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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는 미국적 자유주의의 독재를 보여준다. -미리니름-
게시물ID : movie_145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향유
추천 : 14
조회수 : 71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8/04 02:48:13

사실 많은 기대를 하고 극장에 들어가서 초반부에 굉장히 실망했다. 총리가 나타나서 우리를 먹여살리는 것은 질서이며 신발은 발 아래, 모자는 머리 위에 쓰듯이 질서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은 제각각 정해진 불변의 위치를 반드시 지키라며 연설을 하는 장면을 보고, 파시즘을 비판하는 그저 그런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몇십년 전에만 나왔더라도 제법 먹혔을 작품인데 시대착오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게 아닌가. 사실 지금 국제 사회는 광신적으로 자유방임주의를 추종하는 미국이 여전히 미국 예외주의와 팍스 아메리카나의 신념 하에 자유와 미국적 민주주의를 세계 곳곳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시점이며, 비록 세계 여기저기에 독재국가들이 몇몇 있다 하더라도 파시즘은 사실상 사상의 무대에서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이다. 그래서,
지독히 시대착오적인 작품.
그것이 내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커티스 일행이 급격하게 혁명을 시작한 이후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이 영화는 파시즘을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보다는 현재 지구촌 국가들의 현실을 세밀하게 그린 다음, 그 뒤에 '한물 간' 파시즘을 덧댐으로써 인류의 현재 모습이 우리가 이미 틀렸음을 명백히 아는 그 파시즘에서 크게 진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구 전체를 떠도는 자급자족형 설국열차의 내부에는 지구 전체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있었다. 최악의 생존환경에서 바퀴벌레 단백질블록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쟁과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는 후진국을, 중간의 호화로운 객실들은 중진국, 선진국을, 앞칸에서 클럽과 마약으로 그려지는 장면들은 가장 자극적인 향락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선진국의 고도로 발달된 문화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런데, 끝 칸 사람들은 사실 별 쓸모가 없다. 솔직히 그들 전부가 사라진다 해도 앞칸 사람들의 생활에 문제가 될 것이 있는가? 바이올리니스트가 필요해서? 키 작은 어린애가 필요해서? 썩 와닿는 답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그들은 크게 착취를 당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열차를 위해 어떤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영화의 핵심이 나온다. 봉준호가 '열린 시작'으로 남겨두어 모든 관객들이 의문을 품게 만든,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하고 불편한키 포인트는 '그들의 혁명에 정당성이 있는가?' 이다. 이 문제를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우리가 미국적인 시각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 시각이란 바로 미국적 자유주의이다.

여기서 미국적 자유주의는 미국이 내세우는 인권(법 앞의 평등)과 자유시장의 원리(합리적인 1:1의 교환 관계)를 말한다. 미국적 자유주의의 시각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면 끝 칸 사람들은 아주 빌어먹을 쓰레기들이 된다. 열차에 무임승차하여 많은 공간을 차지한 주제에,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무슨 일을 하지도 않는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다. 능력도 없는 그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앞 칸 사람들은 할 수 있는 걸 다 해주었다. 바이올리니스트처럼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을 직접 뽑아가서 풍족한 대우를 해주기도 했고, 심지어 그런 능력이 없는 잉여 떨거지들한테도 물과 식량과 잠자리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주었는데 그들은 배은망덕하게도 폭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들고 앞 칸 사람들을 죽이고 열차를 탈취하려고 했다. 완전 미친놈들 아닌가?

그러나 그들의 혁명에는 변명이 있다. "우리도 앞 칸처럼 풍족한 환경에서 살아보고 싶다."라는 것이다. 미국적 자유주의의 시각에서는 무능력자들의 생 떼에 불과한 것이나, 그들이 처한 상황을 잘 살펴보면 그들의 요구는 제법 설득력이 있다. 정말 미국적 자유주의 아래에서 능력대로 자원이 분배되는가? 인도에서 소와 코끼리와 승객들을 피해 곡예 운전을 하는 버스 기사와 뉴욕의 잘 닦인 고속 도로를 달리는 버스 기사 중 누가 운전을 더 잘하는가? 끝 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분 상승 욕구의, '문'에 의한 근원적인 단절은 바이올리니스트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정말 뛰어넘기가 힘들다. 끝 칸 사람들 대부분은 혁명이라는 과격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앞칸의 문화와 향락을 맛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합법적으로 앞 칸으로 갈 수 있는 어떤 제도적인 장치들이 있었는가? 없다. 후진국 국민들이 선진국처럼 풍요로운 경제와 강력한 국방력과 화려한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어떤 제도적인 장치들이 있는가? 없다. 앞칸과 끝칸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우리 지구촌의 현실을 소름돋을 정도로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다시 미국적 자유주의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이미 그 사고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나도, 당신도 끝 칸 사람들의 혁명에 대해서 정당성이 있는가 의아해서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당신도 알고 있듯이 미국적 자유주의가 정답은 아니다. 끝 칸 사람들은 별로 할 줄 아는 것 없는 잉여라도 합법적으로 앞 칸 사람들처럼 스시와 계란을 먹으면서 아쿠아리움과 과수원을 관광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인권' 이다. 법 앞에 평등 같은 형식적인 미국적 인권이 아닌, 정의로운 인권이다. 그것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를 떠나서 그리고 열차 내에서(현재 지구촌에서)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따라야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다. 그것은 설국열차가 다루는 주제를 벗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설국열차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미국적 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독재다. 
지구촌 전체를 싣고 달리는 설국열차의 엔진이 가지는 성질에 주목하라. 이 영화에서 독재를 하고 있는 것은 윌포드가 아니라 미국적 자유주의라는 엔진이다.(그래서 윌포드는 기꺼이 커티스에게 자기 자리를 주려고 했다.) 철학적인 문제라 이해하기 난해하지만 여기가 영화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이다. 이 영화에서 열차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우상, 열차의 엔진. 감독은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통해 엔진의 독재를 아주 소름돋게 표현하고 있다. 열차에서 이탈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미국 예외주의와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의 제도와 인권과 민주주의는 인류가 여태 만들어놓은 것 중 가장 완벽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열차는 바깥의 추위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유일무이한 시스템이다. 실제로 미국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세계 은행과 같은 국제 금융 기구는 후진국에게 차관을 내주면서 그들이 국가의 법제도를 미국의 법제도와 유사하게 수정할 것을 요구하며 미국적 자유주의를 전파하고 있다.(한국도 IMF때 경험한 바 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법 앞에 평등과 같은 미국적 인권. 보이지 않는 손 같은 자유 시장의 원리. 미국적 자유주의가 세계의 각국의 정치 철학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총리가 내뱉는 광기 어린 연설, 아이들을 세뇌하는 선생님 등, 봉준호가 영화 전체에 걸쳐 이렇게 노골적인 파시즘적 요소들을 설치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엔진의 독재에 대해서 강력한 풍자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적 자유주의가 그토록 혐오했던 '파시즘 정권의 독재' 그러나 그 자유주의가 엔진이 되어서 인류 열차를 독재하고 있다! 그리고 커티스의 한쪽 팔 희생이라던지 티미 엄마의 모성애 같은 것은 이러한 사상적 이데올로기와 대비되어 그것을 더 몰인정하고 무자비한 것으로 비추어지게끔 하는 효과가 있다.

열차 내부에서 일어나는 혁명과 그를 둘러싼 각종 음모와 계략들은 결국 미국적민주주의의 파시즘이 이끄는 '열차' 내부의, 우리 지구촌의 현실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봉준호가 영화의 마지막에서 남궁민수와 그 딸 요나를 이용해 열차 자체를 개박살 내버렸다는 것이다. 난 솔직히 전율이 일었다. 플레이타임 두 시간에 달하는 영화는 이 한 장면을 멋지게 그리기 위한 전주에 불과했다.
그리고 열차 밖의 넓은 공간으로 나서는 두 아이의 모습을 보라. 미국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자유'는 독재 열차의 내부가 아니라 그 밖의 무한한 공간에 있었다고 하면 비약이 될까? 그 자유의 땅에서 요나와 티미가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열차 파괴가 과연 현명한 일이었는지도 알 수 없으며, 평화와 희망을 보여주는 비둘기라도 날아야 할 텐데 그 대신 북극곰이 어슬렁거리는 절망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건 앞길도 순탄치 않으리라는 암시이다. 열차를 너무 섣불리 파괴한 것일지도 모르고, 요나와 티미가 윌포드의 열차보다 더 훌륭한 설국열차를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봉준호 감독은 마지막 순간까지 지독히 객관적인 태도로 영화를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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