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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제국(Evil Empire) : 숙명 #Chapter 2
게시물ID : readers_97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chthexen
추천 : 1
조회수 : 24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0/30 00:07:02
수정본입니다. 글 수정이 안되서 급한대로 씁니다.


*단어 앞에 표시가 있는 것은 주석입니다. 글 아래에 간략한 용어 설명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Chapter 2


루이번 왕국의 궁전. 잿빛 서린 번민이 한창 왕국 전역을 압도하고 있던 찰나였다. 예컨대, 의회의 명망 있는 왕실 의원들은, 다른 날보다도 유난히 더 분주해보였고, 그런 대혼란의 시기에, 누군가 왕국의 존망에 관해 조금도 심려하지 않기란, 도저히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다. 수 많은 과학자들과 마법사들이, 이 악마적인 현상에 대해 숱한 연구를 매진했지만, 여전히 그 모두가 헛된 수고로움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지난 밤, 형용할 수 없이 공포스러운 꿈을 꾸었던 테메토스 국왕은, 문득 이 기괴한 현상에 대해서 냉소적인 위기의식을 자각할 수 밖에 없었기에, 이내 다급해진 그는, 왕국 의회의 의원들을 그의 궁전으로 호출하여 긴급 회의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전에 책사를 태연히 질책하며, 스스로가 깨우친 존재라도 되는 양, 믿음에 관한 깊이있는 담론을 논했다지만, 그 역시도 그가 숭고히 여겼던 ‘신념’이 부족한 탓이었을까? 그는 속으로는 어떤 거대한 존재들이 이 세계에 강림했음을 느끼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사실이 국왕된 입장에서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이들에게 있어서.. 행운이 될 것인가, 비극이 될 것인가? 조금은, 난처한 물음이 앞섰다. 그는, 절대적인 존재들에 대해서 차마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는 그의 나약한 내면 속 깊은 곳으로부터 꿈틀대는 혹독한 공포심을, 기백있게 견뎌내기엔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애석하게도.. 그 정도의 기량조차도 차마 겸비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었으리라. 


“책사, 의원장.. 그리고 나의 숭고한 순교자들이여..”

“...”

“말씀하소서.”

은백색의 옥좌에 앉은, 테메토스 국왕의 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유달리 근엄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한편으로 그는 불안하고 창백한 기색에 역력한 듯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빛나는 옥좌 아래서 경직된 입을 가까스로 여는 순간, 모두들 숨소리를 죽이며 사뭇 숙연해졌다. 그들도, 그가 지난 밤 얼마나 가혹한 시련을 홀로 버텨내었는지, 어쩌면 조금은 알 것도 같은 눈치였다.


“그대들에게, 지극히 원론적인 물음을 하나 던져볼까 하네. 그대들은.. 이 사태에 대해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게, 솔직하게 이야기해보게나. 말하건대, 한 치의 거짓도 섞여있지 않은, 진실성 담긴 견해만을 필요로 한다네.”

“위대한 우리의 국왕이시여, 저희들과 같은.. 무지로 가득 찬 필멸자들 따위가.. 어찌 절대자가 내린 거룩한 운명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이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며.. 앞으로 일어날 숙명에 대해서, 또, 그게 무엇이 되든간에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이고자 하는 위대한 결단을 마저 끝맻으시길.. 저희는 다만, 진정으로 염원할 따름입니다.”

“..난 그대들의 그런 대답이 썩 반갑지만은 않다.”

“..저희는 그저 운명을 따를 뿐입니다.”

“누구를 위한 운명 말인가? 그 운명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 어떻기에 그대들을 실 없는 나태함으로 이끈단 말인가? 아아.. 딱하게도, 모두가 그저 이 사태를 그럴듯하게 꾸며대기에만 바쁜 것 같구나.. 날 더 이상 속일 생각은 마라.”

그 때였다. 왕국의 근위대장이, 다급한 표정으로 국왕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무언가, 굉장한 소식이라도 전할 듯한 심산이었다. 궁전을 가득 메웠던, 불길하고도 흉흉한 기운이 조금은 사그라들 듯 보였다.


“우리의 위대한 국왕이시여.. 전장에서 돌아와 급히 보고합니다.”

“보고하게. 나의 용맹한 엘릭토르여.”

루이번 왕국의 근위대장. 엘릭토르 4세(J. Alricthor Ⅳ). 그는 과거 악마교와 적대하는 창조교 무리들과 용맹스럽게 대항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수 많은 성전(聖戰)을 치뤄낸 바 있었다. 그리하여 루이번 왕국와 악마교의 세력이 디아벨라 월드의 남쪽 지방에 그 기반을 확고히 확립하는데에 이례적인 업적을 남김으로서, 한창 국왕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을 이끌어내고 있던 위대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성전을 치뤄내고 왕의 궁전에 입성할 때면 도시에는 성대한 개선식이 치뤄지고 승전을 알리는 장엄한 선율이 온 대지에 울려퍼졌다. 이처럼, 그가 끼치는 영향력은 가히 대단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가 국왕으로부터 특별히 수여받은 플라즈마 피스톨(Plasma Pistol)과 플라즈마 액스(Plasma Axe)는 그가 부여받은 위압적인 명예로움을 단번에 짐작케 해주었다. 그런데 지금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전장의 상황을 보고하는 그의 표정은 평상시와는 분명히 다른 불길한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무언가 압도적인 광경이라도 목격한 양 미처 표현할 수 조차 없는 공포심에 가득 긴장한 모습.. 아니, 공포심 그 자체였다.


“사악한 기운을 내뿜는 거대한 무리들이 우리의 영토를 침범했습니다. 왕국의 요충 지대 곳곳에 배치된 영토 방위군에 따르면, 그들은 빠른 속도로 수도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답니다. 현재로서는,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엘릭토르여.. 지금 당장 그대가 알고 있는건 무엇이든지,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이야기해보게.”

근위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왕궁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는 그들은, 다름 아닌, 거대한 화염 폭풍이 대지를 휩쓸고간 문제의 ‘그 지역’으로부터 발현한 무리들이라고 했다. 또한, 그들은 차마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매우 빠른 존재들이었던 탓에, 그들의 침공을 막을 그 어떤 유효한 방법도 미처 찾아낼 수 없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듣자 모두들 형용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공포감에 빠져들었다. 이로서 그들이 어쩌면 의심했을런지도 몰랐을, ‘그 존재’들의 실체가 사실상 증명된 것임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이제 이 시점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각자에게 부여받은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 뿐이었다.


“아아.. 이럴수가. 진정.. ‘그 분’들이 이 세계에 강림하신 것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통탄의 날이로다. 우리가 굳게 믿고 숭배했던  ‘그 분’들이.. 우리에게 그 보답으로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려고 하신단 말인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야...”

“이제 저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

국왕을 따르는 수 많은 순교자들이, 문득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오, 나의 가엾은 순교자들이여..”

테메토스 국왕이 연민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홀로 깊은 시름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궁전 안은 순식간에 왕국이라도 여윈 듯한 무게감의, 짙고도 엄숙한 침묵이 주변을 가득 에워쌌다.


“성당으로 가겠다..”

“...?”

“사실은.. 어젯 밤 그 불길한 꿈을 꾸고 나서부터 그 분들이.. 도대체 왜 우리에게 이런 비참한 시련을 주시려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어떻게든 추궁하고 싶었다네.. 나의 보잘것 없는 이 육신이 비록 일순간 조각나 대지에 산산히 흩뿌려 질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그 분들의 위대한 선택을 기꺼이 받아들일 비장한 각오가 되어있으니.. 부디..”

“그렇지만, 테메토스 폐하..”

“...시간이 촉박하다네. 어서 성당으로 갈 채비를 하게.”

테메토스 국왕의 눈빛은, 전장에서 죽음을 각오한 그 어느 필멸자들보다도 근엄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예컨대, 그의 충성스런 가신들 따윈 도저히 범접하기 불가능한 것이어서, 모두를 한결같이 어느 고해의 종언을 맞이하듯.. 그렇게 숙연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무리하게 떼어내곤, 종교 의례를 치르기 위해서 서둘러 대성당으로 향했다.


“아니.. 이.. 이게 다 무엇인가...!”

“이럴 수가...”

테메토스 국왕과 그의 가신들이, 대성당으로 향하는 도중, 성당 로비에서 피에 범벅이 되어 죽어있는 다수의 악마교 신도 무리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가히, 원인 모를 떼죽음이었다. 그의 옆을 수호하던 근위병 중 하나가 훼손되어 있는 시체 가까이 다가가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알아내고자 다가갔다. 몇 가지 유용할만한 단서를 찾아내는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누군가 외부에서 이들을 도륙한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지금으로선 알아낼 수 없겠지만.. 제 예측이 맞다면 아마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분명합니다.”

“..대체 무엇이 그들의 목숨을 스스로 끊게 만들었지...?”

“그건...”

이미, 가신들 중 몇몇은 완전히 겁에 질려있었다. 그런 그들을 본 국왕은, 심란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성당으로 가는 길에, 수십 구의 시체들을 더 목격할 수 있었다. 시체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깨끗한 것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는.. 머리가 터져 뇌수가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거나, 복잡하게 꼬이고 뒤틀린 내장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차마 자살이라곤 짐작도 하기 어려울 정도의 극단적인 부류도 눈에 띄곤 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가까스로 성당의 문턱에 당도할 수 있었다.

“국왕 폐하가 납시었소.”

“...”

어쩐 일인지 성당 내부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게다가, 평소의 상황이라면.. 성당의 입구는 순교자들이 자연스레 오갈 수 있도록 활짝 개방되어 있어야 정상이었다. 어쩐지 내장이 부패하는 냄새와 함꼐 싸늘한 공포가 문 앞을 감돌았지만 그들은 성당으로 가는 길에 마주했던 수 십 구의 시체들을 떠올리면서, 단지 그 냄새는 길가의 시체 냄새가 자신들의 옷에 베인 것 뿐일거라고 여기며 가볍게 지나쳤다.


“문을 열라.”

국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근위병 몇 명이 앞장서 성당의 육중한 문짝을 힘껏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순간 시체 썩는 냄새가 후각을 쏘아붙이며 그들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 문이 완전히 개방되어 굳게 잠긴 성당의 모습이 마침내 환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을 즈음, 성당 내부에 처참히 조각난 시체들을 그들은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거대한 공포가.. 방심에 취해있던 그들의 뇌리 속, 깊은 곳을 덮쳐왔다.


“...다들 무엇을 하고 있는건가? 어서 들어가지 않고.”

“...폐하, 이건 도저히...”

“명령이다.. 어서, 서둘러라...”

본능적으로 쏟아져나오는 역겨움을 토해내며 그들은 아주 천천히.. 성당 내부로 진입했다. 성당 안에서 그들이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피비린내 즐비한 죽음의 미학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흐흐.. 흐히히...”

“거기 누구냐?”

가녀리면서도 섬뜩한 웃음소리가 성당 안쪽에서 들려왔다.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의 발원지를 찾아내기 위해서, 그들은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성당 내부를 샅샅히 살펴보다가, 기어이 반쯤은 미쳐버린 생존자들 몇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흐흐...”

“그대들은.. 누구인가? 그보다도.. 성당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들은 단언컨대, 반이 아니라 완전히 미쳐버린 듯 했다. 그들은, 대뜸 국왕과 가신들을 향해 섬뜩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공허 섞인 웃음을 미친듯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감히 이 놈들이..? 참으로 무엄하구나..!”

국왕의 곁에서 그를 수호하던 근위병들이 끓어오르는 공포심을 끝끝내 견뎌내지 못하고 간신히 찾아낸 생존자들을 죽여버릴 듯한 심산으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생존자들의 머리와 내장이 기분 나쁜 소음을 내며 터져나갔다. 그들이 뿜어낸 검붉은 피는, 미치도록 새하얀 성당의 차가운 바닥을 서서히 적시었다. 또, 사방에 흩어진 피와 내장들은 국왕과 가신들의 옷에 어김없이 그 흔적을 남겼다.


“..아아, 분에 넘치는 이 괴로움을.. 이 가혹한 시련을 대체 어찌하여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

그런데, 그 때. 차마 믿을 수 없는 가히 경이로운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갑작스레 주변이 엄청난 에너지에 의해 뒤틀리고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였다. 곧, 이어서 불완전한 에너지의 비정상적인 흐름이, 궁전 내부를 무질서하게 배회했다. 모두들 본능적인 두려움에 의지할 곳 조차 없는.. 처량한 육신을 어떻게든 가까스레 추스리고자 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또, 어떤 누군가는 자신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이 기괴한 현상을 너무나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나머지, 공포에 가득 질린듯한 모멸적인 표정을 자아내며 스스로의 무력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다. 여러 잡념들이 찰나의 시간동안 스쳐지나가는 순간에도,그들이 믿는 절대적인 ‘존재’들이.. 어쩌면 그들을 외면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상황은 점점 더 빠르게 악화되어만 갔다. 그러자 마침내는 그 모두가 숭고하게 여기곤 했던 그들의 곧은 신념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들이 하나 둘 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여지껏 믿어왔던 그 ‘존재’들에게.. 목숨까지 다 바쳐가며 숭배해온 과거 행적들을 조금이라도 뒤돌아본다면 적어도 그 ‘존재’들이 보답으로서 베풀어준 운명이란 것은.. 너무나도 가혹하고 실망스러운 처사일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조금 더 경과하자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성당을 가득 메꾸고 있던 불순한 에너지가 아주 짧은 시간동안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며 검붉은 빛의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이 광경을 그저 묵묵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국왕과 그의 순교자들은 벽을 향해 처참히 나가떨어졌다. 심지어는 비통하게도 그 과정에서 몇몇의 사람이 죽거나 다치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몇 차례의 강력한 폭발이 있던 뒤에, 불순한 에너지가 응집된 어둠의 심연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기묘한 실체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컨데 어쩌면 그들이 진정 고대하던 그 ‘존재’들이.. 숭배의 대가로서 작은 선물이라도 베풀어줄 심산으로 그들의 성역에 친히 강림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아.. ‘그 분’들꼐서.. 우리를 친히 보호해주시고.. 이 끊어질 듯한 고통속에서 기꺼이 구원의 손길을 건네주시기를..”

“과연, 오만하기 이를 데 없구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무지의 필멸자들이여.”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회답이었다. 다만, 그 존재들은.. 이 나약한 필멸자들이 스스로의 무지함속에 처참한 모습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한 치의 지나침도 없이 그 모두가 숙연한 태도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임이 분명했다. 뒤늦은 후회심이 국왕과 그를 따르는 순교자 모두에게.. 날카로운 가시 줄기가 되어 내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오.. 우리의 절대자이시여.. 다만 저희는 그저.. 각자의 마음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겐 네 놈들의 보잘것없는 변명 따윈 필요없다. 변명은 네 놈들의 무능력함만 부각시킬 뿐이지. 우리의 거룩한 가르침이, 네 놈들을 이리도 뻔뻔스럽고 비열한 마음만을 취하도록 이끌었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맹렬한 믿음은 자연스레 가이없는 기적을 일으키고 또한, 영속적인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거늘.. 이런, 나약하고 쓸모없는 *창조교도 놈들 같으니라고!”

“...”

“네 놈들이, 그러고도 우리를 숭배하는 충직한 순교자들이라며 감히 떠들고 다닐 수 있는건지 무척이나 의심스럽구나. 진정, 그대들이 우리의 용맹스런 추종자임이 확실한가?”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그들’이 어두운 심연 속에서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한 국왕과 그의 순교자들은 ‘그들’이 발산하는 휘황찬란함에 소스라치게 질겁함으로서 단언컨대, 그들은 더 이상 어떠한 변명거리도 늘어놓을 수 없을 지경이였다. 그 경악스러운 상황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단 한 명의 예외조차 없이 그 모두가 압도적으로 내려꽃히는 맹렬한 두려움에 질려버린 기색을 역력히 자아내고 있었다.


“너희들은 내면의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태생적인 결점들을 끝내 초월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애석하게도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너희들은 우리의 기대를 끝내 져버렸고, 우리 또한 그대들의 무능력함에 비견되는 댓가를 선물하리라.”

“저희의 죄를 진실로 깨우치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이제 그만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그렇다면 그대들이 거스른 죄악이 무엇인가? 내게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그대들의 결백함에 손을 얹고 비로소 논할지어다.”

“당신들의 믿음을 져버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거스를 수 없는 우리의 나약함 탓입니다.”

“그 후에는 진정 그대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지도.. 잘 알고 있을테지?”

“아.. 안돼..!”

“이럴수가.. 그것만은 제발...!”

에이든이 그의 *엑셀러레이터를 높이 들어올리더니 순식간에 나타난 맹렬한 기세의 어둠이 공포에 사로잡힌 필멸자들을 한가득 에워쌌다. 검붉은 기운에 그대로 압도당한 세기의 필멸자들은, 발작과 같은 이상현상을 일으키며, 육체가 급속도로 변이를 일으킴으로서 마침내는 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추악한 괴수로 거듭나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너희들이 받아 마땅한 댓가이다.”

에이든이 그들에게 내린 이 냉혹한 처사는, 어떤 측면에서는 가히 심오한 판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비록 추악하고 기괴한 육신을 얻었으나 그 대신 더 이상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들이 부여받은 새로운 육체는 그 어떤 병기에도 버텨낼 수 있는 견고한 저항력과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까지 갖춘.. 전쟁에서는 더 없이 완벽한 요소만을 두루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맞이하게 된 비운의 운명이란.. 예컨대 단지 ‘저주’라고만 칭하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또 다른 부류의 숭고한 축복이라고도 생각해볼 만 했다.


“역겹군요. 역시 인류란 족속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기 그지 없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없애버려야 했죠.”

유감스럽게도, 데스메이커는 이들의 진정한 가치를 털끝만큼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아마 그가 보기에는 영혼이 악마에게 영구히 귀속되어 죽음과도 같은.. 아니 어쩌면 죽음보다도 더 한 운명에 놓여있는 한낱 싸늘한 시체 더미쯤에 지나지 않은 무능력한 존재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데스메이커의 뇌리를 스쳤던 환멸감과 감히 비견할 만큼이나 유용한 존재들임엔 틀림없었다. 에이든이 그들을 끝내 죽이지 않고 그들의 하찮은 목숨만은 살려주었음을 감안해본다면, 그들은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나의 하수인들이여. 이 추악하기 그지 없는 존재들이..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저희가 보기에는, 그저 썩고 부패한 고깃덩어리들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이들은 *커럽터(Corrupter)라고 불리우는 존재들이다. 비록 필멸자들을 숙주로 삼아 변모한 무리들이긴 하나, 나약한 인류와 그 우위를 견주어볼 때 그들 따윈 차마 필적할 수도 없는 우월한 존재들이지. 나는 이들의 유용함을..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다.”

“이 불결한 족속들을 과연 어떻게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에이든은 의외로 그들에 관해서 매우 많은 부분을 깨우치고 있었던 듯 하였다. 


“감정과 감각을 느낄 수 없고 생명력이 뛰어나 전쟁에 내세우기 더없이 적합하다. 그대들도 마음만 먹으면 커럽터들을 창조하고 통제할 수 있다네. 다만 그들을 완벽히 그대들의 수중 안에 넣으려면 약간의 노력이 뒤따라야만 하지.”

“저희들 역시도.. 진정 이들을 빚어내고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하위 악마, 루나텐이 그의 심오한 회답에 조금은 의심섞인 눈빛을 보냈다.


“정신력이 나약한 자들은.. 그대들과 단순히 접촉하기만 해도 순식간에 육체적 변이가 일어날 것이다. 순식간에 본능적인 공포에 압도되어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처참히 죽어가는거지. 그리고는 우리를 위해 분투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묵묵히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정신력이 강한 자를 타락시킬수록, 그들에게 부여되는 육체적인 불멸성은 배가 되어 집약된다는 것이라네. 그래서 난 그들이 지닌 거룩한 순수함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저 역시도 전부터 이들과 많이 조우해 왔기에.. 어쩌면, 무언가 알 것도 같습니다.”

류자크가 커럽터(Corrupter)라고 불리우는 추악한 괴수들에 관해서 무언가 아는 바가 있는 듯, 조금은 미묘한 기미를 드러냈다.


“전, 당신의 대리인이기 이전에 명망 있는 사신(Reaper)이였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예전에 인류의 세계를 우연히 드나든 적이 몇 번 있었지요. 한 번은 제가 살육의 광기에 완전히 미쳐서.. 차마 제 정신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우연히 마주쳤던 인간 놈들이.. 제 모습을 보고는 겁에 잔뜩 질려서 미처 달아날 틈도 없이 육체에 변이가 일어나더군요. 그 때가.. 아마 커럽터와의 첫 대면이었을 겁니다.”

“정확히 짚었군, 류자크. 그래서 그 다음엔 무엇을 행했는가?”

“그냥..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땐 미처 제 정신이 아니었턴 탓에 감히 단언할 순 없겠지만.. 그 놈을 죽인 뒤 산산히 도륙냈을 겁니다. 그 이후로 제게 몇 차례 더 그런 일이 일어났지만.. 아무래도 그게 뭐였든간에 저는 전혀 개연치 않았었지요.”

“이제부터 그들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방법을 연마하도록 해라.”

“제게.. 반드시 그래야만 할 이유라도 있는겁니까?”

류자크의 갑작스러운 반발에 에이든은 호쾌하게 웃음짓더니, 이내 그에게 자비심 없는 강력한 일격을 퍼부었다. 류자크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어지며 그의 입은 뒤이어 검붉은 피를 여지없이 토해냈다.


“애석하지만 그 전에 강한 자에게 복종하는 법 부터 먼저 깨우쳐야 할 것 같구나, 류자크..”

“아무렴, 그래야지요..”

그가 은근한 말투로 에이든을 비꼬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더 이상 에이든을 향해 반발할 여력 조차 남아있지 않은 듯 보였다. 그에게 한 치의 반발심을 드러내는 자들의 최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어떤 이가 보기에는 차마 받아들일 수 없을 지도 모르겠으나 악마들의 삶이란.. 이렇듯 강자에 대한 저항과 굴복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에이든이 이제까지 그들을 끝끝내 살려두고자 판단했던 과거의 무수한 행적들은 어쩌면 그러한 호전적인 습성이 그들이 지닌 태생적인 본질이겠거니 하면서 혼연히 넘어간 것일게다. 단언컨대 그들 모두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존재들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왕국의 통치자들을 숙청했으니 남은건 자질구레한 잔챙이들 뿐이군.”

“어딜 가도 하나같이 무지한 자들 뿐이니, 우리들의 지배 아래에 놀아나기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요.”

그 시각, 대규모 지각 변동의 여파로 왕국 일대는 짙은 화산재와 맹렬한 용암이 도시에까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왕국의 시민들은 갑작스레 일어난 이상 현상에 모두가 두려워했고 이어서 수도가 어느 고상한 무리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들에게 남게 된건 좀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 뿐이었다. 루이번 왕국의 수도에 살고 있던 상류층 시민들은 테메토스 국왕의 궁전이 그나마 그들의 처소로부터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다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국왕에게 이 사태의 책임을 물을 심산이었다. 그리하여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국왕이 머물고 있는 궁전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던 건, 국왕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흉측한 몰골로 만든 어떤 고상한 존재들이었다.


“오, 나의 숭고한 순교자들이 여기 또 있었군. 그대들의 경전에 쓰여진 대로라면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야하지 않겠나?”

“그대들은 누구요? 대체 무슨 권한으로 감히 이 신성한 곳을 겁도 없이 누비고 다닌단 말이오?”

“아, 우리들 말인가? 이 몸으로 말하자면...”

에이든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그들 무리 중 일부는 육체의 변이가 급속도로 발현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는, 자신들과 대면하고 있는 ‘고상한 존재’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비범한 존재들임을 깨달았지만 달아나기엔 이미 한참이나 늦은 뒤였다. 그들은 한낱 벌레와도 같은 초라한 목숨이나마 어떻게든 부지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몸부림쳤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더 악화되기만 하였다. 그들 중 하나가 애써 부질없는 용기를 내어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한 가지만 묻겠소. 우리들의 국왕은 도대체 어디 있는게요..!”

“그대들의 국왕..? 테메토스 말이군.. 그는 진실로 촉망 높은 인물이었지. 나는 그런 그가 몹시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나는 다만 그가 기뻐할 수 있도록 그에 걸맞는 은총을 친히 베풀어주기로 했지. 보아라, 그가 받은 대가가 얼마나 명예롭고, 휘황찬란한 것인지..!”

그들이 마지못해 본 것은, 단지 흉측한 한 마리의 괴수로 변한 필멸자였다. 너무나도 난해하게 변모한 그의 몰골에 진정 그가 맞는지 그들은 한참이나 의심할 수 밖에 없었으나 국왕 고유의 표식이 새겨진 파워 아머는 그 괴수가 테메토스 국왕이 분명함을 뚜렷히 암시했다. 일순간에 왕국을 여의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이들 역시도 국왕과 같은 운명을 뒤따를 수 밖에 없다는 참혹함이 줄 지어 늘어선 이 가엾은 필멸자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런 틈에도 한 가지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이 생겨났다. 결정된 우주의 섭리를 미처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들은 점차 그들의 내면 속에 내제되어있던 국왕에 대한 원망이 점차 국왕에 대한 역겨움으로 심화되어갔던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사태는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굳이 논평하자면 각자의 신념이 그들의 축복을 견뎌내기엔 너무나도 미약했던 탓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악.. 내 육신이...!”

“불멸의 존재들이여.. 우리가 무엇을 저질렀기에  우리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십니까.. 아아..”

“그대들의 생명은 우리의 숭고한 과업을 이뤄낼 견고한 기반이 될 것이다. 각자의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대들이 진정 부여받은 삶을 인고하며 견뎌내야 할 거룩한 숙명이니라.”

육체가 변이하는 끔찍한 고통속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렇게 모두들 처참히 죽어갔다. 다만 그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죽어도 죽은게 아니었다. 영혼만은 그들의 주인인 악마들에게 영원히 귀속되어 누군가가 그들의 생명을 대신 거둬줄 때 까지.. 그렇게 악마들의 하수인 노릇을 해야만 하는 운명인 셈이었다.


“인간 놈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곁에서 생생히 지켜보고 있으니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군요. 인간들이 고통속에서 발악해대는 모습이야말로 좀처럼 질리지가 않는, 흥미로운 구경거리 같습니다.”

류자크가 어느새, 에이든의 일격을 맞고서 아까 전 까지만 해도 산산히 조각났던 그의 육신을 온전히 회복하고는 태연히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감히, 한번만 더 내게 기어오르기만 했다가는 네 놈의 사지를 연옥(煉獄)의 고문대에 묶은 후, 영겁의 세월 동안 지옥과도 같은 고통 속에 기필코 몸부림치게 하리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의 군주여.”

여전히 그는 어딘가 에이든을 비꼬는 어조로 회답하였으나 에이든이 그를 격노의 눈빛으로 노려보자 이내 움츠러들었다.  


“아니, 난 도저히 이정도에 만족하지 못하겠다. 난 예전부터 이들을 한 놈도 남김 없이 모두 도살하고 없애버려야만 한다고 생각해왔지. 이런 나약하고 쓸모없는 것들을 대체 어떻게 부려먹겠다고 하는지는 어차피 처음부터 내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나의 이 녹슨 낫으로 그들의 가냘픈 살점을 도려내고 후에 남을 차가운 육신을 불태움으로서 나의 증오심을 모두 상쇄하리라.”

여지껏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속으로 참아오기만 했던 데스메이커의 불만이 드디어 폭발했다. 그는 대대로 그의 선조들이 유서 깊은 악마의 혈통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유달리 그 난폭함이 심한 편이었는데, 다른 악마들보다도 특히 인류에 대한 증오심이 강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선 차라리 억누르는 것 조차 힘겨운 태곳적 본능에 가까웠다.


“나의 지령을 끝내 거부할 셈인가 보군? 데스메이커.”

“저들을 살려두느니 차라리.. 죽음으로서 아무 쓸모도 가치도 없는 그들의 필멸성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들의 영광스런 행색을 보아라. 나의 용맹한 하수인이여. 나의 이 무한한 전능함을 부여받고 그들은 축복스런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나약한 필멸자 따위가 아니다. 그들이 생과 사가 오가는 혹독한 전장에서.. 진정한 가치를 발할 순간을 그대는 곧 마주하게 될 것임을.. 반드시, 맹세한다. 다만.. 그대가 그 장엄한 순간을 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들에게 목숨만이라도 보전할 수 있을 일말의 기회만 주면 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

에이든이 데스메이커를 다그치자 조금은.. 아주 조금은 진정이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굳이 데스메이커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에이든의 이 가증스런 계획에 대해서 어쩌면 내심 속으론 불만을 품고 있을 또 다른 악마들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보증은 애초부터 없었다.


“하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이들에겐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역시나 그랬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한동안 홀로 침묵을 지켰던 류자크가 에이든의 곁에서 또 한마디 덧붙였다. 에이든이 이번에는 그를 진심으로 갈갈히 찢어 죽여버릴듯한 기색을 지어보이자, 그는 으레 질겁했다. 한 참을 그렇게 쏘아본 에이든은 생각을 바꿔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기로 작정한 듯 잠시 머뭇거리고는 이내 다시 할 말을 되찾았다.


“나의 노련한 조력자, 테제뉴아. 거기 있는가?”

“난 여기 있다. 풋내기 집정관. 갑자기 무슨 일로 날 호출한게지?”

테제뉴아(Tezenuar)는, 지략과 무장을 관장하는 악신(惡神)이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간사하고 잔꾀가 많아 무지한 필멸자들을 그의 뛰어난 간괴과 속임수로 파멸시키는데 뛰어나 그 악명이 높았지만 또한, 그는 동시에 아주 오래 전부터 진귀한 무기와 장비를 만들어냄으로서 유명세를 떨쳐왔던 지옥의 권위있는 대장장이이자 제련사로서의 비범한 진가를 인정받고 있기도 했다. 혹은 플라즈마 병기와 궤도 폭격이 바야흐로 세계의 전장을 주름잡는 이 시대로 그의 위치를 논하자면 아마 무기와 장비를 생산하는 저명한 제조업자 쯤 될 것이다. 사실은 그 조차도 그를 너무나 과소평가하는 명칭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에이든이 그의 장대한 계획에 테제뉴아의 조력을 받기로 결정한 것은 가히 현명한 판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온갖 진귀하고 강력한 장비들을 제조해낼 수 있었기에 갓 태어난 커럽터들에게 적합한 전쟁 도구들을 보급해주는 것은 말하자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갓 태어난 생기넘치는 필멸자들이구나. 이 무리들을 네 놈이 직접 창조했다고? 모처럼 마음에 드는군. 네 놈이 여태까지 벌인 괴악한 짓들과 단연코 비견할게 못 될 정도로.. 굉장히 마음에 들어. 가히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네 놈 따위가.. 순수한 쾌락을 갈구한답시고 지옥의 연옥에 하루 종일 쳐박혀서는 멀쩡히 살아있는 피조물들을 무참히 짓밟고 고문하곤 했던 그 안쓰러운 시절을 회고하자니.. 무릇 이렇게 관조하며 감탄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도리어 이 무리들의 행운을 빌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뼈저리게 들어서 말이야.. 네 놈도 물론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그 입 다물라. 오만한건.. 내가 아니라 네 놈이다. 네 놈도 내심 본능적으로 알아챘겠지만, 여기 몇 가지 확정된 사실들이 있지. 그 중 하나가 지금 즉시, 이 자리에서 네놈이 그렇게 자부해왔던 진귀한 무기들을 한 치의 숨김도 없이 바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네 놈 따위가 감히 내 명령을 어기고 끝끝내 반발하려 든다면 그리 안쓰럽게 여기던 그 ‘피조물’이야말로 다름 아닌 네 놈이 될 것이란게 지극히 자명해졌기 때문이지.”

비록 타협의 과정에서 약간의 신경전이 있었으나 두 악마 사이의 분위기는 전보다 한 층 누그러졌다. 테제뉴아는 그의 미덕에 걸맞게도, 그 불순한 지략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다루어야 하는지도 과연 잘 알고 있었던 듯 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 대견한 필멸자들에게 어떤 선물을 주는게 적합할지 모르겠군.”

“결정된 바에 따르면 적어도 수 천개 이상의 막대한 재고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 즉시 이 자리에서 무리 없이 생산해낼 수 있겠나? 아니, 네놈은..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이야.”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하여 좋을게 없다는 걸 잘 알텐데, 풋내기 집정관?”

“미처 깨닫지 못한게 있나본데 네 놈에게 선택권 따윈 없다. 듣자하니 지략의 신이라는 자가.. 과연 실망스럽기 그지없군.”

테제뉴아는 틈만 나면 에이든에게 반발하여 보통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서 에이든은 그를 어떻게든 회유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테제뉴아가 에이든을 대하는 태도로 추론해보건대, 그는 어쩌면 에이든의 그런 난처한 처지를 속으론 완벽히 간파하고 있었음에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테제뉴아.”

“그 정도의 재고를 이 자리에서 당장 소환해내려면.. 아무래도 전반적인 장비의 품질은 단언하기 어렵다. 그래도 좋은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런 사사로운 문제는 처음부터 마음에 두고 있지도 않았었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에이든이 테제뉴아를 재촉하자 그는 순식간에 족히 수 천 개쯤 되어보이는 방대한 양의 무기를 소환해냈다. 언뜻 보기에는 원통형의 길다란 관이 특히 눈에 띄는 근사한 모양의 에너지 라이플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아마 총의 아랫 부분에 탄창 대신 부착되어 있는 특수한 장치를 통해서 압축식 전지를 끼워넣은 후, 전지에 내장된 에너지를 방출하여 공격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전적으로 따르는 듯 했다.


“내가 최근에 고안해낸 *데모닉 라이플(Demonic Rifle)이라는 무기이다. 마음에 드는가? 비록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지극히 구형 모델이라 아직까지는.. 전쟁 용도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만..”

“어찌됐든 아까 전에 상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렴, 그러했지.”

“이제.. 이 무기를 저 필멸자 무리들에게 선사할 일만 남았도다.”

에이든이 커럽터들을 향해 기묘한 제스쳐를 취하자 그들은 갑작스레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데모닉 라이플을 집어들고는 서서히 그들의 전열을 신속히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들이 전투 태세를 완전히 갖출 때 까지는 그 광경을 유유히 지켜보던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던 것 보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일은 거스를 수 없는 전능한 절대자의 명령 뿐이었다.


“나의 하수인들이여.. 나의 순교자들이.. 나의 피조물들이.. 이 세계를 어떻게 유린하고 파괴하는지 똑똑히 지켜보아라.. 그리고 깨달아라.. 그들의 영원한 신념과 복종이 어리석은 필멸자들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선사하는지.. 이들이야말로 우리들의 필연적인 숙원을 대신하여 이룩해낼 축복받은 존재들일지니..”

에이든의 연설이 도시 전역에 울려퍼졌다. 나약한 필멸자들은 휘몰아치는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고 악마들과 그를 따르는 수 많은 순교자들은.. 왕국의 도시를 한 곳도 남김 없이 침탈하고 무너뜨렸다. 그들의 무리가 당도하는 곳마다, 사악하고 불순한 에너지가 항시 그 근방을 뒤덮었으며 종래에는 그들의 가르침이 왕국 소유의 광활한 대지에 전염병처럼 전이되고 그 뿌리를 틀었다.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이었다.


*주석(용어 설명): 

*창조교: 이 세계를 창조한 태고의 창조주(The God)를 숭배하고 따르는 종교. 덧붙여, 창조주는 현재 깊은 잠에 빠져있기 때문에 창조교 신자들을 직접적으로 구원할 순 없으나, 대신 그의 대리인인 천사(The Angel)들에게 그의 책무를 맡김으로서 간접적으로나마 이 세계를 수호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창조교 신자들은 이 사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엑셀러레이터(Exallerator): 악마들이 주로 장비하는 사악한 스태프인 데스 웨폰(Death Weapon)들 중에서도 매우 특별히 제작되어 가장 강력한 마력을 내포했다고 알려져있는 전설적인 무기를 칭한다. 덧붙여, 집정관만이 착용 가능한 무기이다.

*데모닉 라이플(Demonic Rifle): 커럽터들에게 주로 부여되는 전투 화기이다. 발사 시, 번개 모양의 직선형 빔이 뿜어져나와 적을 태워버린다. 무기 자체에 사악한 에너지가 깃들어 있어서, 정신력이 약한 필멸자들은 만지기만 해도 서서히 타락화가 진행된다.

*커럽터(Corrupter): 악마들 혹은 악마적인 에너지가 깃든 피조물을 접하게 되면 ‘타락화’라는 과정을 거쳐 육체적, 정신적으로 눈에 띄는 변이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결과물의 종점에 위치해 있는 것이 커럽터라고 불리우는 것들이다. 커럽터는 영혼이 악마에게 귀속되거나 심지어 파먹히기까지 하여 오로지 전쟁만을 위한 노예로서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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