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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한국현대정치 비판론 -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게시물ID : sisa_4493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12
조회수 : 946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3/11/01 15:51:14

Written by 무명논객


I. 서문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1) 최장집 교수의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포문을 여는 이 도발적인 말은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을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열망했으며, 87년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는 거의 완성된 듯 보였다. 의회 민주주의는 성공적으로 안착되었고, 안정적인 양당제 구도와 대통령제, 그리고 직선제가 채택됨으로써 우리는 민주화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실로, 사람들은 정치가 우리의 삶을 보다 ‘행복하게’ 해줄 것이란 믿음에 부풀어 있었음은 틀림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의 예상은 너무나도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로 양극화를 더욱 가속화하였고, ‘실패한 정부’라는 오명을 달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삶을 보다 더 나아지게 해주리라는 믿음을 점차적으로 접게 되었다. 정당들은 효과적으로 대중의 요구를 수렴하지 못하였고, 정당의 보스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하여 패거리를 만들며, 사실상 대중의 요구와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제들을 가지고 옥신각신할 뿐이었다.


이러한 정치는 필연적으로 대중들에게 정치적 피로감을 낳을 수 밖에 없었으며, 대중들의 정서는 거의 반정치적으로 변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정치에 대한 혐오 내지는 냉소는 이미―끔찍하게도―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믿어온 정치의 역할, 폴리스를 더욱 폴리스답게,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행복을 더욱 행복답게 만들고자 하는 정치의 기획은 한국에서는 완전히 엇나갔다. 정치는 더 이상 대중들의 삶에 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의회 안에서 금배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암투일 뿐이며, 국가의 대표자인 대통령은 이미 대중들과는 괴리된 ‘제왕적’인 어떤 것이 되었다.


정치가 정치로써 기능하지 못하고 대중들과 괴리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국가에게는 종말의 선언일 것이요, 그리고 인민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끔찍한 삶으로 이끄는 지름길일 것이다. 정치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어야 한다. 정치가 진정으로 삶의 한 부분으로써 작동할 때에라야 비로소 공동체는 작동할 것이며, 민주주의가 기능할 것이고 그 속에서 시민 정치와 시민 윤리가 꽃을 피울 것이다.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야말로 ‘공공의 것’이며 인간사의 ‘모든 것’이라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는 정치가 기능하지 못할 경우 인간이 파괴될 가능성에 노출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따라서 우리가 정치를 더욱 유심히, 그리고 깊게 지켜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는 지금 포스트모던의 시대이며 한국 역시 그러한 포스트모던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정치는 ‘정치적인 것’을 필요로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문맥은 ‘탈정치’를 호출하고 있다. 한국 정치에 대한 냉소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파도를 타고 더욱 급속도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누군가 정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라는 말이 ‘쿨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상한’ 시대인 것이다. 도대체 한국 정치가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부터 이 글은 한국의 정치가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작동하지 않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며, 나는 그것을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첫 째는 한국의 정당 정치 구조의 문제, 둘 째는 정치 문화의 문제, 셋 째는 정치 과정의 문제이다. 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민주주의’의 문제가 있으며, 나는 이 민주주의의 문제야말로 한국의 정당과 의회가 지니는, 나아가 한국 정치가 전반적으로 지니는 문제점을 포괄할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II. 정당과 민주주의 : 정치적 요구의 다원화와 양당제의 한계


한국의 정치 구조는 주지하듯, 양당체제라 볼 수 있을 것이며, 여기서 양당체제란 군소 정당을 제외하고 이념적 지향이 다른 거대한 두 정당이 서로 경쟁하며 권력을 넘겨 받는, 일종의 카르텔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양당체제의 대표적인 경우라면 미국을 들 수 있을 것이고 영국도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사실상 보수당과 노동당 두 정당이 경쟁하는 시스템이므로 양당체제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정치 역시 이러한 양당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렇게 양당 체제가 고착화된 데에는 몇 가지 역사적 맥락이 존재한다.


그 역사적 맥락은 다음과 같다. 첫 째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의 서슬 퍼런 반공주의의 영향으로써, 소위 ‘일민주의’2)는 이승만 등 우파 세력의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기호 선점을 위하여 선포됨으로써 공산주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사상의 유입을 가로 막는데 일조하였다. 둘째는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산업화 동원 체제의 구축으로, 이 체제 하에서는 국가를 위한 국민의 동원과 희생을 정당화3)하는 논리가 펼쳐짐에 따라 정상적인 절차와 경로를 따라 정치적 반대가 조직될 수가 없었다. 정치적 반대가 조직될 수 있었던 계기는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였으며, 정상적인 야당의 활동―사실상 그것도 매우 보수 편향적인―은 사실상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렇듯 한국은 역사적으로 억압적인 통치 구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정상적인 경로로써 정치적 반대의 기제가 불충분하게 발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양당 체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작금의 양당제 민주주의는 언뜻 보기에는 5년 단임제와 4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 등이 실시되므로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여기에 중요한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과연 한국의 정당들이 정치적 요구들을 바르게 수렴하고 있는가? 나아가, 이러한 정치적 요구들이 효과적으로 조직되고 있는가? 단순히 선거가 정기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 올바른 민주주의의 지표라면 공산주의 국가만큼 민주적인 국가는 없을 것이다. 올바른 민주주의는 선거가 정기적으로 시행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정치적 반대가 정당을 통해, 그리고 정당 외의 수단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조직되고 있으며 그것이 정치 과정에 반영되고 있음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냉전 반공주의가 효과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보수적 민주주의’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나타내는 사회적 결과들은 거시적 차원에서는 건강하지 못한 민주주의의 성장을 나타내고 있고 미시적으로는 정치 계급4)의 고착화와 더불어 대표되지 못하는 일반 시민들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정당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를 좀 더 협소하게 보자면 ‘보수 편향적 민주주의 하에서 양당제의 한계’에 대한 논의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냉전 반공주의는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냉전 반공주의는 분명 민주주의를 보수화 하는데 크게 일조하였으며, 이는 최장집 교수의 말을 빌리면, “어떤 이념성을 수반하는 정치·사회적 조직화를 허용하는데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이념과 연계될 수 있는 정치적 조직화는 모두 허용되지 못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정치적 조건들 하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보수주의 세력일 수 밖에 없다.5) 사실상 한국의 양당 체제는 보수주의적 양당 세력의 대립이며, 그 과정에서는 시민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계급 간의 권력 쟁투에 불과한 것이 된다.


현대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이며, 보다 정치적 요구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다원적인 방향으로 제기 되고 있다. 시민들의 요구는 이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넘어 환경 개선에 대한 요구, 그리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 금지 요구 등 보다 다양하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국의 양당 체제는 이것을 효과적으로 수렴하고 있는가? 얼마 전에 있었던 ‘차별 금지법’ 통과가 극우 개신교 단체들의 협박에 통과가 좌절된 적이 있었다. 사회적으로 요구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양당 체제가 이것을 효과적으로 수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보여진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양당 체제는 시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정념을 자극하여 분노하게 함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분노를 상대 당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대리함으로써 불만을 표면적으로만 해소시켜주는,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지지 기반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분명 정상적인 양당 체제는 아니거니와 정당의 기능으로써는 더더욱 아니라고 보여진다. 설령 한국의 양당이 대중적 불만들을 효과적으로 수렴하고 있다 하더라도 양당 체제는 이제는 다원화된 요구를 수렴하기에는 벅찬 체제임은 틀림없다.


III. 정치 문화와 민주주의 : 냉소주의 이데올로기


의회 안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정치적 요구들은 대개 의회 밖 방법으로 표출되게 마련이다. 시위, 집회 등은 의회 안으로 효과적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정치적 요구들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 편에서, 정치가 올바르게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 냉소주의를 양산하였다. 단언하건대, 현대 정치의 가장 큰 징후를 꼽으라면 바로 냉소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 권위주의의 붕괴와 포스트모더니즘이 만들어낸 ‘탈-정치화 된’ 사례의 하나이자, 오늘날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태도로써의 냉소주의는 우리의 정치 문화에 아주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냉소주의적 태도로써 정치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것이 결코 옳은 것은 아니며, 한국 정치가 올바르게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냉소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냉소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냉소주의란 ‘비웃는’ 모든 태도를 지칭하는 언어 체계라고 부를 수 있다. 냉소주의의 구체적 형태는 대상으로써 나타나게 마련이다. (의회) 정치를 향한 냉소, 민주주의를 향한 냉소, 타인(내지는 적대자)을 향한 냉소, 사회를 향한 냉소 등 현대 사회에서 냉소주의는 다양한 층위에 분포하고 있으며 매우 징후적으로 발견된다. 냉소주의는 ‘방치된’ 문제들의 가장 극단화된 표현 방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냉소주의는 정치 참여를 ‘자발적으로’ 제한하는 기제로 작동하며, 타자를 향한 분노의 배설을 통하여 사회적 적대감을 형성하고,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정치 과정 자체를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정치문화를 짧은 단어로 간명하게 표현하자면 바로 ‘냉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어디로부터 발생했으며, 또 왜 이것이 일상적인 태도로 귀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냉소주의를 경계하고자 하는 시민윤리가 시급하지만, 나는 그러한 시민윤리를 요구하기 이전에 냉소주의의 근본적 발생을 지적하고 싶다. 많은 경우, 냉소주의는 소외 상태를 전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이러한 소외와 배제 상태를 발생시키는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사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냉소주의에 대한 사유는 정치-과학적 측면보다도 정치-철학적 논의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바, 이 소제목에서 다룰 내용들은 정치-철학적 내용들을 토대로 기술할 것이다.


냉소주의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나는 냉소주의란, 정치의 파국으로부터 발생하는 균열과 공백을 메우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냉소주의자들은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라는 말로 자신을 포장하기를 즐기지만, 사실상 냉소주의란 자신의 반-정치적 태도를 위장하는 정치적 태도에 다름 아니다. 분명한 것은 냉소주의는 ‘정치적 무관심’6)과는 대별되는 태도라는 점이다. 냉소주의는 정치에 참가하는 정도, 관여의 깊이에 따라 분류되는 집단이 아니라 사회에 일반적으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은 정치적 공백의 표현이며, 해소되지 못한 불만의 가장 ‘폭력적인’ 징후이다. 냉소주의에 지배 당하는 사람은 누구나 비판적이지만 동시에 정치에 가장 무관심한 이들이기도 하다.


냉소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다름 아닌, ‘대타자에 대한 극단적 향유’라는, 라캉적 명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자신의 저서 『불안정한 주체』에서 냉소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인해 현대인은 타자에 대한 극단적인 향유, 음모, 위험이라는 망상적 환상에 극단적으로 빠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7) 냉소주의 이데올로기가 빠지는 가장 극단의 길로써 파시즘을 들 수 있겠다. (물론 약간 양상은 다르지만) 유대인(타자)들이 독일의 경제를 좀먹고 있다(음모, 위험)는 집단적 망상은 홀로코스트를 잉태하지 않았던가? 대타자의 권위를 부정하는 대신 타인의 욕망에 대한 이러한 극단적인 향유는 가장 최악의 경우 비윤리적 행동조차, 스스럼 없이 행하게 만드는 기제이다. 이데올로기는 ‘허위 의식’이라는 그 특성으로부터 단순히 현실에 대한 환영이 아니라 “알지 못하고” 행동하는 것과,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8) 이는 달리 말하면 냉소주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개개인이 내면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외부에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냉소주의는 비웃는 태도이며, 근본적으로 그것은 모든 ‘억압적인 것’에 대한 냉소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에 대한 냉소는 곧 ‘아버지’로 상정되는 대타자, 즉 법과 질서 등의 상징적 권위에 대한 냉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냉소주의자들은 비웃기를 즐기며, 그들은 비웃음으로써 자신이 자신의 욕망을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르시시즘적 인격을 가지지만, 사실상 그들이 희구하는 ‘완전한 향유’는 도래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향유의 부재를 메우려는 절망적인 시도들은 대개 대타자의 존재를 믿는 정신병적 태도 혹은 대타자와 향유의 조화 가능성이라는 환상적 도착 증세로 귀결되고 만다.9) 여기서 억압적인 것이란, 소외 상태의 또다른 표현이며 이는 공통의 보편적 규범과 정언명령적 질서가 아닌, ‘타율적 규범’들이다. 우리가 어째서 5년마다 투표장에 가야 하는가? 어째서 4년마다 지겨운 국회의원의 연설을 들어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향유를 가로막는 것들이며,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비웃는’ 태도가 바로 냉소주의인 것이다.


달리 말해, 냉소주의는 정치가 보편적 규범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며 그만큼 ‘공통된 것’이 실종된 정치의 공백 상태를 말해주는 또다른 이름이다. 우리가 ‘공통적인 것’을 회복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는 이 글에선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한국 정치가 ‘공통의 것(Commons)’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명백하다. 이제껏 한국의 보수주의 양당이 이루어온 정치 대결 구도는 ‘정치적인 것’으로써 우리 삶의 ‘공통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따위의 질서만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정치철학적 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역사적으로 한국 정치가 인민들의 주체적 참여가 허용된 생산적 과정으로써 ‘공공의 것’이라기보다는 오로지 정치 계급과 이념의 수호를 위한 증오와 배제의 연속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작금의 냉소주의는 어쩌면 한국 사회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된 괴물일지도 모른다.


IV. 정치 과정과 민주주의 : 배출되지 못하는 정치적 불만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 과정에서 어떠한 것이 문제인가? 나는 한국 정치 과정의 가장 큰 문제를 두 가지로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법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념적 공백의 문제이다. 주지하듯이, 한국의 법은 그 공백이 상당히 많으며 나아가 법의 적용이 그렇게 신뢰 받지도 못한다. 또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곳에서 대안적 이데올로기, 이념이 작동한 토양 역시 조성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의회는 건강한 비판과 대안적 논의가 오가는 정치 과정의 조성보다도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누가 더 충실하게 구현하는지를 두고 벌이는 각축장 정도로 인식되었다.


법이 신뢰 받지 못하며, 또한 악명 높은 사법 살인이 존재하던 권위주의 정권을 겪어온 한국 정치에서 법이 지니는 위치란 매우 이중적이다. 한 측면에서는 일종의 구제 수단이자 다른 측면에서는 공격의 수단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에서 법이 구제 수단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역사가 아니며, 오히려 한국 정치에서 법은 지배 세력이 피지배 세력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써 기능하는 측면이 다분했다. 특히, 법은 보수주의,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를 지탱하기 위한 도구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으며, 그러한 법의 대표적 사례는 ‘국가보안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서슬 퍼런 칼날은 보수주의 이념을 조금이라도 건드리거나 자극하는 논의를 원천 차단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이용되었고, 그 결과 진보주의 내지는 대안 사회에 대한 건강한 논의와 조직화는 사실상 거세된 상태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노동조합을 건설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사실상 법의 명령은 ‘국민 동원 체제’를 강조함으로써 이것을 어기는 즉시 법에 의해 추방되는 구조였으며, 이것은 건강한 시민사회가 성장할 싹을 원천적으로 잘라내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건강한 시민 사회가 성장하지 못한 국가의 민주주의란 권위주의적 통치 양식을 보존한 천민민주주의로 귀착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정치의 부패이며, (법의 제한에 의해) 참여의 통로가 매우 좁으므로 선순환 구조로써의 정치 참여란 기대하기 어렵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참여의 통로란 무엇인가? 첫 째, 자유로운 반대의 표현이 가능해야 하며 둘 째, 그러한 반대의 표현이 기성정치권으로 수렴될 수 있도록 정당이 충분히 기능해야 하며 셋 째, 기성 정치권과 시민 사회 간의 거버넌스 구축을 통한 상호 작용이 필수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서 이 세 가지 조건이 충분히 만족되고 있는가? 나의 대답은 “아니”다. 이 모든 문제들은 여전히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제한을 받고 있으며, 건강하지 못한 야당과 너무나도 약하디 약한 시민사회는 정치적 반대를 효과적으로 조직해내지 못하고 있다.


야당이 약한 것은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민주화 이후의,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대안적 정부는 야당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정치적 관심사는 야당이 얼마나 정치적 개혁을 잘 수행해내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뽑힌 대안적 민주정부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시민들의 기대와 성취 간의 격차가 크게 나타나면 대중은 실망하게 되며, 급기야는 민주정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추락까지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민주정부에 대한 실망과 민주정부의 추락은 과거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를 불러들이며, 나아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10) 


야당이 약하다는 것은 제도권 정치 내에서 야당이 훌륭하게 정치적 개혁을 수행할 능력이 부재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그들이 정치적 불만들을 효과적으로 수렴하지 못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결국 사회 내에 불만들은 누적되며, 그것을 수렴하지 못하는 야당은 갈수록 지지 기반을 잃어 갈 수 밖에 없고, 배출되지 못하는 불만들은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향해 화살을 돌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과정이 올바르게 작동하는 것이란 필수적인 조건이며, 올바른 정치 과정이 차단되었다는 것은 대중의 불만과 요구가 기성 정치권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남는 것은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불만의 화살을 엉뚱한 데에 돌려 상징적으로 해소하는 것과 강력한 정치적 개혁이 단행되는 것이다. 전자는 파시즘이며 후자는 혁명 혹은 그에 준하는 정치 개혁적 요구의 폭발이다.


V. 민주주의에 관한 대안적 시각 :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의 디지털의 발달과 보다 많은 민주주의 연구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는 바, 나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색하고자 민주주의에 관한 대안적 시각을 짧게나마 언급해보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지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개선 방향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최근까지 제시된 민주주의 모델 중 가장 현실성 있는 것은 심의민주주의 혹은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로써, 민주주의를 선거와 투표의 일련의 행위가 아니라 공공선에 대한 호소, 즉 공적 이성을 사용한 소통 수단으로써의 민주주의를 가리킨다. 하버마스(J. Habermas)는 민주주의의 정당성이 개방과 평등이 실현된 공간에서 사려 깊고 능력 있는 시민들, 즉 ‘공적 이성’을 사용할 줄 아는 시민들 간의 자유롭고 공적이며 합리적인 토론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심의민주주의 또는 숙의민주주의자들은 투표로 대체되는 관행보다 논쟁과 토론을 중요시한다.11)


심의민주주의에 대한 주된 비판 사안은 인종·성·국경을 넘어선 평등을 전제로 한 토론이 가능하냐의 여부와, 특정 집단에 대한 사회적 배제가 계속되는 한 심의민주주의에서도 공공담론에서 배제되는 집단이 나올 것이라는 비판이 주요 내용이다.12) 나는 이 글에서 심의민주주의가 가능한가 혹은 그것이 어떤 모델을 통해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다만, 나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이 보다 활발하며 거의 무제한적인 가상적 소통의 대륙을 제공하였고, 나는 이로부터 심의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나는 정치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민주주의가 올바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치 역시 그만큼 어딘가 고장났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요컨대, 민주주의와 정치는 포함 관계가 아니라 등치 관계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언뜻 그 자체로 ‘어쩔 수 없는’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상 모든 곳에서 대의제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 대표의 불완전성의 문제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선거만으로는 대표될 수 없는 정치의 고유한 속성 때문이다. 투표 용지는 담론을 담지 못한다. 모든 정치적 담론으로써 ‘말의 무대’13)가 사라진 채 투표용지만 난무하는 사회란 참으로 기계적인 사회일 것이다. 나는 소통의 확대, 즉 평등한 ‘말의 무대’가 확대됨으로써 민주주의가 보다 완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디지털의 발달은 우리에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음은 틀림없다.


디지털의 발달과는 별개로, 구체적인 수준에서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보다 넓은 지평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요구로 할 것이며, 나아가 그러한 자유를 바탕으로 정치적 반대가 폭넓게, 그리고 단단하게 조직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나는 공무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고자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아주 당연하게―지지하는 편이다. 사회 내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집단은 각각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를 자유롭게 결집하여 표현할 자유가 있으며, 그러한 표현과 결사의 자유야말로 정치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정치적 반대가 조직되는 것이 사회적 혼란을 낳을 것이며 무절제한 요구들을 국가가 감당해낼 수 없다고 변명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국가의 한계나 사회의 수용 한계의 문제가 아니라 정당의 문제에 더 가깝다. 사회는 지금보다도 더욱 더 많은 정치적 요구들을 생산해낼 수 있으며, 개방된 공간은 더 많은 정치적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정당의 역할이 무엇인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요구들에 반응하며 대중의 불만과 요구를 조직해내는 전문적 집단이 아닌가? 대중의 요구를 수렴하지 못하는 정당이라면 즉각적으로 폐기되어야 옳다. 비어있는 공간은 새로운 정당이 생겨날 틈바구니를 제공한다. 활발한 정당의 활동은 시민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으며, 대중의 요구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 이러한 정당 활동은 정당이 그 혼자 독자적으로 헤쳐 나갈 문제가 아니라 시민 사회와의 공조 속에서 이루어가야 할 문제들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우리 사회에 시민 사회는 생기를 되찾을 것이며, 시민윤리가 싹트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요구가 국정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 체감적으로 느껴질 때 사람들은 더욱 더 정치를 신뢰하게 될 것이며 정부-정당-시민사회 3자 간의 정치적 유대 관계의 구축은 훌륭한 거버넌스를 이룩하기 위한 첫 번째 단추이다. 


VI. 결론을 대신하여


상기의 모든 논의들은 한국의 정치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정당과 의회가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며, 한국 정치의 문제들을 해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념들을 동원하기는 하였으나 그 핵심은 ‘민주주의의 올바른 작동’이라는 테제로 요약될 수 있다.


나는 민주주의가 ‘올바른 체제’라는 가치 판단보다는, 인간이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통로로써 정치를 이용하기 위한 가장 ‘좋은(good)’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어떤 수단도 아니거니와, 더욱이 언제든 중지될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란 인간이 「정치적 동물」인 한, 언제든 어디서든 정치적 공동체 안에서 작동해야 하는 규범이며,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작동하는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건강하며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는가는 정당과 의회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문제임과 동시에, (정치철학적 차원에서는) 정치적 주체성의 문제와도 관련한 것이다. 모두가 사실상 소외된 상태라면 그것은 올바른 민주주의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죽은’ 민주주의라고 보아야 한다.


다양한 인간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어 왔으며, 더욱 급진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들도 증대되어 왔음은 역사가 드러내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주의가 어떻게 부패하였고 어떻게 인간을 타락시켜 가며 얼마나 파국으로 몰아넣는지 역시 낭자한 선혈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이성의 기획임과 동시에 파국의 예언자와도 같다. 어떤 면에서, 민주주의는 인민을 전제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구원자이면서, 인민을 옭아매는 사슬과도 같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윤리적 규준들을 끊임없이 요청하고 있지만, 그러한 규준들의 합의가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과학 기술은 기존의 윤리규범을 뿌리 채 뒤흔들면서 발전하고 있다.


풍문일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과학기술은 어느새 뇌에 전기신호를 보내어 기억을 조작하는 방법까지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누군가 나의 기억을 조작한다는 것, 우리가 여기에 맞선 정치적 결단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의 정치는 이러한 끔찍한 문제들을 논제로 올릴 수 있는가? 민주주의는 정당과 의회가 올바르게 작동하는 것의 문제도 있겠으나, 더 중심에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권한을 전적으로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신을 절대적 위치에서 끌어내렸고 더 이상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인간이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어떤 문제 상황에 대하여 우리가 전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내려야 한다는, 극단적인 자유를 의미한다.14) 이런 의미에서 ‘올바른 정치’에 대한 사유가 요청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자 매우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정치란 본디, 인간의 삶의 행복을 위해, 삶의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며 정치를 단순히 의회와 정치인들의 전유물로 바라보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관점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비판적 의식이란 단순히 뇌물을 받고 비리를 저지르는 부패한 정치인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삶의 문제들을 사유하고 그것들을 정치적으로 전유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한국 정치의 미래가 그렇게 밝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점점 더 소비적 경향으로 흐르고 있으며 정치 역시 갈수록 삶의 문제를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기호, 그리고 더욱 자극적인 슬로건으로 대중 앞에 등장하고 있다. 이런 식의 정치와, 정당과, 의회가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 정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VII. 참고 문헌


진덕규, 『한국현대정치사서설』, 한국현대정치사연구 1, 지식산업사, 2000

최장집 저, 박상훈 개정,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2

Rod Hague, Martin Harrop, 『Comparative Government and Politics』, 8th edition, Palgrave Macmillan(번역 출판 명인문화사), 2011

Anthony Giddens, 김미숙 외 6인 옮김, 『현대 사회학(Sociology)』, 6th edition, 을유문화사, 2011,

이극찬, 『정치학(政治學)』, 법문사, 1999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오월의봄, 2013

인디고 연구소 기획,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궁리, 2012

홍준기, 『슬라보이 지젝의 포스트모던 문화 분석-문화적·정치적 무의식과 행위(환상을 통과하기)』,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 22집, 2004,5.

홍준기, 『이데올로기의 공간, 행위의 공간-슬라보예 지젝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 5권, 제 3호, p.197-275, 2008

문장수, 『쟈크 라캉의 주체 개념』, 새한철학회, 철학논총 제 56집, 제 2권, p.394-415, 2009

김현, 『슬라보예 지젝의 정치적 주체 이론』, 민주주의와 인권 제 10권 1호, p.293-319, 2010.4

채오병, 『지구화를 통한 지역화-남한의 탈식민 국가 문화』, 비판사회학회, 경제와 사회 통권 제 80호, p.224-247, 2008.12.



1) 최장집 저, 박상훈 개정,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2, p.8

2) 채오병, 『지구화를 통한 지역화-남한의 탈식민 국가문화』, 비판사회학회, 경제와 사회 통권 제 80호, 2008.12. p.224-247 참조.

3) 진덕규, 『한국현대정치사서설』, 「제 3장, 한국의 국가와 통치체제」, 한국현대정치사연구 1, 지식산업사, 2000, p.231 참조.

4) 이탈리아 정치사회학자 모스카(G. Mosca)의 개념. 당원과 지지자들의 이익 실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소수 정치 엘리트를 이르는 말.

5) 최장집 저, 박상훈 개정,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2, p.79

6) 로버트 달(Robert. A. Dahl)은 정치참가의 성층으로써 ⓵ 권세자(the powerful), ⓶ 권력 추구자(the power-seeker), ⓷ 정치적 관심층(the political strata), ⓸ 정치적 무관심층(the apolitical strata)로 분류한 바 있고, 일반적으로 주체적 노력으로써 능히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변성의 기대’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정치적 관심이 높아지는데 반하여,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체념이 지배되기 쉽다고 주장하였다. 라스웰(H. D. Lasswell) 교수는 비-정치적 태도에 대하여 ⓵탈-정치적(depolitical) 태도, ⓶무-정치적(apolitical) 태도, ⓷ 반-정치적(antipolitical) 태도로 세분화한 바 있다. 이극찬, 『정치학(政治學)』, 제 6 개정판(1999), 법문사, p.314-316 참조.

7) 홍준기, 『슬라보이 지젝의 포스트모던 문화 분석-문화적·정치적 무의식과 행위(환상을 통과하기)』,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 22집, 2004.5, p.198

8)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허위 의식, 즉 현실에 대한 환영적 표상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비지식’ 혹은 ‘알지 못함’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 여기에서 ‘알지 못함’이란 단순히 지적인 인식의 유무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행위’, 그리고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하는 행위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홍준기, 『이데올로기의 공간, 행위의 공간』,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 5권, 제 3호, 2008, p.204

9) 홍준기, 『슬라보이 지젝의 포스트모던 문화 분석-문화적·정치적 무의식과 행위(환상을 통과하기)』,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 22집, 2004.5, p.210-211

10) 최장집 저, 박상훈 개정,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2, p.148-149

11) Rod Hague, Martin Harrop, 『Comparative Government and Politics : An Introduction』, 8th edition, Palgrave Macmillan(번역 출판 명인문화사), 2011, p.105. 

12) 같은 책, p.105

13)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개념.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다른 힘들의 대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이며, 랑시에르는 이것을 ‘불화’로 개념화한다. 불화란 ‘말의 무대’이며 이것은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바, 분할의 논리에 맞서 평등을 가시화하는 무대이다. 이 무대에서의 일차적 문제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가 아니라, 무대의 성립 여부이다. 즉, 여기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 하나의 ‘말’로써 인정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은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그가 제시하고 있는 주제는 과연 논의할 만한 주제인가가 이 불화의 무대의 논점을 구성한다. 왜냐하면 이 무대의 구성 자체는 불평등의 논리에 대한 전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저,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오월의봄, 2013, p.369-370 참조.

14) 인디고 연구소 기획,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궁리,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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