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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기의 죽음 - 그리고 망상증적 징후들.
게시물ID : sisa_4200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13/3
조회수 : 34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7/30 00:34:11

Written by 무명논객


남성연대 성재기 대표가 사망하였다 한다. 그가 살 것이라고 확신하고 한강에 투신한 것이 그만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사고임은 틀림 없다. 나는 이 글에서 그의 죽음에 대해 조롱하거나 비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성재기 대표, 편히 가시라.


그의 죽음에 대한 추모는 이 쯤 하자. 확실히, 그의 안타까운 죽음의 이면에는 몇 가지 망상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똑똑히 볼 수 있다. 나의 비판은 바로 이 지점에 머물 것이다. 핵심은 무엇인가? - 나는 남성연대를 지지한다는 뭇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남성의 대표로써 남성의 권익을 대변했다"라는 추상적 헛소리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언어가 지니는 비일관성 및 비구체성, 나아가 그 망상증이다. (아무래도 요즘 지젝을 읽다보니 "환상"이라는 언어를 자주 쓰게 되는 것 같은데, 사실 '환상'이라는 기표가 의미하는 것은 사물의 실재를 둘러싼 모종의 관념들, 허구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연대의 그것, 혹은 성재기의 그것은 허구적 관념보다는 사실 정신병적 도착증세에 가깝다. 그래서 '망상'이란 단어를 썼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남성과 여성.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식에 기초했을 때 이 둘 사이의 관계는 평등지향적이어야 함이 옳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요소를 집어넣게 된다. 경제적 지표, 혹은 권력의 소유와 전통적 구조 등. 예컨대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가부장제 사회였으며, 그에 따라 남성이 짊어지는 부담은 매우 컸지만 그에 비례하여 남성이 휘두르는 권력 역시 어마어마하였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그 집안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그리고 경험적 지표들로써 한국 사회는 여전히 전통적 가부장제가 잔유물로써 남아 있는 사회라는 점은 명백하다.(사실 남성이라는 점이 그 자체로 경쟁력이요, 권력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 아닌가?) 이런 사회에서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라고 가정을 했을 때, 근본적인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남성연대가 스스로 그것을 주장한다고 주장하는) 소위 양성평등, 혹은 "인권" 나아가 좀 더 협소한 부위의 "性적 평등"을 이야기하려면 이러한 기초적인 전제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불평등이 기원하는 본질적 이유는 성기의 다름 혹은 신체적 조건 등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기반, 그리고 물질적 현실로부터 기원한다. -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주자면, 생물학적 다름과 사회학적 불평등은 다르다는 말이다.


남성연대 혹은 성재기의 망상은 바로 여기로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다름과 사회학적 불평등을 동일선상에 두고 바라봄으로써 평등의 개념을 곡해한 것이다. 이 뿐이랴? 차라리 모른다고 그랬으면 상관이 없겠는데, 구조적 기반으로부터 기원하는 문제들을 남녀 대결 구도로써 바꿔버리고, 역차별의 주범을 '여성'으로 지목하였다는 점이다. - 이들에게 대안은 없다. 그저 그런 소위 '된장녀'들을 욕하는 것이 이들의 대안이다.


욕하다 보니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생리 휴가제, 혹은 출산과 군대의 문제 등 사실 근본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그것들이다. - 다시 말해, 이들의 언어는 사실 평등 혹은 인권과 같은 보편적 언어와는 전혀 톱니바퀴가 맞지 않다. 다만 배제된 자들의 증오와 분노만이 담겨 있다.


아주 간단한 상황극을 해보자. 남 녀 한 쌍의 커플이 있다. 남자가 밥을 사고, 여자가 커피를 샀다. 식사를 맛있게 끝난 후 이 커플은 논쟁을 벌였다. 남자는 밥을 사든 커피를 사든 더치페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자는 자기가 커피값 내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 일베 혹은 성재기식 언어로 이야기하면 이 여자는 '된장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중요한 핵심은 "누가 더 내는 것이 맞는가"라는 지점이 아니다. 더욱 근본적인 지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 누가 경제적 능력 혹은 권력을 지니고 있는가? - 남성의 경제적 능력은 곧 권력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사실 상황극 속에서 남자에게는 매번 밥을 사는 것이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뭇 남성들이 그러하다. 매번 밥을 사자니 부담스럽고, 또 그걸 말하자니 자존심이 안서고, 이래저래 골치 아픈 경우다. 여자는 남자가 밥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 우리는 이 상황극에서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 째, 여성이 경제적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은 사실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여성이 경제적 능력을 지니게 됨으로써 가부장제의 많은 부분은 허물어졌다. 둘 째, "남성"이라는 집단 안에서도 그 계급 격차가 존재한다.(아주 당연한 사실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는 철저히 계급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러한 추론들로부터 아주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 상황극 속의 여성을 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평등'과 '인권'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면 여성을 욕하는 것이 남성연대가 주장하듯 '남성역차별'을 극복하는 대안인가? 아니면 구조적 근본문제를 봐야 하는 것인가?


성재기, 혹은 남성연대 혹은 그 지지자들의 '위험한' 망상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쉽게 일반론으로 치환해버린다는 점이다. 성재기의 안타까운 죽음의 이면에는 이러한 망상증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배제된 자들의 증오요, 분노다. 쉽게 말하면, 자신들의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고 싶어하는 반동주의적 경향이다.


성재기의 죽음이 영웅화되기에는, 그의 행동과 인권관이 너무도 천박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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