향의 변화인지, 그리고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그 미래와 전망을 이야기함으로써만 '진보'는 성립할 수 있다.

결론?

- '진보'를 자처하지 마라!
- 그리고, '진보'를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라!
- 일베와 같은 뉴라이트의 멍청한 언어 장애는 둘 째 치고서라도, '진보'는 보다 더 진중해야 한다.
- 우리에게 그러한 진중함이 남아 있는가?
- 혹여, 이 사회의 당장의 현안을 해결하는 것만을 '진보'라고 치부하지는 않는가?
- "더 나은 사회"에 대한 텍스트를, 우리는 충분히 갖추고 있는가?
- 사회가 나아지길 바란다는 일념 하나만으로는 '진보'를 자처하기엔 불충분하다.
- 그러한 고민이 더욱 구체적이며, 더욱 전망적일 때 우리는 그것을 '진보적'이라 부를 수 있다.
- '진보'라는 언어를 좀 더 진지하게 다가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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