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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무서웠던 순간의 기억들2
게시물ID : panic_591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개란후라이
추천 : 16
조회수 : 2132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3/10/22 07:51:47
  
잠이 안와서 마저 쓰려합니다. 재미는 별로없지만 실화라는것...실화는 픽션만큼 재미는 없어요. ㅎㅎ

아 그리고 아지와 하얀별장 얘기는 이미 쓴적있어서 다시 안썼고요. 학원에서 떨어진건 후에 꿈얘기가 이어져서
짧게 적었습니다.

<고3>
1. 사고후에 기말고사를 보러 교실에 갔을때 반 친구들은 날보고 너무나 놀라했다.
   4개월간 입원해 있으면서 학교에 내가 죽었다더라, 자살했다더라. 하는 헛소문이 퍼진것이다.
   여고라서 그런지 별 쓸데없는 관심들이 많았다. 정작 나는 중간고사를 목발짚고와서 보건실에서 봤었는데.
   죽었다니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고3 스트레스 풀겸 내 얘길 들먹인 것이겠지.
   담임은 입원하고나서 얼마안있다가 한번 들렸었다. 그리고는 입원기간과 시험을 어찌할 것인가를 물었다.
   병가를 내게되어도 기간이 길어지면 유급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방도를 찾은것이 시험을 보는 것이었다. 다른 때도 아니고 고3인데 학교를 유급하고 1년 더 다닐순
   없지 않겠냐며 시험기간엔 보건실에와서 시험이라도 본다면 출석일수는 자기가 알아서 해보겠다고 했다.
   도덕선생님이었던 담임이 그런말을 하니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이러니 하기도 했다.
   성적은 썩 좋지 않았다. 예체능 과목에 실기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특히 미대를 가겠다는 애가
   미술실기점수가 0점인 상황...필기시험을 만점 받는다고해도 필기는 고작 40점만점 이었다.
   1학기 기말고사를 보고나서 난 재수를 결심했다.
  
   
<첫직장>
1. 재수할당시 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이땐 책 대여점이 성행할 때라서 공부도 하며 얼마라도 용돈벌이겸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책방 알바는 알바중 최고였다.
   그러다 재수가 실패하고 책방 사장님의 소개로 한 간판회사에 취직하게되었다.
   (굳어버린 손과 뒤늦은 공부는 미대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석달간 인턴으로 일하다가 정직원이 되는 시스템이였는데 초봉이 70이었다.
   일하시던분이 유학을 가려고 사람을 구하는데 영 안구해져서 급하게 구하다보니 내가 미술도 했다고 하고,
   일도 잘하고 성실하다고해서 이력서를 제출하고 바로 출근하라고 했다.
   하지만 일하다보니 책방에서 해봐야 수기로 매입매출장 적는게 고작이었는데 경리도 봐야하고 컴퓨터 작업을
   해본적도 없었는데 일러스트도 해야하고 지금생각하면 정말...이건 아니다 싶은곳이었는데 나는 그곳을 꽤
   오래다녔다. 그래도 월급은 잘 올려줘서 그남아 할만했었다. 그만둘때는 150을 받았으니 3년만에 70에서 150으로
   오른것은 괜찮은 급여였기에 아마도 참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다 내가 오한이들고 감기 몸살이 들었다. 한여름에 기름난로를 틀어놓고 일을 해야만 했다.
   디자인을 빼서 커팅기로 넘겨 시트지를 커팅해서 인부들에게 넘겨줘야 일이 시작됐기 때문에 집에갈수 없었다.
   간판이라는것이 다는 날짜에 제대로 달아야하는것이라 뒤로 미룰 수도 없었고 회사에서 커팅기를 다루고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었기때문에 한여름에 오들오들 떨면서 난로를 틀어가며 일을 했던 것이다.
   그때 사장이 끝내면 집에 차로 데려다 준다고 했기 때문에 버텨가며 할 수 있었다.
   일이 끝나고 열이나며 아픈몸을 끌고 사장이 태워다줘서 집에 가고있는데 사장이 거래처 전화를 받고 내리라고했다.
   그길은 버스도 다니지않았으며 시간또한 늦은 밤이었다.
   집에 데려다 준다 하지 않았냐고 하자 자기가 지금 급하게 가봐야해서 그러니 내리라고 다 너 월급 줄려고 그러는거
   아니냐며 다그쳤고 나는 그 길 한복판에 내려졌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 가는데 20분을 걸어야만했다. 나는 택시를 타고 집에가며 울며 엄마에게 택시비가 없으니
   가지고 나와달라고 말했고 엄마가 나와 택시비를 냈다. 그리고 난 방에들어가 쓰러졌고 다음날 회사에 나가지 못했다.
   엄마가 회사에 전화해서 오늘 애가아파서 못나갈것 같다고 하니 사장이 급하게 끝내야 하는 일이있는데 왠만하면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그래도 몇년간 같이 얼굴보며 한솥밥 먹은 사이인데 애가 아파서 회사에 못나갈 상황인데
   돈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며 서운함이 커졌다.
   내가 일어났을때는 오후가 다되서였는데 그때 사장에게 전화해서 아파서 지금 일어났다고 오늘 못나가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장이 버럭 화를내며 그럴거면 다 때려치우라고 너때문에 오늘 얼마가 날라갔는지 아냐고 화를내며.
   고등학교밖에 안나온거 데려다가 일시키고 월급주니깐 간이 배밖으로 나왔다며 소리쳤다.
   그래서 내가 어제 사장님이 집에만 데려다 줬으면 이렇게 아프진 않았을것 아니냐고 말했떠니 잘만 걸어갔으면서
   잘 갔으면 된거 아니냐고말해 너무 화가나서 알겠다고 난 그만둘테니 다른 사람 알아보시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과장님이 집앞에 와서 회사에 가자고 했다. 내가 안간다고 하니 지켜보던 아빠가 내 뺨을 때리면서
   정신차리라고 사회라는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시며 그만두더라도 회사 돌아가는데 지장없도록 해야한다며
   후임자를 구할때까진 다녀야 한다고 하시며 과장님차에 날 태우셨다.
   어릴때부터 몸이 약했고 이런저런 일들도 많았기에 아빤 나에게 손지검 하신적이 한번도 없었다.
   혼내실땐 회초리로 겁만 주시던 분께 뺨을 맞고나니 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정말 이렇게 하는것이
   맞는것인지 구분할수 없었다.
   회사에가서 사장과 얼구도 마주하지않고 내 할일만 하고나서 퇴근후에 집에오니 아빠가 하루종일 회사도 안나가고
   잘 드시지도 않던 소주를 드시다 잠이드셨다는걸 엄마를 통해 듣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내게 아빠가 너 가고나서 엄청 우셨다고 말해주었다.
   사회란 그런거다. 내 몸이 아파 부서져도 쓰러져도 그들 보는앞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한이 있어도 일해야한다.
   그래야 대접받는다. 홀로 아픈것은 알아주지 않는다. 너 하나로 인하여 큰돈이 오간다면 그 책임은 더 크다.
   주무시다 깨신 아빠가 나를 앉혀놓고 맥주를 마시며 하신 말씀이다. 아빠 말씀을 듣고 그회사를 사람이 구해질때까지
   넉달을 더 다녔다. 경리일과 디자인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을 구했지만 구해지지않았다.
   결국 경리와 디자이너를 따로구했다.
  
   그리고 난 고졸을 면하기 위해 대학을 오게되었다.
 
 
 
 
 
이 뒷글은 대학을 오게되고 여러가지를 배우게 되어 좋았다 교수님 사랑해요 머 이런내용이라 옮기지 않을께요 ㅎㅎ;
 
다 옮겨 적으려고 했지만... 레포트 제출용이었기 때문에 실명도 막거론되고... 저의 너무도 아픈 것까지 들춰내게되서
 
짤라먹은것들도 있어요. 성인이 되어서는 무서운것보다는 아픈일들이 많았기에 무서운거만 올렸습니다.
 
긴글 잃어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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