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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기억을 전유하기 위하여 -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게시물ID : sisa_4487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10
조회수 : 32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10/29 23:41:18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Written by 무명논객



I. 서문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몇 가지 드는 의문점이 있었다. 책 내용들보다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보다도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5권의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문제에 천착하였으며, 이 글 역시 내가 생각하는 주제, 즉 5권의 책(<1984>, <로드>, <포>,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관통하는 하나의 지점으로부터 발견되는 사유를 추적해볼 생각이다. 비록 이 글 형식이 다소 거칠고 어지러울 수 있으나, 이러한 작업이 오히려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기억”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정확히 말해, 우리의 기억이 어떻게 사유되고 어떻게 인식되며 어떠한 방식으로 발현되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기억하는 것, 그리고 기억함으로써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능력 중 가장 탁월한 능력이며 우리의 기억은 때로는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가끔 진실을 수면 위로 띄우기도 한다. 조작된 기억이란 아름다운 환상을 가지게 하지만 기억함으로써 얻어내는 진실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적어도 ‘기억’이라는 단어에 관한 한, 우리의 모든 일상은 기억에 지배되고 있으며 인류 역사까지도 기억 속에서 재현되며 표상된다고 할 수 있겠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인간의 잔인성의 끝을 보여주었고, 스탈린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는 끔찍한 감시와 탄압이 자행되었다.—사실, “나는 알고 있다.”라는 말만큼 기만적인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의 말,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허위적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인류가 생산해낸 방대한 지식을 당신이 알고 있다고? 웃기는 소리!


현대인들에게 기억이라 함은 양면성의 그늘이다. 그것은 “나는 알고 있다.”를 명시적으로 언급해주는 기록 장치의 역할임과 동시에 “나는 알지 못한다.”라는 것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기억은 언제나 조작되고, 잊혀지고, 다시 기입됨으로써 기이한 형상을 띄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음과 동시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알지 못하므로 더욱 알게끔 개척해야 한다는 계몽적 파토스가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기억의 조작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사유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우리의 기억이 어떻게 조명되고 어떻게 사유되고 있는지를 5개의 책을 통해 알아볼 것이다. 단편적 사고들을 정리하기보다, 5권의 책을 관통하는 어떤 ‘공통된 것’이 있다면 바로 ‘기억’에 관한 사유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공통된’ 어떤 것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라 확신한다. 그 연결고리를 찾아냄으로써 보다 유기적이며 독창적인 작품 독해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II. <1984> : 기억은 조작된다.


조지 오웰의 작품 <1984>는 극한의 전체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의 기억이 어떻게 통제되고 조작되는지는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어떻게 지배되며 그 지배양태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정치학의 오래된 연구 과제이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은 전혀 새로운 지배 양상을 보여주고 있음에 틀림 없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철학적 사유가 요청되는 시대”라며, 단순히 현상에 대한 분석만을 할 줄 아는 전문가들이 얼마나 무력한지 폭로하고 있다.


대체 누가 지배받기를 원하는가? 자유야말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이며 가장 본원적인 가치가 아닌가? 자유주의 사상은 인간이야말로 자유로운 존재라는 선언을 함으로써 그 가치의 절대성을 설파하였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은 전혀 다른 디스토피아를 묵시적으로 말해준다.—“자유가 대체 뭔데?”—인간의 가장 오래된 가치이자 본질적인 욕망으로써 절대적 진리의 위치를 구성하고 있던 ‘자유’는 이제 얼마든지 팔아넘길 수 있는 상품이 됨과 동시에 ‘자유의 헌납’ 역시 가능하게끔 하였다. <1984>는 정확하게, 자유롭던 인간이 자유를 스스로 헌납한 채 전체주의 체제에 동조하게 되는 인간의 비극을 그려내고 있다. 그것도 과학기술의 힘으로!


이러한 ‘새로운 지배 양식’은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탄생하였다. 과거는 기억될 수 없으며, 인간의 모든 본능과 기억이 억제된 것이다. 정확히 말해 ‘기억’은 독점되었다. 당에 의해서! 그리고 조작된 기억에 의해 통제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유를 헌납하였다. 기억은 더 이상 인간 공동의 것이 아닌 것이다.—이러한 현상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쉽게 볼 수 있는 양상이다. 생각해보라, 만약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에 대한 기억을 누군가 독점하고 있다는 상상을!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끔찍한 것이지만 사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서서히 조작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기억이 ‘공동의 것’이어야만 인간의 이성은 특유의 그 반성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며, 기억이 누군가에 독점되는 그 즉시 인간은 노예 상태가 된다. ‘나’의 기억은 ‘나’ 혼자만의 것일 수 없으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너’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즉 기억은 ‘나-너’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공통의’ 것이며, 이러한 기억의 속성이 인간 사이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통로인 셈이다. 인간은 기억함으로써 내일을 기약하고 어제를 회상하며 오늘을 반성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기억이야말로 주체성의 근원이며, 사유의 근본은 ‘기억’에서 비롯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통제되고 조작된 파편이 어지럽게 주입된 기억 속에 주체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설 <1984>에서 눈여겨 볼 지점은 윈스턴 스미스가 일기를 쓰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일기를 쓴다는 것, 그것은 언어 행위이자 동시에 기억하고자 하는 행위로써, 그것은 당에 의해 지워진 과거에 대한 회상과, 당에 대한 저항의 의미 이전에 당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기억들이 지워낸 ‘주체’의 자리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다. 주체성이 회복되는, 그러나 절망적으로 끝나고 마는 그 자리에 윈스턴 스미스가 있으며 결국 윈스턴 스미스는 빅 브라더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과 함께 비극적으로 산화한다. 기억이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얼마나 비극적인가?


III. 로드 : 기억의 역설


이번에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겠다. 소설 <1984>에서 인간의 기억이 조작되는 절망적인 상황을 보았다면, 미국 현대 문학의 거장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에서는 인간의 기억이 어떻게 그들에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는지를 비추어볼 것이다. 기억은 과거를 돌아보게 하지만 미래를 알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기억한다’라고 함은 과거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의 명제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의 명제를 같이 포함하고 있다. ‘기억하고 있음’은, 나 자신이 과거에 존재했다는 것을 방증해주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내일을 기약해주지 못하므로 공포를 자아내는 근원이다. 한 때 “사노라면”이라는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그 가사는 이렇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사실 이 노래에서, ‘내일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대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것은 ‘어제’가 있었다는 기억으로부터 추론된 불확실한 명제이며 따라서 내일이 있을 것이란 희망의 근거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불확실성의 명제는 ‘오늘’을 살아감에 있어 의미를 부여하는 기제를 담당하며, 내일의 불확실성이야말로 ‘어제’의 기억보다 확실하게 ‘현재의 존재’를 보증해주는 확실성이다.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이러한 명제들을 멋지게 조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제’의 존재를 근거로 ‘오늘’을 살아가는 존재이며, ‘내일’의 불확실성에 기대어 ‘현재’의 존재를 보증하는 자들이다. 소설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은 매우 눈여겨볼만 하다.


할 일의 목록은 없었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 날. 시간. 나중은 없다. 지금이 나중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슬픔과 재 속에서의 탄생. 남자는 잠든 소년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있는거야.1


내가 보기에 코맥 매카시는 재앙적 서사 속에서 인간이 ‘오늘’에 어떻게 현존하는지를 깊게 고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은 없다. 지금이 나중이다.”라는 단정적 어조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내일의 존재’라는 불확실한 명제에 얼마나 강력하게 의존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시에, 매카시는 ‘기억’이 얼마나 기만적인가에 대해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듯 하다. 다음의 대목을 눈여겨 보라.


남자는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그 기원에 어떤 폭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했다. 파티의 게임에서처럼, 말을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는 게임에서처럼. 따라서 아껴야 한다. 기억하면서 바꾸어버리는 것에는 알든 모르든 아직 어떤 진실이 담겨 있으니까.2


앞서 서두에서 기억은 두 가지를 포함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나는 알고 있다.”와 “나는 알지 못한다.”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나는 알지 못한다.”라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은폐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나는 알지 못한다.”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럼으로써, 남자는 기억에 지배되지 않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오늘을 보다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얻게 된다.


IV. 포Foe : 거세된 기억


존 쿳시의 소설 <포>는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다분히 문제적이다. 그것은 조지 오웰의 <1984>와는 다른 지점으로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조작된’ 기억 이전에 ‘거세된’ 기억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프라이데이는 혀가 잘려버렸다! 프라이데이는 혀가 잘림으로써 실체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림과 동시에 ‘기억할 수 없는’ 자가 되어버렸다. 다른 의미에서, 이것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언급한 바, “호모 사케르”의 또다른 유형일지도 모른다. 법의 밖으로 배제된 자라는 말이다. ‘나’라는 존재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로부터 기원한다고 레비나스가 그랬던가? 프라이데이는 기억이 거세됨으로써 강제적으로 ‘비-존재’가 되어버렸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억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타인에게 기억되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 상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가 개인 혼자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상호 관계 속에 등장하는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주체란 ‘나’와 ‘너’ 사이의 공백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프라이데이는 혀가 잘림으로써 ‘나’를 잃어버렸고, 따라서 프라이데이의 주체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프라이데이는 식인종일 수도, 세탁부일 수도 있다. 진실로 프라이데이란 누구인가?


존 쿳시의 질문은 단순히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프라이데이로 표상되는 존재와 주체에 대한 문제 제기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기억과 연관되는 것이다. 기억은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며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은—조금 과언일지는 모르겠지만—‘존재하지 않음’과 등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말을 할 수 없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은 그가 벙어리라는 것 이전에 그의 존재 부정이며 따라서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거세된 인간 주체에 대한 본연적 물음을 담고 있다. 무엇으로부터 거세된 것인가? 그것은 제국주의에 의해 거세된 인간 주체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 생각하던 것이 사실상 인간 주체를 거세시켜버렸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존 쿳시는 아무래도 이런 역설적인 지점, 다름 아닌 이성이 잉태한 제국주의가 주체를 거세시켜버리는 ‘폭력성’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일찍이, 인간이 이성을 지님으로써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데카르트부터 이어져 오던 오래된 논제였다. 코기토의 정립은 분명 눈부신 진보를 이룩했음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사실상 거세된 주체가 존재한다. 프라이데이는 단지 제국주의에 의해 희생된 제 3세계의 어떤 사람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표상이다. 제국주의는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 주체를 소외시켰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는 아주 단순하게,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말을 하지 말아라!”—단지 제국주의는 우리에게 “기억하지 말 것”만을 주문하고 있다. 무엇에 대한 기억? 과거에 대한 기억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거세되어야만 앞으로의 무한정 전진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존 쿳시는 프라이데이의 ‘잘린 혀’를 통해 제국주의를 신랄하게 조롱하고 있는 듯 하다.—“너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웃기고 있군!”


V.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존재의 역설


기억이 우리의 존재와 연관되어 있다면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분명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초장부터 으름장 놓듯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3


언뜻 보면 우리에게 인생의 허무함을 설파하려는 것 같지만 나는 이 초장의 문구야말로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 바 “존재의 역설”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무게도 없고’ 따라서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존재에 근거가 없다면 죽음에도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라는 이중적인 명제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읽으면서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와 프란츠를 보며 어떤 ‘죄의식’을 읽었다. 다음을 눈여겨 보자.


 그것은 침공 후 일곱 번째 날이었고, 그 당시 저항 세력의 대변인으로 변한 한 일간지 편집실에서 그녀는 이 연설을 들었다. 그 방에서 두브체크의 연설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증오했다. 그가 양보했던 타협안에 대해 그를 원망했고 그의 모욕 때문에 모욕감을 느꼈으며 그의 허약함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지금 취리히에서 그 순간을 생각하니 그녀는 두브체크에 대해 더 이상 어떤 경멸감도 느끼지 않았다. 허약함이란 단어도 더 이상 비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두브체크처럼 운동 선수의 체격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자기보다 우세한 위력을 대하면 항상 허약해지는 법이다. 당시에는 참을 수 없었고 역겨웠던 이 허약함, 또한 자신의 나라로부터 추방당하게 만든 이 허약함에 대해 그녀는 측은함을 느꼈다. 그녀는 약한 사람들의 편, 약한 사람들의 진영, 약한 사람들의 나라에 속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녀는 그들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약했기 때문이고 연설 중에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현기증에 끌리듯 이런 허약함에 마음이 끌렸다. 그녀는 자신도 허약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그녀는 다시 질투에 빠졌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토마시가 이를 눈치 채고 평소에 하던 동작을 했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잡고 손가락으로 꼭 눌러주었다. 그녀가 손을 꼽았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을 위해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야?」

「당신이 늙어 있길 바라요. 지금보다 열 살 더. 스무 살 더요!」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당신이 약하길 바라요, 당신도 나처럼 약하길 바라요」였다.4


존재에는 근거가 없다. 그러나, 존재에는 근거가 없을지언정 존재 자체가 ‘나약하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당신이 약하길 바라요.”라는 말이야말로 진정 존재의 나약함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 존재가 한없이 ‘가벼울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시에 ‘나약함’이라는 사실은 존재에 대한 ‘죄의식’을 부여한다. 라캉의 언어로 말하면, 나약한 존재는 대타자로 수렴하며, 우리의 존재가 가지는 근본적인 나약함이란 바로 대타자에 의한 근원적인 죄의식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법적 의무감이란,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타자임과 동시에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5


존재가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의식과 관련한 것이 아닐까? 요컨대, 죄의식이야말로 인간이 기억하는 가장 근본적인 행위이자 도덕 규범인 셈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에 근거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존재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규범적 측면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존재한다. 어떻게? 선험적 죄의식이야말로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데카르트르의 코기토보다도, 우리의 존재를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그러한 죄의식들이야말로 밀란 쿤데라의 소설 속에 나타나는 감정들, 예컨대 측은함, 나약함, 허무함 등등을 내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VI.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흩어진 존재와 기억—“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가장 서툴게 읽은 책이라면 바로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아닐까 싶다. 책 내용 자체도 중구난방이거니와 사실 굉장히 지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억’과 관련하여 이 레포트를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지점을 선물해주고 있다.


책 내용 자체는 기억을 상실한 주인공이 과거의 자신의 흔적들을 찾아가며 자신을 돌아보는, 과거-현재-과거의 회상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나는 구체적인 이야기보다도 책의 전체적인 흐름에 기반하여 설명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기억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나’라는 주체는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것이어야만 하며,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지각되는 ‘기억’에 의해 구성된다. 주인고인 기 롤랑의 ‘기억 상실증’은 “나는 대체 누구인가.”라는 가장 본연의 질문, 즉 주체의 상실을 표상하고 있다. 각각의 기억들은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기억’으로써 구성된 ‘나’라는 존재는 결코 동일한 구성체가 아니라 흩어지고 파편적인 주체일 수 밖에 없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라는 것은 사실 매우 기만적인 언어인 셈이다. 따라서 오히려 현대적 차원에서 우리가 주체성을 언급하고자 할 때 가장 유효한 말은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기 롤랑이 지닌 ‘기억 상실증’은 단순히 기 롤랑이라는 주인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분열된 주체를 지닌 현대인의 보편적 표상이며, 기 롤랑이 타인의 기억에 의존하여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과정은 라캉의 언어로 말하자면 ‘타인의 욕망’에 기대어 살아가는 의존적 개인들을 호명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데카르트 이래로 동일자이며 환원될 수 없는 절대불변의 어떤 것으로 믿어왔던 주체는 이미 분열된 것이며, 그를 뒷받침 하는 기억 역시 ‘나’의 배타적 소유가 아니라 공동의 어떤 것으로 환원된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기억이 공동의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나 자신 역시도 완전한 기억을 가질 수 없다는 비극을 안고 있다. 기 롤랑의 한탄 섞인 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6라는 말은 누구도 완전하게 가질 수 없는 ‘기억’, 그리고 그럼으로써 나 자신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비극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그리고 이것은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VII.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현대는 기억의 시대다. 모든 것은 낱낱이 기록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기억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고, 또한 기억함으로써 반성한다. 그러나 인간이 ‘기억할 수 있다’라는 능력은 인간이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오만함을 잉태하였고, 그것은 제국주의라는 비극으로 귀결되기도 하였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기억함’은 두 가지 명제, “나는 알고 있다.”와 “나는 알지 못한다.”라는 두 상반된 명제를 가지고 있다. 인간사의 모든 비극과 오만함은 “나는 알고 있다.”의 절대적 신봉에서 비롯하였다. 제국주의의 오만함이 그랬고, 소설 <1984> 속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가 그렇다. 더불어 “나는 알지 못하”기에 내일을 살아갈 수 있으며 나아가 나약한 존재로써 현존할 수 있다.


기억이야말로 인간이 지니는 가장 탁월한 능력이야 근원적인 죄의식이라면, 나는 현대인들이 지녀야 할, 혹은 결정내려야 할 가장 윤리적 태도로써 “나는 알지 못한다.”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타자를 인정해야만 하고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으며 기억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태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 즉 공동의 선언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 레포트 제목이, 예수가 울부짖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따온,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인 것이다.

  1. 코맥 매카시, <로드>, 문학동네, 2008, p.64 [본문으로]
  2. 같은 책, p.150-151 [본문으로]
  3.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09, p.9 [본문으로]
  4. 같은 책, p.86-87 [본문으로]
  5. 한국현상학회,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 22집, 홍준기, <슬라보이 지젝의 포스트모던 문화분석-문화적, 정치적 무의식과 행위(환상을 통과하기)>, 2004.5, p.206 [본문으로]
  6.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문학동네, 2010, p.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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