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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의 변혁적 사유 이해하기 - 좌절한팬더님께 반론
게시물ID : sisa_4378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10
조회수 : 427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09/11 19:47:56
들어가기)
 
좌절한팬더님의 주장.
 
1. 정당의 가치
 - 대한민국 헌정 이래 소위 대중정당이라는 집단들이 정치발전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끼쳤는지부터 따지고 들어가야 할 것.
 - 자칭 세계에서 지식인 당원비율이 가장 높다던 노동당의 전신 진보신당마저
   그나마 확보했던 원내의석조차 지키지 못한 채 보라당의 합당 운동에 밀렸음.
 - 따지고 보면 진보정강과 정책이 사람들에게 폭넓게 인식된 것. 북쪽 조선노동당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킬 수 있었던 시기도
   비록 일심회사건 등으로 빛이 바라긴 했으나, 진보정당의 첫 원내진출이었던 전기 민주노동당의 성과가 아니었는가.
 - 사상적 자위를 목적으로 정당을 창당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스스로를 틀에 가두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겠는가.

    NL의 경직성과 폐쇄성은 비판하면서 왜 또 다른 폐쇄적 기반을 파고들려 하는가.

 - 대중과 친숙하지 않은, 괴리된 정당은 결국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2. 대중정당의 가치와 정치적 피로감의 악순환

 - 선거행위는 그간 정당이 해 온데 대한 일종의 중간평가 단계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지형 아래 대중이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허언에 머무르는 기성정치인의 태도에 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공허한 이념을 기치로 대중에게 어떠한 현실적 당근책도 내세우지 못하는 대안정당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

   이는 소위 대중정당이라 불리우는 노동당도 다를 바 없다.

   변화를 위해서는 기존 정치세력들이 가진 안정감과 이익을 뛰어넘는 당근책과 동시에
   변화라는 방식이 가진 소위 '리스크'요인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노동당의 전신 진보신당부터 이러한 선거요인을 다 따져가며 적극적으로 선거를 기획해본적 있는가?

   진보신당의 지난 지방선거.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과 장밋빛 미래에 대한 청사진은 있을지언정, 거기서 끝.

   당시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에게도 밀린 참담한 성과에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언제까지 선거라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한 비판과 회피만을 할 것인가.
   그렇다면 노동당은 '대중정당'을 기치로 내세워 현실정치에서 도망다니는 겁쟁이밖에 되지 않는다.

  - 선거로부터 도망치지 마라.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투쟁해서 의석을 쟁취하는 길이
     대중정당을 대중과 가깝게 할 것이며, 대중의 정치적 피로감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3. 복합적 공안행위 비판의 시점

 - 야권이 한창 국정원 개혁을 기치로 내거는 시점에서 촛불시위를 집중적으로 이끌었던 보라당과 그 의원 및 당직자가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할 당시
   민주당과 정의당의 브리핑은 무분별한 종북몰이를 경계함과 동시에 이석기 사태에 대한 신중한 접근을 주문한다.

   이는 국정원 개혁이라는 최종 목표를 위한 자세. 원내정당 그들 스스로의 스텐스로 합리적인 선택의 산물.

 - 노동당이 대중정당을 기치로 내걸면서 원내 진입을 노린다면 최소한 이들처럼 조금 더 신중한 브리핑을 냈어야 했다.

 - 정부여당의 의도 자체가 국정원 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흐지부지하게 만들어 이를 좌절시키고
   더 나아가 비 여당 구성원 혹은 지지성원 전체를 압박하고 찍어누르기 위한 수단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 '정당 브리핑'이라면 단순한 진영론적, 사상론적 탄압 그 이상의 시각에서 바라봤어야 했다.

 - 정부의 '복합적 공안행위'를 비판하기 위한 이번 사태의 사전조건으로는 '이석기의 무죄'라는 선행조건이 필요했다.
   최소한 '부분적 무죄'라도 받아내야 한다.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은 이 시점에 감정에 휩쓸려 너무 성급한 브리핑을 냈다.


4. 논점은 노동당 브리핑 비판에 있다.

 - 이석기라는 개인의 사상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순수한 '인간 이석기'를 위한 원칙이다.
   국민의 대표성을 지닌 '국회의원'이라면 스스로 더 행동에 신중했어야 했다.

   또한 그 소속이 정부여당에 대한 최대의 적대감을 드러내는 집단이라면 더더욱.

 - 물론 다수 사회주의자들이 공안당국의 무분별한 탄압을 받는 상황은 잘 알고있다.
   따라서, 심정적 동의와 정부의 행위 비판, 객관적 사고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는 그들의 곁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할 자세가 되어 있으며, 또한 그러고 있다.

 - 그러나, 앞서 말했듯, 정당에 소속된 정당원이라면 이미 일반 '개인'이 아니다.

    전장에 나선 정치적 투쟁의 한복판에 선 투사이다.
    국회의원이나 당 대변인은 그 투사들 중에서도 제일 선두에 서서 투쟁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다.

 - 이 시점에서, 노동당의 이번 브리핑이 제대로 된 정치적 투쟁인가? 여전히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이번 브리핑은 완벽한 작전 미스이며 적의 함정에 빠져버린,
   또 나아가 원내정당 재 진입이라는 목표에 방해가 될 뿐인 행위에 불과하다.

 - 나는 노동당이 조금 더 신중해지길 바란다.
   그들이 정당이라는 옥쇄를 스스로 찬 이상, 이미 그들은 사상의 자유를 원하는 일반인이 아닌,

   전면에서 적과 싸워 목표를 쟁취하는 투사임을 상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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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반론.
 
정당에 대한 변혁적 사유
 
첫 째로 우리 시대에 소위 '진보정당'이 높은 지지율을 점유했던 시기는 사실상 건준 이후로는 없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극심한 극우 반공 정권의 탄압의 세월 속에 진보 정당이 자리하기 위한 지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 엄밀히 말해, '진보'라는 가치 자체가 비어있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진보'의 이름이 비어있었기에 우리는 건설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 그 원시적 형태가 바로 국민승리21이며, 민주노동당이다. 그것이 어떻게 건설되었는가? - 선거와 투표로 민주노동당이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거주의자들의 순진한 발상이다. 나는 선거와 투표만으로 정당의 성장과 발전을, 그리고 정치발전을 재단하는 행위는 '선거주의'이며 동시에 의회로의 수렴만을 강조하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 대중은 언제나 의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당에 대한 변혁적 사유가 등장할 수 있다. - 대중정당은, 그 정치적 개념과 같으 대중과 '함께' 성장하는 정당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대중이란 의미는 단순히 양적 의미의 대중이 아닌 체제로부터 소외된 대중으로써, 투쟁에 나설 역량을 지닌 조직된 자들이다. 민주노동당 역시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성장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진보정당들이 수권하지 않았다, 단순 지지율이 낮다는 사실근거만으로 정당의 성장과 그 정당의 역할에 대한 의의와 과정을 폄훼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정당으로써의 관리 능력에 대하여
 
정당이 지니는 효용 중에 정치적 대중의 각성 이외에도 그들을 교육하며 효과적으로 이념을 보급하는 기구라는 점을 상기해볼 때 현 노동당이 그렇게 뛰어난 관리 능력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 이것은 차후 논의해야 될 문제로써 현재 논쟁과는 그다지 논점이 맞지 않는 부분이다. - 물론 이러한 부분이 대중의 정치적 피로감을 악화시켰다는 지적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진보정당 자체만의 문제도 아니며 - 역설적으로 대중이 느끼는 진보주의적 가치들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 내지는 경멸감 등은 그들이 진보정당으로부터 타당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박탈감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다. - 정확히 말해, 우리는 주체로써 계급을 호명할 뿐이다. 이것은 단순히 진보정당만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는 과하지 않은가?
 
합리의 탈을 쓰지 마라 - 정치적 언어가 비판의 대상
 
좌절한 팬더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정의당 및 민주당이 내놓은 스탠스는 그들이 의회 정당이라는 틀 안에서 행동했기에 나올 수 있는 합리적 계산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포동의안에 대한 비판 역시 합리적이다. 왜? - 의회 정당이라는 '틀' 안에서 행동했기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체포동의안에 대한 찬성이라면, 의회의 밖에 있기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체포동의안에 대한 반대이자 비판이다. 또한 이것은 이석기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다시 강조함과 동시에, 체포동의안이 지니는 정치적 언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기원한다. - 정확히, 공안활동은 '주어 없는' 활동으로써 우리가 기실 느낄 수 있는 단순한 치안활동에서부터 현 정치권에서 볼 수 있는 '종북주의자' 사냥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공안활동은 그 일상성에서부터 정치성까지 다양한 언어를 지니고 있다. - 문제가 되는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공안활동 그 자체에 내재한 문제가 아니라 공안활동을 함으로써 내비치는 정치적 언어에 대한 침묵이 과연 진보적 가치로써 옳은가? 아니면, 좌절한 팬더의 주장대로 원내에 진입하기 위해 이러한 옳지 못한 일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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