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비평) 알튀세르 읽기 혹은 넘어서기 - 주체 개념을 중심으로
게시물ID : sisa_4397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10
조회수 : 472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9/18 00:04:08

Written by 무명논객


맑스를 넘어, 다시 맑스로?


시대가 시대인지라, 맑스도 예전보다는 더욱 자주 언급되고 또 그의 이상 혹은 통찰들이 넘쳐나는 논설과 비판글 속에 녹아나지 않은 곳이 없다. 맑스를 언급한다는 것은 - 정확히는 그의 개념들을 시대 속에 불러낸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도발일 수 있지만 - 시대를 뛰어넘어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하고자 하는 의지의 구현이리라는 망상이 잠시 든다. -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테지만. "맑스는 죽었다!"고. 과연 그러한가?


어쩌면 저 질문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우리가 맑스의 현재성을 부인하지 않는 것과 같이, 맑스의 낡음 역시 부인하지 말아야 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가라타니가 그랬듯, "내면을 깊이 향하지 않고서는 외부를 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물론 가라타니 그 자신은 이러한 의도로 저 말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맑스철학은 실천이론으로써 그 의미가 명명백백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비록 이 글은 짧게 끝날 것이기는 하지만, 따라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루지는 못할테지만 적어도 그러한 '근본적 사유'의 흔적들을 뒤돌아보기에는 적절하게끔 구성하였다. 나는 이제부터 맑스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길래? 나는 알튀세르에서 약간의 단서를 찾았다.


"주체"에서 시작하기


우리가 맑스를 자주 언급하며, 또 그를 계승(?)했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비판이론들을 익숙히 눈 여겨 보아왔지만(위르겐 하버마스, 테오도어 아도르노, 그 이름만 들어도 주옥 같은 이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포스트모던으로 도배된 곳에 잘 비춰지지 않은 학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알튀세르가 아닐까 한다. - 사실 알튀세르가 언급되고자 한다면 소위 "반인간주의자"라는 비난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 그의 이론적 저작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문제 의식은 그가 "과학적 맑스주의"를 회복하고자 한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당대를 지배하던 스탈린주의 격하 운동과 더불어 맑스주의 자체가 스탈린 시대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채 "인간주의" 내지는 "경제주의"를 극복하고자 한 데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과학적 해명과 비난에서 벗어나 스탈린주의를 과학적으로 비판하고자, 그가 맑스주의의 그러한 '오독'을 해소하기 위해 천착했던 주요한 지점은 '주체'에 대한 사유라고 볼 수 있겠다. 주체에 대한 언급을 통해 우리는 헤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알튀세르는 헤겔주의를 '본질주의' 내지는 '환원주의' 경향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 즉, 역사의 전개와 세계를 '절대정신'이라는 단일한 주체의 전개과정으로 본 헤겔의 사고방식의 변용이 바로 맑스주의의 두 사생아들인 경제주의와 인간주의라고 읽은 것이다. 흔히, 구 소련에서의 스탈린주의가 내건 가장 대표적인 오독, "공산주의의 필연적 승리"라는 전제는 바로 이러한 헤겔주의 사고방식, 즉 "생산력이 발전하면 자연스레 공산주의 사회가 이룩될 것이다."라는 생각은 경제주의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경제주의는 필연적으로 결정론을 함축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주의자들(사실은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은 '비인간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주의'가 탄생하게 된다. 맑스의 주요 저작들 중에서 소외 이론들이 전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보기에는 이 역시 신통치 않은 해법이었다. - 정확히, 그것은 과학적 설명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일종의 주관주의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제 알튀세르에게 주어진 임무는 맑스로부터 이러한 헤겔주의의 '오염물'들을 끊어내고 진정으로 '과학적 맑스주의'를 정초하는 일이 되었다.


'본질-현상'에서의 탈피, 구조주의적 맑스주의?


알튀세르는 자신의 과학적 맑스주의 세계관을 정교하게 다듬기 위해 여러 개념을 사용하였는데 다소 까다롭다. 물론 개념이 복잡한만큼 알튀세르의 세계관이 정교한지는 의문이다. 알튀세르를 파악하기 위하여 그의 개념들을 모두 다루자면 글이 상당히 길어지므로, 자세한 언급 대신에 짤막한 언급만 하고 넘어가자.


알튀세르의 문제틀은 맑스의 그것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 대부분의 - 맑스주의자들이 인식하고 있는 '경제결정론적' 유물론에 대한 반박이다. 요컨대 통념적인 맑스의 유물론에 대한 인식 -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 - 과는 대조적으로, 알튀세르는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단순히 경제 영역만이 아닌 정치, 과학, 이데올로기 등의 모든 영역을 나름의 독자성을 지닌 영역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각각의 실천 영역을 '심급'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심급들이 복합 다중적으로 '접합'된 사회에서는 어떠한 심급도 다른 하나의 심급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 이러한 알튀세르의 착상은 헤겔적 사고방식에서 비롯하는 본질주의적 내지는 환원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심급들이 모두 동등한 것은 아니다. 각각의 심급은 그 나름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고유의 리듬을 가지고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이렇게 불균등한 발전 과정 속에 다른 요소보다 침투력과 영향력이 우월한 지배적인 요소가 불균등하게 접합된 구조를 "지배 구조"라고 부르며, 이러한 불균등한 접합 속에서 대립하는 각 요소는 모순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적 관계는 다른 모순적 관계 속에서 '중층 결정'된다.


여기에 알튀세르는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이라는 개념을 집어넣게 된다. 알튀세르 그 자신도 인지하고 있듯, 맑스주의에서 다루는 정치경제론에서 경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틀에 의거하여 알튀세르는 경제를 최종 심급으로 설정한 것이다. 경제는 그 스스로는 언제나 지배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특정한 사회에서 어떤 요소가 지배적이 될지는 궁극적으로 결정해준다는 것이 알튀세르의 발상이었다.


이론주의자? - 계급투쟁의 재해석


알튀세르는 이러한 복잡한 개념들로부터 몇 가지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론적 실천 영역과 물질적 실천 영역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 데에서 비롯한다. 맑스주의는 주지하다시피, 이론과 실천의 연관과 결합으로써 '시작'되는 철학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러한 중요한 실천의 문제를 '이론적 영역'으로 승화시켜버렸다. 


또 다른 문제는 혁명에 관한 전망이었다. 혁명은 통일된 시간체로써, 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러한 혁명의 발견은 구조들의 우연적 접합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입장은 전망을 비추는데 있어서 매우 취약한 방식임에는 틀림 없다.


이에 알튀세르는 아예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계급투쟁이야말로 역사의 동력이다!" 이제 알튀세르의 이론적 실천 영역은 '정치적 실천'으로 옮겨 간다. 알튀세르는 다시 여기에서 '주체'를 사유하게 된다. 기존의 맑스주의에 따르면 노동자 계급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 스스로를 역사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이다. 그들은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막강한 힘은 계급의식에 각성에 따라 계급투쟁을 통해 역사 속의 주체로써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의 관계 속에서는 어느 한 쪽 항의 일방적 폐기를 전제할 수 밖에 없다.


알튀세르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답변한다. 계급투쟁은 접합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실천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투쟁이 대립하는 계급의 소멸이나 특정한 역사 발전을 향해 필연적으로 나아간다는 보장은 없다. - 소련은 필연적 결과였는가? - 나아가 알튀세르는 계급투쟁이 계급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바로 그 유명한 '호명' 테제가 등장한다. 계급은, 계급투쟁 속에서 '호명'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계급은 일종의 생산물에 불과하며, 이들은 역사를 발전시키는 주체라고 부르기 어렵다. - 그러한 주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역사의 원동력으로써 '계급'이라는 주체 대신에 그러한 주체를 기각하고 그 자리에 "계급 투쟁"이라는 과정을 집어넣은 것이다. 이러한 주관성 없는 계급투쟁 위에 알튀세르는 계급투쟁의 '물질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제 알튀세르에게 모든 실천 영역은 계급투쟁과의 연관 속에서 파악되며 그러한 계급투쟁은 경제영역에서 착취라는 형태로 존재하며, 정치-제도-이데올로기로 이어지는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은 이러한 경제영역에서의 계급투쟁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 넘어서기 - 새로운 주체의 등장?


글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알튀세르를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반인간주의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써 계급투쟁을 산정했지만, 계급투쟁 안에 존재하는 계급이라는 주체는 폐기해버렸기에, 또한 그의 '지나칠 정도로 과도한' 구조주의적 해석들에 의하여 알튀세르는 '반인간주의자' 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그러나 그러한 통념적 해석과는 달리 알튀세르가 남긴 과제는 오히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지점을 선물해주는 듯 하다.


이미 포스트-알튀세르주의자들(알랭 바디우 등)이 천착했듯, 그의 주요한 저작들 속에서 그가 집요하게 추적하며 관찰하였던 것은 다름 아닌 주체에 대한 사유였다. 그는 맑스주의에 대한 헤겔적 독해로부터 그러한 '오염'들을 감지해냈고, 일차적으로는 그러한 오염들을 어느정도는 걸러내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 물론 그가 노력한 바와 같이 진정으로 '과학적 맑스주의'를 정초하였는지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주체 독해로부터 새로운 주체에 대한 사유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후계자들은 이 지점을 아주 잘 파고들고 있다. 


* 다음 글에서는 포스트-알튀세르주의자들을 중심으로 2편을 쓸 계획입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