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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E.라클라우, 샹탈무페 - 모순으로부터 적대로?
게시물ID : sisa_4409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8
조회수 : 154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9/24 01:37:23

먼저 나의 이 글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람들이 집필한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오월의봄 출판)를 부분적으로 요약, 재구성한 글임을 밝혀둔다. 일전에 썼던 비평 포스트들 역시 이 책을 요약, 재구성한 것이며 따라서 이 글을 읽을 때 독자분들은 위의 책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각 인용문들은 각주를 통해 제공될 것이다. - 필자 주


Written by 무명논객


포스트주의의 어떤 사조


우리가 "맑스" 혹은 "맑스주의"를 언급할 때마다 통념적으로 받게 되는 비판 중 하나가,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실패한 사상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시작하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이 곳이다. 바로 포스트주의의 어떤 사조 -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 정확히 말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새로운 맑스주의적(혹은, 이제는 "맑스주의"가 아닌 "변혁적" 사상으로 불리워야 할지도 모르는) 사유를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포스트-맑스주의자들의 대표주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궤적을 좇아가기 위해 몇 가지 명제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시기 맑스주의자들은 두 가지 전환점으로부터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과 더불어 현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들(예컨대, "변혁적 정치는 불가능하다"라고 단정짓는 것) 사이에서 맑스주의자들은 새로운 정치적 기획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와 그에 귀속되는 모든 사상적 조류들에 대하여 '본질주의' 내지는 '총체성' 따위로 규정하며 그것을 '다원성'과 '해체' 등의 단어로 대체하고자 하였다. 맑스주의 역시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은 두말 할 나위 없다.


맑스주의의 기본적인 언어는 모순관계에 의해 재정의될 수 있다. 이러한 모순관계는 몇 가지 논제를 제출하고 있다. 첫 째는 대립항 중 어느 한 항의 소멸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전개될 수 없다는 것, 둘 째, 모순관계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로써 사회에 내재하는 다양한 갈등들은 바로 이러한 모순의 다양한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 이러한 전제 안에서 맑스주의는 노동계급을 보편적 계급으로 올려두었으며, 따라서 이 노동계급에게는 자신들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선험적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조금 '폭력적'으로 이를 언급해보자면, 노동계급이 자본가 계급을 폐지하고, 나아가 계급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


난무하는 각종 포스트-주의들은 이러한 계몽의 어법에 대하여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이러한 언어들을 다른 방식으로 대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후기-자본주의 사회로 이르러 몇 가지 비판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중 가장 당면한 문제가 바로 '정치의 소멸'이다. 오늘날 시민사회는 다변화되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구조 안에서는 그 어떠한 근본적인 정치적 기획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렸다.2


그렇다면, 정치는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라클라우는 여기에 대해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제 아무리 여러 형태의 갈등들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관리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해소되지 않는 지점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적 적대'이며, 우리는 이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되살릴 단서를 찾게 되는 것이다.


맑스의 폐기, 혹은 재구성?


라클라우는 기존의 포스트-주의자들과 비슷한 선상에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그에게 "맑스주의"란 그 자체로 이미 현실과 괴리된 사상이었다. 즉,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맑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모순관계'로써 정립된다. 라클라우가 보기에 이는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동시에, 이러한 비판의 틀을 유지하며 라클라우는 자신의 이론을 상당 부분 자유주의로 회귀시킨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주요한 논의는 바로 이러한 모순관계를 '적대'로 치환할 것을 제안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이들이 제출한 논제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모순 관계를 폐기한다는 지점으로부터 라클라우는 맑스의 주요 논거를 기각하였다. - 도대체, 모순관계가 사라진 유물론적 변증법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둘 째로, 두 대립항의 가장 본질적인 관계를 기각한다. 즉 A와 B가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으로 대립관계에 있지만, 라클라우에 의하면 이 둘 사이에 '본질적인' 관계란 없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특정 대립관계에서는 그 어떤 항에도 특권이 부여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A와 B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대립할지는 몰라도 페미니즘에 대하여서는 두 사람 모두 우호적일 수도 있다. 어떤 존재 규정도 이 둘의 관계에 대하여 '근본적인 것'에 대해 규명할 수 없다는 것이 라클라우의 '적대'의 논리였다. 따라서 이들에게 해방의 과업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보편적' 노동계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이들은 사회를 '총체성'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3 이들은 사회를 어떤 하나의 고정된 명사로써 "사회"가 아닌, 우연적이고 우발적이며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각 요소들이 결합한 "사회적인 것"이라 부를 것을 제안한다. 이들은 이 개념과 관련하여 알튀세르의 "중층결정" 개념을 끌어다 설명하고 있다.4 만일, 사회를 하나의 '본질적인 것'과 그것의 다양한 표상인 '현상'으로 이해하게 되면 사회의 다양하고 우발적인 상황과 사건을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라클라우는 이러한 전제 아래에서 사회적 관계에 대한 표상을 '매개'가 아닌 '접합'으로써 설명하고자 한다.


새로운 전략?


이 쯤 되면 이들을 과연 "맑스주의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미 이들은 상당 부분 포스트주의 사조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또한 다원주의-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의 이론적 개량 혹은 타협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대안을 위하여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의 재전유를 통한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는 데에 착수한다.


라클라우와 무페에게 헤게모니란, 전통적인 맑스주의와 그것의 역사적 실천 간의 괴리로부터 '발견'되는 것이다.5 그람시가 자신의 저서 『옥중수고』에서 헤게모니를 언급하며 '진지전', '기동전' 따위의 단어들을 사용했음을 상기해보자. 이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는 맑스주의가 역사적 실천을 감행할 때 발생하는 공백들로부터 괴리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로자 룩셈부르크가 언급했던 '자생설'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로자의 자생설은 노동계급이 자연스럽게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인 "대중파업"으로부터, 이러한 변혁적 행동이 파급효과를 발생시켜 자연스레 정치적 변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6 그러나 이러한 로자의 자생설은 당대 독일의 현실과는 맞지 않았다. 요컨대, 혁명적 주체로써 선험적으로 결정된 노동계급의 '통일성'은 다양한 상황과 우발적인 사건 전개와 맞물리며 증발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괴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페에게 헤게모니란 바로 이러한 틈새들을 메우는 과정에서 '출현' 내지는 '발견'된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이러한 헤게모니의 계보를 훑으면서, 맑스주의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봉합할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을 내세우고자 한다. 그람시는 일찍이, 자신의 저서인 『남부 문제에 대한 수고』(1926)에서 연합체계를 만드는 데 성공하여 대다수의 노동 인구를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국가에 대항하여 동원할 수 있어야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지도적이고 지배적인 계급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7 헤게모니는 더 이상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지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클라우와 무페는 그람시마저 그가 경제적 토대라는 족쇄에 잡혀있다고 비판하며, 경제를 포기해야만 진정한 헤게모니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 그 대안으로 라클라우와 무페는 '급진-민주주의'를 제시한다. 이들에게 맑스주의란 곧 경직된 것이었으며,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사회주의 전략'으로써 급진-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다소 어중간한 테제를 제출하게 된다.


그 후


라클라우와 무페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만개로 인한 진정한 의미의 '정치의 소멸'이라는 현주소, 다시 말해 다변화된 시민 사회 안에서 그 어떤 근본적인 정치적 기획도 불가능하며 모든 종류의 갈등이 의회와 행정부의 관리 아래로 들어가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 '정치'라 불리우는 환상을 깨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즉 라클라우와 무페는 "사회는 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하여 이론적 논거들을 제공하였고, 그것이 곧 "적대의 논리"가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점은 남는다. 과연 우리가 "계급투쟁"이라는 정치적 전망, 좌파적 전망을 포기할 수 있는가? - 물론 이것은 좌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혹자가 보기에 라클라우는 그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굴복해버린 이론주의자 나부랭이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가 새로운(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사실 그렇게 새로운 기획이라고 볼 수는 없는) 헤게모니 전략으로써 "급진 민주주의"라는 테제를 제출했을 때, 그것의 애매모호성은 둘 째치고서라도 그것이 '정치적 기획'으로써 얼마나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너무나도 의문스러운 질문, 그러나 너무 간단한 질문으로 이 글을 끝마치고자 한다. 라클라우는 맑스주의자인가?







  1.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포스트 맑스주의 - 맑스주의의 재구성인가, 해체인가」, p.415, 오월의봄 [본문으로]
  2. 이 부분에 관해서는 박가분님의 포스팅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http://blog.naver.com/paxwonik/40107152390) [본문으로]
  3. 같은 책, p.420 [본문으로]
  4. 같은 책, p.313~316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5. 같은 책, p.427 [본문으로]
  6.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생설"에 관해서는 토니 클리프, 『로자 룩셈부르크』를 참조할 것. [본문으로]
  7. 같은 책, p.43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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