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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극우, 파시즘의 준동과 어리석은 민주주의에 부쳐
게시물ID : sisa_4420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6
조회수 : 42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9/28 03:46:40

나는 한 페이스북 페이지의 댓글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칭 '교육 받은 이들'의 머리와 입에서 나올만한 언어라고는 여기기 힘든 단어들이 당연한 양 나열되고 있었고, 그러한 '무지함'이 그저 단순한 문자적 저열함이 아니라 집단적인 망상에의 구속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나는 이 짧은 글을 통해 그러한 집단적 망상증에 대한 몇 가지 '의미 없는' 비판을 해보고자 한다. 자신들의 천박함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그들(자신을 '민주적 엘리트'라 생각하는 냉소주의자들)에게 이 글을 헌사한다. 


Written by 무명논객


정치의 소멸로부터


나는 소위 '자유민주주의의 완전한 승리'라는, 어처구니 없는 테제에 대한 기각으로부터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물론, 자유민주주의는 승리했다. 현실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를 통하여 우리는 또 하나의 전체주의의 붕괴를 바라보았고, 전체주의자들의 '통렬한 실패'를 통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보았다. 민주주의-반민주주의(전체주의)라는 통념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말이다.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전체주의일 뿐이지!" 기존의 우리의 생각은 이러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민주주의라면, 그 민주주의는 정치적인가? 지금, '승리한'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에의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나아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체주의"의 비판자들은 민주주의 위에서 사유하고 있는가? 이 글에서 나는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비판하고자 한다. 첫 째는 자신을 '선한 민주주의자'라 부르짖는 이들이, 전체주의에 대한 맹비난을 통해 스스로를 강박적으로 재확인하고자 하는 작업을 비판할 것이고 둘 째는, '정치의 배제'로부터 발현되는 폭력적 징후들이다.


애석하게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정치의 확장과 '정치적인 것'의 치열한 갈등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의 소멸'이다. - 우리는 투표를 하고, 정치인을 비판하고, 법을 개정하기 위한 여러가지 운동을 벌이지 않는가? 정치의 소멸이라니? - '정치의 소멸'이라는 테제는 분명히 도발적이다.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는 아주 위험한 언어로도 들릴 것이다. -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이렇다. 그래서 어쩌라고? 분명히 말해, '그러한 것들'은 '정치'이기 이전의 '정치적인 것'조차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가상'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정치'의 차원을 단순한 조정-협상 가능성을 지닌 것, 즉 '통제될 수 있는 것'으로 매우 협소하게 제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또다른 '정치적인 것'의 제거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며, 다른 한편으로 '정치의 불가능성'에 대한 언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관리-조정을 통한) 정치를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라는 환상이 널리 퍼져있는 것이다.('우리=하나'라는 공식을 너무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들에게 이러한 사유의 전개는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적 절차와 합리적 결정을 통해 사회의 갈등을 해결할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의 '정치'는 발전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통념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유틀 속에서 치루어야 할 대가는 '조정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추방과 배제이며, 이러한 배제가 잉태하는 폭력과 또다른 분열이다. -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분열자들을 향해 이렇게 도발한다. "이 반민주주의자들!" 이러한 도발들은 조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의 적대와 그 '공백'들을 향한 '구멍마개'에 불과하다.1 이런 의미에서 '통일성'을 향한 모든 열망들은 완전히 '반정치적인 것'이라 규정할 수 있으며, 정치의 소멸을 재촉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2


어떤 민주주의자들


누군가는 우리 사회를 향해 '정치의 과잉'이라고 이야기를 하며, 그 예로 민주주의를 찾는 이들의 다수성을 들곤 한다. 혹은 이것을 '민주주의의 과잉'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를 찾는 이들이 많은 만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미래는 참으로 밝아보인다. - 실로 현명한 지도자가 배출된다면, 우리 사회의 성숙한 민주주의는 아주 완벽한 전체주의를 낳을 것이다! - 나는 이것('민주주의의 과잉'이라 표현되는, 민주주의라는 기표)을 향해 '기괴한' 혹은 '역겨운'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고 싶다. - '전체주의'를 향한 맹비난들을 통해 그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로 규정하고자 한다. 전체주의적 우중들을 민주적 시민으로 훈육하겠다는 발상은 이로부터 기원한다. 그러면, 나는 소위 이 '민주주의자들'에게 두 가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전체주의란 무엇이며, 도대체 그것이 어찌 하여 나쁘다는 말인가?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이 글에서 전체주의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주의'에 대한 비난으로 표상되는 자유민주주의의 어떤 징후들을 포착하기 위함이다. 지젝에게 있어 전체주의란('전체주의'라는 딱지가 붙어있는 곳)─자유민주주의라는 역사적 헤게모니 블록 속에서─우리 시대의 '증상'이 발현되는 곳이고, 상상적 동일시에 금이 간 곳이며, 상징계의 적대적 균열들이 나타나는 곳이다.3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의 대립물로써 신화화 되었지만, 사실상 그것이 민주주의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딜레마를 은폐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한 셈이다. - 아주 간단한 사실들, 즉 전체주의의 반대말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 개인주의라는 사실들을 통해 "자유주의, 개인주의가 반-민주적일 수 있다"라는 사유 자체를 배제 당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민주주의를 위한 전체주의와의 숭고하고도 장구한 투쟁의 세월이 사실상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위한 대리전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체주의'라는 딱지─민주주의자들에 의해 규정된 그것─를 떼어놓고 본다면, 사실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안에 존재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대립들과 적대들의 존재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적은 '전체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장하고 있는 '민주적 형식' 그 자체이다.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적대의 접합들을 향해 이 민주적 형식은 아주 가볍게 일갈한다. "투표하라!" 그리하여 정치는 소멸되고 그러한 '빈 공간'으로부터 '반정치적인 것'들의 새로운 접합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말의 무대'는 사라지고, 투표행위만이 유일하게 정치적 주체의 표현임을 감안해보면, 이러한 '출구가 제한된' 민주주의는 경제위기와 함께 파시즘과 쉽게 접합될 가능성을 안고 있음에 틀림 없다. 만약 파시즘이 민주주의가 만날 수 있는 최대의 파국이라면, 그 파국의 동조자들은 아마 '전체주의'를 향해 맹비난을 하던 '민주주의자들'일 것이다.─ 이미 소멸된 정치로부터,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뭐가 어때서? 먹고 살 수 있으면 됐지!"


정치철학으로부터─현상으로


상기의 모든 정치철학적 논의들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극우적 광기, 파시즘의 표현이 과연 어디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며 그것의 가장 근본적 속성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광기의 두 가지 표현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었다.─ 소위 '깨시민', 그리고 '일베'가 그들이다. 나는 그들의 집단적 광기와 망상으로부터 징후적 표현들을 읽어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강박적 도착이 그 첫 번째이며, 환상에 대한 집착이 그 두 번째이다. 물론 과학적 규명으로 이 두 집단은 완전히 상이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으나, 현상적으로 이 둘은 충분히 동일성의 논리 위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상징으로부터의 종속"이다. 이데올로기의 온전한 제 작동을 위해서는, 명시적 법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향락과 연관되며 일련의 명문화되지 않은 외설적 법들이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지탱해주는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것들을 "법에 달라붙은 외설적 보충물"4이라 부른 바 있는데, 쉬운 예를 들자면 1930년대 중반 소련의 '스탈린 비판 금지'라는 법이다. 이 당시 스탈린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소련에서 금지되어 있었다.(명시적인 법) 허나, 이 법을 지탱하고 있는 '외설적 보충물'로써의 '명문화되지 않은 법'은 스탈린을 비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5 국가를 비롯한 사회 체계 역시 하나의 상징계로써, 이러한─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의─국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것을 지탱하는 법률들과 의회의 존재이다. 그러나 이것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금지'는 그것들이 단지 '상징적 규제'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들을 폭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치'에 기초한 상상적 동일시의 간극을 폭로하는 것은 '반역행위'이다.─그리고 그것은 '반민주적인 것'으로 낙인 찍힌다.(개인적으로 나는 이러한 형태의 행동들에 대해 '반민주면 어때서?' 라고 냉소하고 싶다.) 위에 언급한 두 부류는 이 상징으로부터 철저히 종속관계에 놓여 있다.─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강력하게 '긍정'한다. 그것은─변화의 힘이 자신들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로부터 비롯하는─ 냉소의 표현이기도 하며, 발현의 양태는 다르지만(예컨대, '일베'는 이러한 냉소의 표현으로써 종종 이렇게 말한다. "좌경 용공세력을 박멸합시다!") 둘은 동일자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냉소로부터, 오히려 역설적으로 "정치에의 종속"이 나타난다.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형태이지만 이 둘은 다른 차원에서 '정치'를 호출하고 있다. 하나는 자유주의적 프레임 속에서의 개량의 형태로, 다른 하나는 완전히 반-정치적 입장으로써 배제와 증오라는 외상적 징후의 형태로.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정치적'으로 표현하고 접합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기저에 작동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외치는 '정치적 다원성'과는 다르게 '정치적 파국'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어쩌면 그들에게 이미 모든 '정치적인 것'들은 소멸되었으며 그렇기에 그러한 파국으로부터 각자의 방식으로 정치를 호출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그들이 내세우는 의제가 정치적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무엇이 파시즘이란 말인가? : 민주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말은 많지만 정작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지지부진하며 올바른 민주주의 담론에 대한 정치철학적 논의가 부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러한 사유의 전개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그저 우리는 기존의 틀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며 '합법적'인지를 논하는 것이 고작이지 않은가? 다시 말해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선험적 틀로써 기존의 체제로부터 탈피하는 근본적 사유는 사실상 '이단아' 취급 받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는 파시즘을 외상적 증후군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것은 '정치의 소멸'로 인한 배제된 자들의 증오의 표현이며, 어떤 새로운 정치적 기획도 불가능하다는 절망적 표현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들은 상징계에 몸담고 있는 자신을 강력하게 긍정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민주주의자'라는 선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끊임 없이 재-확인 하기 위해 '전체주의자'들에 대한 맹비난을 하고 있다.─유겐트는 체제에서 '가장 선한 자'들로써 체제의 '이단아'들을 색출하기 위한 기구였다. 이렇게 놓고 보면 히틀러가 '민주적'으로 당선된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나의 이 글은 비록 전체주의에 대한 고찰서가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파시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지만, 다만 이러한 '의미 없는' 비판들을 통하여 파시즘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 민주주의, 정확히는 우리가 통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틀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그 대립물로써 '전체주의'라는 딱지를 거두어 들이며 나타나는 적대의 가장 극단적 표현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을 뿐이다. 파시즘에 대한 수많은 과학적 정의들과는 다르게 내가 일베와 깨시민에 대하여 이러한 정의를 내린 이유는 거창한 근거들을 제외한다면 단 하나 뿐이다. 이들은 너무도 성급하게 자신의 욕망을 정치화하고자 한다. 그것이 이들이 보이는 폭력적이고 외설적 행동들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1. '구멍마개'라는 단어는 지젝이 자신의 저서<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서 즐겨 사용한 단어다. [본문으로]
  2. 샹탈 무페, 『정치적인 것의 귀환』, p.183-184 참조. [본문으로]
  3. 슬라보예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 p.418 「옮긴이 후기」 [본문으로]
  4. 미하일 리클린, <해체와 파괴>, p.276 [본문으로]
  5. 위의 책, p.277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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