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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새로운 정치를 가능케 하라 - 주체 개념 중심으로 #2
게시물ID : sisa_4399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5
조회수 : 38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9/18 23:56:22

Written by 무명논객


알튀세르의 사유로부터 -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을 찾아


우리가 저번 글(http://blog.daum.net/liveinthought/67)에서 알튀세르의 사유의 궤적을 좇아 새로운 사유의 시발점을 잡았다면 이번 글에서는 그러한 알튀세르로부터, 알튀세르를 준거 삼아 활동했던 몇 명의 철학자들을 만나볼 것이다. 그들이 알튀세르를 준거 삼아서 사유할 수 있었던 첫 번 째 근거는 바로 맑스주의야말로 진정으로 '해방'의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해방을 위한 작업, 즉 사유와 실천을 멈추지 않으려 했기에 그들은 현재에도 다시금 호명될 수 있다. 이러한 작업들이 이어지고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맑스를 '유효하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해방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라기보다는 해방을 위한 사유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은 시대적으로 여러가지 질곡을 겪었다. 그들은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라는 테제를 위하여 첫 번째 기획을 단행하였고, 레닌을 비롯한 혁명가들에 의하여 구현되는 듯 하였으나 그들은 실패하고 말았다. - 스탈린과 같은 비뚤어진 상속자들은 맑스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오해하고 만 것이다. 물론 이 시점에서 그들이 맑스를 오독했느냐 아니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어쩌면 이미 모두에게 맑스주의 그 자체는 실패한 이념으로써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지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인류 역사 속에서 맑스주의자들이 행했던 '해방'의 첫 번 째 기획은 물거품이 되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알튀세르를 비추는 이유도 여기에서 근원한다. 일찍이 그는 맑스주의의 '위기'를 목도하였고, 그 공백을 찾아내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그의 위대한 발견은, 단순히 하나로 환원되거나 합치될 수 없는 정치의 '고유성'을 찾아낸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알튀세르로부터 우리가 반성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토대의 변혁으로부터 정치적 해방을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독립된 고유한 리듬과 자율성을 지닌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한 사유이다. 실제로, 우리는 맑스주의의 실험이 실패한 것으로부터 '정치로의 회귀'라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었다.1 의회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발표한 『역사의 종언』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하였다는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정치의 소멸'이라는, 역설적인 현상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정치적이었던 문제들, 예컨대 젠더, 소수자, 이주노동자, 인권, 민주주의의 문제들은 이제 정치적 문제들이 아니라 법적, 행정적 관리와 조정의 문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2


따라서 우리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정치철학적 임무를 부여 받게 된다. 이제 비정치적으로 전유되던 것들에 대하여 고유의 정치성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해방의 가능성, 정치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작업이 부여된다. 지금부터 우리가 볼 철학자들은 그러한 임무를 위하여 끊임 없이 사유했던 이들이다.


주체의 위기


주체사상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주체 개념의 문제는 철학적 과제로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주체로 돌아가야 한다. 주체에 대한 사유로부터 시작해야만 해방의 가능성에 대한 사유의 지평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자.


알튀세르의 지적 유산들은 당대 프랑스의 구조주의적 지적 흐름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사실 알튀세르 그 자신은 여타 '구조주의자'들과 자신을 구별하려고 애썼다.3) 그러나 이러한 구조주의의 흐름 속에서 주체는 오로지 수동적으로만 생산된다.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계급은 계급 투쟁이라는 과정 속에서 '호명'되는 것이다. 해방의 주체로써 계급이 아닌, 단지 생산물에 불과한 계급이라는 점을 알튀세르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맑스주의에서 역설하고 있는 해방의 가능성을 무색하게 만든다. 이제 주체에 대한 사유는 단순히 체제에 포섭되는 주체가 아니라 어떻게 변혁적인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맑스주의가 형성되던 시기에는 '해방으로써의 주체'라는 새로운 정치적 설정을 통하여 사유의 지평을 열기는 했으나 그것 역시 계몽주의가 전제하고 있던 주체 개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맑스주의적 사유가 근대적 정치에 있어서 사유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는 부인할 수 없지만 여전히 그것은 '근대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알튀세르가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논제를 '호명' 테제로 제출하면서, 즉 주체를 역사 과정 이전에 존재하는 '역사 위의 주체'가 아니라 과정 속에 존재하는 '구체적 주체'들이라는 설정을 통해 이 한계가 극복되는 듯 하였으나 이러한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논제는 단지 자본주의적 생산 구조 속에 예속화되는 방식을 말할 뿐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개인들은 단지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신민/주체'로 호명될 뿐이며, 이로써 지배관계의 재생산, 다시 말하면 어떻게 개인들이 이러한 재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것에 대한 비판과 전복을 위한 주체화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명백히 이것은 주체의 위기였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계승자들은 이것을 걷어내고자, 새로운 주체의 사유를 통하여 맑스주의의 그것, '해방으로써의 정치'를 정초하고자 하였다. 다음 두 철학자를 보자.


바디우, 맑스주의의 위기로부터


알랭 바디우는 알튀세르가 '주체'에 주목하며 그로부터 맑스주의의 위기를 읽어낸 것처럼 그의 사유의 중심도 맑스주의의 위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바디우에 따르면, 맑스주의의 위기는 자신에게 그 정당성을 부여해왔던 준거들이 붕괴되며 시작되었다. 첫 째는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담보하기 위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존재, 둘 째는 봉건적, 혹은 식민지적 상태에 대한 민족해방 전쟁, 셋 째는 맑스주의의 능동성을 가능케 하였던 혁명적 노동자운동의 존재. 이 세 가지 준거들이 붕괴되며 맑스주의는 그 신용을 상실하였다. - 오늘날 노동조합은 단순한 관리 조직일 뿐이며, 그들이 혁명적 운동을 추동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읽어내기는 매우 어려워보이지 않은가? 또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붕괴하지 않았는가? - 언뜻 보면 부르주아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이 세 준거의 붕괴를 통한 '맑스주의의 위기'는 사실 맑스주의자들에게도 위험한 신호였음은 틀림 없다.


그러나 바디우는, 여타 부르주아 학자들과는 인식을 달리 한다. 그것은 '창조적 붕괴'이며, 우리는 여기서부터 새로운 맑스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맑스주의 정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나오는 '귀결'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 - '사회구성체의 히스테리적 징후'라 불리우는 노동운동, 봉기와 같은 정치적 투쟁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부터 '출발'한다. 맑스주의와 분리될 수 없는 논제를 발견해야만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끊임 없이 새롭게 사유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역사적 맑스주의와 분리하여 보편적 정치적 사유로 정립하는 것이야말로 충실한 맑스주의자의 임무일 것이다.


바디우는 이 보편적 핵심을 "공산주의"라고 부를 것을 제안하고 있다.(세상에, 어찌 이리 도발적인가!) 그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 현실에서 존재하던 소련과 같은 국가가 아니라 - '비-지배' 이념으로써 모든 정치적 운동에 내재하고 있는 이념이다. 그에게 정치란, 오로지 비-국가적인 한에서한 정치적이라고 규정된다. 따라서 정치가 존재하고자 하는 준거는 국가를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분리된 대중의 정치적 운동의 존재이다. 맑스주의 정치의 출발점이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존재였듯, 이것을 바디우는 보편적 시각으로 확장하여 '시건들의 존재'로부터 맑스주의 정치를 새롭게 사유하는 것을 시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주체의 재등장 - 알랭 바디우


바디우는 맑스주의 정치를, 즉 그 정치적 진리로써 보편적 이념인 '공산주의'를 해방의 이념으로써 정초하기 위해여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사유를 시작한다. 바디우는 그 사유의 출발점을 알튀세르의 '철학' 개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알튀세르에게 철학은, 과학을 자신의 대상으로 갖는 이론으로써 기능하였다.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자본』을 읽는 것은 과학적 이론으로써 『자본』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이러한 입장은 한 번의 선회를 겪으면서, 자신의 그러한 입장을 '이론주의적 편향'이라 규정하며 철학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제시한다. 철학은 과학이 아니라 "이론 안에서의 계급 투쟁"이며, 철학적 행위는 "이론의 영역 내부에서의 분리의 선을 긋는 것", "과학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 것" 사이의 분리의 선을 긋는 것에 있다.4


요컨대, 철학은 '이론 안에서의 계급 투쟁'인만큼, 그것은 정치의 연장이며 이론 안에서 정치를 표현하고 나아가 이데올로기의 위험으로부터 과학적 실천을 옹호함으로써 정치적 실천을 수행하는 것이다. 철학은 과학과 정치에 관계 맺으며 이 둘을 매개하지만, 과학은 철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즉, 그것은 어떤 설명이 아니라 선언 내지는 선 긋기의 행위로써 하나의 철학적 행위는 '근거 없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철학은 이론 안에서 정치를 표현하며, 정치 안에서 과학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 역설적으로, 이러한 근거 없는 행위는 순수하게 주체적인 것이며 어떤 대상도 가지지 않고 그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대상 없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사유에서부터 우리는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 도대체 대상과 짝을 이루지 않는 주체가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 바디우는 바로 이 알튀세르의 '주체 없는 주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함과 동시에 새로운 길을 탐색한다.


바디우의 사유는 다음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어떠한 존재도 단일한 하나의 통일적 원리 혹은 본질로 규정될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는 '다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리는, 주어진 존재 내지 상황에는 그것에 대한 어떤 규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사건이 반드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바디우에게 있어 주체화는 바로 이러한 사건들의 존재에 대한 승인과 그 사건의 귀결을 구성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건의 귀결이 바로 '진리'이며, 이 과정 속에서 구성된 주체는 역으로 사건의 존재와 그 귀결들에 대한 탐색을 통해 '주체적 행위'로 나아간다. 바디우에게 있어 사건의 존재, 즉 각각의 주체화가 이루어지는 영역은 그 고유한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이 지점으로부터 바디우가 알튀세르의 계승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첫 째, 정치적 사건은 집단적이라는 특수성을 지니게 되며, 여기에서 '집단적'이라는 것은 양적 다수가 아니라 오히려 사건이 잠재적으로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관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진리 구성 그 자체가 '근거 없는' 행위이기에 역으로 그것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관계한다. - 따라서 이렇게 보편적으로 규정되는 정치적 사건은 잠재적으로 모두를 정치적 주체로 호명한다. 둘 째, 존재론적으로 모든 상황은 무한하다. - 그러므로 정치의 고유성은 상황이 가지는 무한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데에 있다. 이로부터 정치의 고유성은 국가보다 일반적으로 상황 상태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국가는 항상 상황 상태와의 관계에서 과잉적 힘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이 과잉적 힘-드러나지도, 측정되지도 않는 힘-을 통해서 상황을 지배한다. 바디우에게 있어 '정치적 사건'이란, 바로 이런 과잉적 힘에 대한 제한이며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자유'라고 부를 수 있다.


분할과 불평등으로부터 평등의 정치로 : 자크 랑시에르


자크 랑시에르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알튀세르와 결별하면서 자신의 논제를 시작하고 있다. 그 핵심이 바로 분할과 불평등의 논리이다. 랑시에르는 알튀세르주의를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구별'이라는 지점으로부터 '분할과 불평등의 논리'라고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스승과 결별한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알튀세르주의란, '정치의 소멸'과도 같은 이야기이다. 알튀세르는 계급투쟁을 역사의 동력이라고 선언하였지만, '호명' 테제로부터 알 수 있듯 정치적 대중 - 계급- 을 수동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정치적 주체화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정치는 불가능한 것으로 남게 되었다. 따라서 정치의 공백을 철학이 메우게 되는 것이다.


통념적으로 우리는 예속과 지배의 관점을 '힘'의 관계에서 바라보지만 이런 힘들의 관계, 의지의 관계에 의해 예속은 규정되지 않는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지배와 예속의 본질적인 분할은 존재론적 분할이다. 즉 사유하는 자와 사유할 수 없는 자의 분할,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자와 가르침을 받아야만 깨우칠 수 있는 자 사이의 분할이다. 진정한 언어와 한 갓 소리의 분할 - 이러한 분할의 논리로부터 지배는 재생산 된다. 역설적으로 랑시에르는 이러한 논리에 기초하여 진보주의를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그가 보기에 진보주의, 즉 학교, 법 등과 같은 제도들을 합리화하고 보편화함으로써 그것에 이를 수 있다는 개량주의적 생각들은 단지 이러한 분할의 논리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며, 그들에게 해방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그저 목표 내지는 이상으로써만 제시될 뿐이었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진보주의자들 - 개량주의자들 - 과 생각을 달리 했다. 그들이 평등, 해방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으며 정치 그 자체로 바라보았을 때 랑시에르는 평등을 정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해방이란, 평등에 대한 긍정을 통해서만 사유할 수 있으며 여기로부터 정치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긍정하라


랑시에르에게 지배자들의 언어는 분할과 불평등의 논리이지만, 대중의 언어는 동등함의 언어이다. 이 평등은 근원적 평등에 대한 긍정이며, 무엇보다도 지능의 평등을 함축하고 있다. 이로부터 랑시에르는 텍스트를 읽어내는 방식의 변경을 제안한다. 랑시에르는 기존의 설명자-피설명자의 관계에서 설명자의 이해를 절대적인 것으로 정초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설명자의 이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못박는다. 즉 지능은 텍스트에 상응하는 또다른 텍스트를 구성하는 '시적 작업'이다. (롤랑 바르트 역시 자신의 저서 <작품에서 텍스트로>에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밝힌 적이 있다.)


이런 점에서 지능은 매우 보편적인 것이다. 이러한 지능의 평등은 논증될 수 없다. 이러한 평등을 신학적 내지는 형이상학적 원리로부터 도출하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논증될 수 없다는 주장은, 한편으로 평등의 논리가 자의적 가정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가능성은 평등을 드러내는 것이다. 랑시에르에게는 바로 이것이 정치이다.


설명의 논리와 지배의 논리가 우리 곳곳에 스며들어 있듯이, 역설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 평등을 전제하고 있다. -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바로 이 분할의 언어들은 이러한 지배 관계에서 그 기반에 놓여있는 '근원적 평등'을 은폐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정치는 바로 이 '근원적 평등'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요컨대, 주어진 질서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질서와 세계를 가능케 하는 또 다른 사유를 구성하여 대립시키는 것이 정치인 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정치란 서로 다른 '힘'의 대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의 대립이다. 이것을 랑시에르는 '불화'라고 부른다.5


이러한 정치는 '말의 무대'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이 무대의 성립 여부 그 자체이다. 이 무대의 구성 자체야말로 불평등의 논리에 대한 전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말할 자격이 있는가,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말로써 인정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논의할만한 주제인가라는 지점이 주요한 논점이 된다.


민주주의로부터 정치로, 그리고 주체로!


이렇게 정치란 평등의 실험으로써 이해되는 한에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된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어떤 체제나 제도로써 합리화되고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핵심은 대중의 정치 참여이다.


민주주의 정치의 주체로써, 귀족과 군주가 내세우는 자격들과는 다르게 데모스, 즉 대중은 그 어떤 자격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특별한 자격이 '없다'는 그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얻게 된다. 자신의 몫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몫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규정들로 제약 받지 않으며 이 고유한 자격인 '자유'는 모든 종류의 분할을 넘어서게 된다. 대중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전체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보편성을 실천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분할의 논리를 넘어섬으로써, 그리고 그것의 근원적 평등을 드러냄으로써 진정한 정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밝혀준다. 이 점에 의해, 랑시에르의 사유는 우리에게 '인권에 대한 재전유'로써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종합 : 보편성의 정치로 - 그리고 비판


바디우와 랑시에르는, 그리고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에티엔 발리바르, 이 세 철학자들은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통해 '보편성의 정치'를 구성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만나고 있다. 바디우는 사건의 존재론을 통하여 '보편적' 주체의 구성을 역설하였고, 랑시에르는 분할의 논리를 넘어서는 근원적 평등에의 정치를 통하여 진정한 보편성의 원리로써 민주주의를 역설하고 있다. 동시에 이 둘의 기획은 해방으로써의 정치를 정초하고자, 맑스주의자 본연의 그 모습들을 가감없이 드러내주고 있다.


정치는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통념적으로 우리에게 정치는 단순한 힘의 대립 내지는 법과 제도의 관리와 수정 따위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는가? - 물론 그것 역시 '정치'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정치, 나아가 진정한 '해방'을 위한 정치에 대한 사유는 이제껏 우리에게 제대로 허락되지는 않은 것 같다. 정치는 텍스트의 재전유이며, 텍스트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정한 '말의 무대'는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는 그저 '지루한 것'으로 치부되었으며 더욱이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여 그저 화면 상에서 잠시 잠깐의 스크롤만으로 휙 내려버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 '정치적 피로감'은 바로 여기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정치의 생산이 아닌, 정치의 소비가 우리로 하여금 피로감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박근혜 물러가라"만 외치는 것이 정치는 아니라는 소리다. - 그러나 단순히 구호 몇 마디만으로, 그리고 투표 몇 번만으로 '정치'가 이루어지는 줄 '착각'하는 이들이 많이 보인다.


이제까지 루이 알튀세르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주체'를 중심으로 정치가 어떻게 새롭게 사유될 수 있는지, 그리고 맑스주의가 어떻게 새로운 사유로써 정초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조금은 긴 글이었지만 우리에게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그것을 위한 맑스주의자들의 사유의 흔적들을 훑어봄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의 이 글이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 글들 역시 책 내용의 단순한 요약에 불과하며 가능하면 책 원문을 찾아보기를 권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통해 접해보지 못했을 새로운 사유들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할 것 같다.

  1.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포스트-알튀세르주의자들>, p.334 [본문으로]
  2. 같은 책, p.334 [본문으로]
  3. 알튀세르는 자신을 구조주의자로 보는 평가에 정면으로 반박하려고 한다. 우선 구조주의는 구조에 대하여 형식적으로 추상적인 조합으로 보는 반면 자신은 실재의 구조를 유기적인 결합, 즉 '접합'으로 본다는 것, 나아가 자신은 구조에 대한 과정의 우위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대하여 구조주의적 사고 방식은 그것을 소화할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본문으로]
  4. 같은 책, p.353 [본문으로]
  5. 같은 책, p.36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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