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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제국(Evil Empire) : 숙명 #Chapte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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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Nachthexen
추천 : 1
조회수 : 2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1/03 15:06:44
Chapter 4 


크루이드 왕국의 궁전, 모두가 잠든 짙은 새벽녘. 빼곡히 늘어선 고층 건물들이 구름도 달빛도 가리는 문명의 깊숙한 심장부 아래서, 누군가 자조적인 웃음을 띄며 유유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데키몬드 국왕. 그는 홀로 방랑을 즐기며 한창 궁전 곳곳을 거닐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최근,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르는 기분 나쁜 사건들이 주변에서 하나 둘 씩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음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와 그를 따르는 가신들이 그토록 시기하고 질투하던 루이번 왕국이 일순간 멸망의 길로 들어섰음은 분명 그들에게 있어서 반가이 느껴질 소식임이 옳았다. 그러나 그 사건의 일면에는 은근한 찝찝함 역시 함께 서려있었기에, 그 사실이 한 편으론 그들의 상심을 가중케 하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그는 뒤이어 궁전의 높디 높은 전망대에 홀로 올라서서 가이없는 도시의 경관을 천천히 굽어살폈다. 어쩌면 그는 그런 상념들을 황홀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의 경관에 잠시 묻혀, 조금이라도 잊어 볼 심산이었을지도 몰랐다. 


“...

어찌 됐든, 그는 높고도 높은 궁전 위의 전망대에 올라가 어딘가 답답한 듯 심오한 표정을 지으며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보려고 애썼다. 주변을 살피니 크고 작은 고층 건물들로부터 발산되는 불빛들이 왕국의 야경을 묵묵히 장식하고 있었다. 그 불빛들은 화려했지만 어쩐지 희미했다. 서늘한 바람도 그의 주변을 겉돌았다. 그리고 주변은 적막할 정도로 고요했다. 고단함의 침묵 속에서 그는 다만, 정리되지 않은 많은 상념들만을 떠올릴 뿐이었다. 그러자 내면 속 깊이 감춰졌던 고독과 환멸의 감정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마음 깊숙한 곳을 잠식했다. 그것은 아마, 죽음과 무지(無知)에 관한 것일 게다. 그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또, 그들은 왜 그러한 필연을 맞을 수 밖에 없는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의문은 그들에게 있어서 지극히 원론적인 것이었다. 과거 수 많은 세기의 철학자들이 죽음에 관한 고뇌를 거치며 사변적인 담론을 나누었고 또 그 과정에서 그럴 듯한 여러 견해들을 내놓았지만, 정작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그들조차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 다름 아닌 죽음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살아있었을 적에, 마치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서 밤하늘을 지키는 수 많은 별들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들이 종래에 모두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답할 지도 모른다. ‘생전에 진리를 떠들고 다니던 그 모두가 결국은, 예외 없이 정해진 우주의 섭리를 따랐다고. 그래서 그들은 단지 한 줌의 재와 흙더미로 변했다고.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여읜지 수 십 세기가 지난 지금, 어떤 이도 그 이름 조차 감히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고.’. 그것은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렇게 고뇌하고 방황하며 찾으려고 애썼던 그 모든 것들은 단지 그들 운명의 종지부였던 한 줌의 흙더미와도 같았다. 혹은, 겨우 그 만큼의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 헛된 췌언(贅言)이었다거나 말이다.


“모든게 그저 헛된 일에 불과한 것을...

데키몬드 국왕은 내심 속으로 무한한 삶을 염원하고 있었다. 혹은 그에 비견하는 어떤 거대한 진리나 힘을 바랐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는 진정 독실한 악마교 신자였으며, 십 년 남짓 남은 시간 내로 그의 생을 마감하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그가 자부하는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악마교 세력들을 이 세계에, 이 광활한 디아벨라 대륙에 무사히 뿌리내렸고 예로부터 암묵적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사악한 마법을 계승 및 발전시켜 인류의 잠재적인 발전을 이끌어낸 바 있었다. 창조교 신자들이 그들을 두고 이단이라고 비난하며 맹목적인 증오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할지언정, 때론 어둠이 빛을 압도할 때도 있는 법.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이 바로 그 시기라는 것을 정확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진정으로 염원하는 영생이라는 것이 과연.. 나약하고 어리석은 필멸자들이나 꿈 꿀 법한 오만함으로만 단정지을 수 있는가? 그것은 그 해답을 이분법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정의내리기엔 확실히 난처한 질문이었다. 또, 예컨대 그런 그의 심정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쓰디 쓴 비통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한가지 희망이 될 만한 단서가 있었다. 그는 비록 완벽하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한 편으론 며칠 전에 일어났던 화염 폭풍과 루이번 왕국의 갑작스런 파멸이 그가 숭배하는 어떤 거대한 존재’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데키몬드 페하, 아직까지 주무시지 않고 이 곳에서 홀로 무얼 하고 계셨던 겁니까?

데키몬드 국왕이 누군가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의 책사인 테번이 근위병 몇 명과 함꼐 그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그 분들’ 생각에 잠시 깼던 것 뿐일세. 상관하지 말게.

그는 다만, 충족되지 않는 이 메마른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서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홀로 쓸쓸히 궁전을 방황하며 어떤 이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윽히 궁리할 수 있는 그런 고뇌의 시간 말이다.


“안색이 썩 좋아보이진 않으십니다.

어쩌면, 다소 형식적으로 들릴 지도 모를 자질구레한 안부 인사였다.


“어찌 보면, 한참을 생각해도 모를 일이야...

...

안부를 묻는 가신들의 태도가 어떻든, 데키몬드 국왕은 전혀 개연치 않고 혼자서 그렇게 조용히 중얼거리기만 했다. 테번은 그런 그가 조금은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연민의 눈길이었는지 상심의 시선이었는지는 각자가 받아들이기 나름의 문제였다.


“내가 지난 영겁의 세월 동안 행하고 이룩해냈던 많은 일들이.. 이제 와서는 그 모두가 부질없게 느껴진다네. 행여, 그대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폐하가 개척하고 일구어낸 이 영광스런 문명의 산물을 보시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추잡하고 어리석은 창조교 놈들을 이 땅에서 모두 몰아내고 저희를 비롯한 여러 필멸자들에게 진정한 진리에 관한 깨달음을 가르쳐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럼에도 어찌 그 거대한 위업이 단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며 그리도 쉽게 단정지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나도 한 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네.

데키몬드 국왕은 그저 그들의 회답에 소리 없는 탄식을 토해낼 뿐이었다.


“그 땐 모든 것이 명백했고, 확신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넘쳐났었다네. 그러나 지금은 아니지. 척박한 이 대지에서, 나는 여지껏 ‘그 분들’의 교리와 신념을 숭배하는 악의 제국을 세우기 위해 부단한 투쟁을 아끼지 않았다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댓가로 내 삶의 종언을 보았고 이제 그 어떤 것으로도 도려내지 못할 태생적 필멸성을 깨닫게 되었다네. 내 심정은 너무나도 비참했던 나머지, 속으로만 그렇게 괴로움을 삭히고 있던 찰나였지. 그래서 난 문득 생각했다네. 어쩌면 내가 막연한 신념에 깊이 잠식되었던 그 시절의 태도들은.. 말하자면, 미처 깨닫지 못한 자의 교만 따위와도 같은 헛된 몽상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일세.

“폐하, 저희는 그저...

데키몬드 국왕에게 재차 물어야 할 것이 분명 남아있었지만 어쩐지 테번은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써 날 설득시키려 하지 말라.

“...

국왕의 단호한 꾸짖음에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데 그 때였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런 오한이 그들을 덮쳐왔다. 찰나의 순간 전까지만 해도 서늘하게만 느껴졌던 바람이 이내 차갑고 매서운 눈보라로 돌변했음을 느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 이건...

그들의 주변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압도적인 어둠에 시야가 마비되어 아무 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데키몬드 국왕은 그나마 그의 곁에 근접하여 있었던 책사 테번과 몇 명의 근위병들만을 가까스로 인지할 수 있었다. 단지 그 것이 전부였다. 


“이런 일은 전에 겪어본 적이 없었지.

“...저희 또한 그렇습니다.

그들의 표정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한창 역력하던 찰나, 그들은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고 섬뜩하게도 어둠의 심연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실체는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포심들을 합한 것 보다도 더 괴기스러운 어떤 이질적 존재였다. 


“이럴 수가...

“아아...

그 소름끼치는 괴수는, 언뜻 보기에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듯 하면서도 혐오스러운 촉수와 포자들이 어지럽게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피부에는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없는 수 많은 괴사 조직들과 기분 나쁜 농액 줄기들이 흐르고있었다. 그 역겨운 자태를 두 눈으로 직접 실감한 근위병들은, 참을 수 없는 메스꺼움에 불과 수 시간 전 먹었던 것들을 모두 토해냈다. 괴수는 그런 그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마냥 즐겁기라도 한 듯, 가까이 다가가 간악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경 발작을 일으키며 결국 괴수와 같은 형태로 빠르게 변해갔다. 그럼에도 아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데키몬드와 그의 책사, 테번 뿐이었다.


“무지하고 약해 빠진 것들 같으니... 쓸모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가소로운 것들.

괴수가 기다랗고 흉측하게 생긴 혓바닥을 내두르며 그들을 마음껏 조롱했다.
 

“네 놈들은 두려운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구나. 이런 흥미로운 노리개들을 찾아낸 것도 아주 오래간만이야. 네 놈들은 어쩌면 나를 즐겁게 해 줄 수 있을 것도 같단 말이지.

“당신이 우리가 숭배하는 ‘그 분’입니까?

“질문은 어리석은 자들이나 일삼는 것이다, 가련한 필멸자여.

흉칙한 괴수는 그들에게 조력을 건네줄 의향 따윈 전혀 없어 보였다.


테번, 그대의 뒤를 조심하게...!

그 때였다. 괴수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책사, 테번이 방심한 틈을 타 완전히 커럽터로 변모한 근위병 무리들로부터 뜻밖의 기습을 받았다.


아악...!

테번이 습격을 받고는 이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너희들은 죽어도 마땅하다. 여지껏 미련한 네 놈들을 나의 근위병으로 명한 내 어리석음 또한 크구나.

데키몬드 국왕이 그의 휘황찬란한 데스 웨폰을 꺼내들고 변절한 그 무리들을 향해서 격노의 일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그 무리’들은 한 줌의 잿더미가 될 때 까지 불타올랐다. 테번은 국왕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으나, 어깨와 팔이 그들의 공격을 받고 일부가 뜯겨나간 상태였다.


크흐흐흐흐흐...

...

괴수의 웃음소리가 난감한 처지에 놓여 있는 그들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온 주변에 울려퍼졌다. 한참을 그렇게 멸시의 눈길로 바라보던 괴수는 이내 그들을 매서운 눈길로 쏘아보더니 수치스러운 심문을 시작했다.


데키몬드. 난 네 놈이 진정 염원하는 것을 알고 있지. 네 놈들이 불멸성이라고 부르곤 하는 것들 말이야...

당신이 제게 그 불멸성을 부여해주실 수 있으리라 감히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진실로 가소로운 것. 네 놈 따위가 감히 영원한 삶을 원한다는 것인가?

괴수가 증오인지 조소인지 모를 가증스런 웃음을 흘기며 회답했다. 그러나 데키몬드가 괴수를 향해 대한 태도는 여지껏 그의 앞에서 한결같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 여느 가엾은 필멸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아마, 괴수는 그런 그의 태도에서 감명을 받아 조금은 더 그를 농락하고 가지고 놀기에 적합할 것이라 판단했을 지도 몰랐다.


화염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는 그 광활한 광야에 관해서 아직 기억하는 바가 있겠지? 내가 알기로, 네 놈들도 전에 소식으로나마 우연찮게 접했을 것이다. 어떤 무지한 필멸자들은 그것을 두고 소생이 더 이상 불가능한 불모지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지만, 그 실상은 엄연히 이계의 존재들이 살아숨쉬고 있는 거대한 성역이다. 다만, 네 놈들이 몹시나 무지했던 탓에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뿐이지. 더 이상 긴 말은 하지 않겠다. 그 곳에 무사히 다다르면, 나의 충직한 하수인들이 네 놈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서두르지 않으면 굶주린 그들이 네 놈들을 산산히 도륙내어 종래엔 게걸스럽게 씹어삼킬 것이니 각오하라.

“시련을 이겨낼 각오는 이미 충분히 되어 있습니다. 나의 절대자여.

“겨우 그 정도의 천박한 포부를 가지고 감히 각오라 말할 수 있는가? 과연 오만하구나. 예컨대, 진정한 각오라는 것은 지옥의 연옥(煉獄)에 갇혀서 펄펄 끓는 용암 위를 딛고, 휘몰아치는 화염 폭풍을 맞아가며 매 순간 그렇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뎌내는 것과 같음을 그대는 모르는가? 이 어리석은 자여, 난 네 놈이 진정 그만한 대가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친히 시험할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네가 맞게 될 숙명적 시련을 끝내 이겨내지 못한다면...

“이겨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그 괴수는 사악한 웃음을 소름이 끼치도록 자아내며 조용히 회답했다.


“죽음보다 더한 징벌을 내릴 것이다. 고문을 즐기는 내 하수인을 시켜서, 영겁의 세월 동안 네 놈의 살가죽을 벗겨내고 그 육질을 고통스럽게 도려낼 것이다. 끝나지 않을 무한한 괴로움을 겪게 되겠지. 네 놈들의 생과 사는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회답을 마친 괴수는 갑자기 미친듯이 그들을 비웃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을 속절없이 잠식하고 있던 적막한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어둠이 완전히 걷히고 나서야 그들은 마침내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약 세 번 가량 울렸음을 가까스로 인지할 수 있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아까 전, 테번을 덥쳤던 변절자들의 꺼림칙한 시체와 한 줌의 검붉은 잿더미가 어지럽게 놓여져 있었다.


“이 불결한 것들이 저의 기분을 상당히 거슬리게 만듭니다.

테번이 아까 전 방심하다 그들에게 습격당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이내 조각나고 흩뿌려진 시체 조각들을 사정 없이 짓밟기 시작했다. 짓밟힌 시체 조각들에서 탁하고 누런 고름덩어리가 잔뜩 새어나오더니, 뒤이어 차가운 바닥을 특유의 더러운 온기로 가득 적시었다. 문득 역겹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그 불순한 행위에, 테번은 사실 은근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시체 조각은 한 덩이의 핏멍울이 될 때까지 심하게 물러터지고 으깨져서 더 이상 그 흔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고도 한 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테번은 제 정신을 부여잡고 거칠어진 한 줄기의 숨결을 내뱉었다. 국왕은 그런 그를 그저 묵묵히 지켜보다가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나지막히 말을 건네었다. 


“책사여...

“말씀하십시오.

“그대도 ‘그 분’의 회답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네. 지금 당장 나의 가신들을 불러모으게.

테번은 아까 전의 충격이 차마 가시지 않은듯, 다소 망설이나 싶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순응했다.


“당신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아니지. 이건 ‘그 분’의 뜻이라네.

국왕의 왕좌가 안치되어 있는 적막한 궁전 내부. 데키몬드 국왕은 숙연히 가신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고는, 그들이 늦게나마 사태의 심각성에 관해서 눈치채는 기색을 보이자, 그제서야 국왕은 기다렸다는 듯 표정에 엄숙함을 띈 채로 그의 경직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의 충성스런 가신들이여.

...

국왕이 앉아있는 *흑마석(Devilstone) 왕좌가 유난히 어두운 빛깔을 자아내며 궁전 내부를 다소 흐릿하게 비추었다. 왕좌로부터 뿜어져나오는 그 빛이란 것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의 어둠을 밝히기엔 그 세기 면에서 어쩐지 미약한 느낌이 있었다. 게다가, 외설적인 모습을 한 음침한 악마 형상의 석고상이 기둥과 벽에 그려진 기이한 분위기의 그림들과 오묘한 조화를 이룸르로서 내부에 한층 더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만들었다. 그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기는 것들로부터 어떻게든 시선을 피하고 싶어서라도, 가신들은 국왕의 행동과 어조에 모든 감각을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건대, 나는 방금 전 ‘그 분’과 영접했었다네.

국왕의 진술은 그들이 갑작스레 받아들이기엔 다소 설득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국왕의 말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려고 애썼다.


“그렇다면, ‘그 분’으로부터 어떤 회답을 받으셨습니까?

“그 분꼐서 말씀하기를, 자신들과 조우하고 싶다면 지금 즉시 ‘불타는 성역’으로 오라고 하시더군. 최근에 화염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그 문제의 지역 말일세.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분명 거기에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네.

“우리가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 조금은 들어맞은 것 같군요.

국왕은 가신들의 대답에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곳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는 극단적인 환경에 버틸 수 있을 만한 장비들을 갖추고 나서 움직여야 합니다. 마침 격납고는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았으니, 그 곳에 보관된 예비용 *파워 슈트들을 꺼내어 장비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죠.

테번은 의외로 치밀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모두가 미처 간파하지 못한 부분까지 완벽히 대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모두들 이동할 준비를 하게. 애석하게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이제 얼마 없다네.

저 역시도 ‘그 분’들과 어렵게 맻은 신뢰를 이제 와서 이렇게 깨뜨리고 싶진 않습니다.

그들은 격납고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테번이 특수 도금 처리된 파워 슈트를 일행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선, 혹시 모를 위기 상황을 대비하여 페로민 주사도 함꼐 챙기기로 결정했다. 페로민은 마약의 일종으로서, 투여하면 진통 효과와 함꼐 형용할 수 없는 쾌락을 선사하여 그 가치가 매우 높았다. 비록, 부작용으로서 강도 높은 타락화 증상이 발현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것에 굳이 신경써야 할 이유 따윈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조차도 신의 ‘축복’이라 여기며 숭고하게 받아들여야만 그것이 진정 ‘그들’다운 태도였다.


불타는 성역까진 반드시 수송용 차량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테번이 미리 대기시켜놓은 수송용 장갑차가 그들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에리스 수송선이라고 불리우는 이 차량은 견고한 갑판으로 무장된데다가, 지상으로부터 일정 거리만큼 떠 있었기에 거칠고 험난한 지형도 특별한 제약 없이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었다. 그들 앞에 놓여진 빛나는 문명의 산물은, 단언컨대 뜨거운 열기와 험악한 지형으로부터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모두들 오르시지요.

국왕과 그의 가신들을 태운 에리스 수송 차량이 신속하게 왕국의 수도를 벗어나 국경선 근처까지 인접했다.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국경선 근처까지 이동하는데엔 이렇다 할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곧, 화염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와 잔재가 그들 눈앞에 똑똑히 비춰졌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 규모는 굉장히 거대했다.


“놀라울 지경이군.

“...

좁디 좁은 수송 차량 안에는 그에 걸맞는 조그마한 창문이 여럿 붙어 있었는데, 그 것들을 통해 간신히 볼 수 있었던 것은 안타깝게도 오로지 절망과 죽음이 전부였다. 예컨대, 모든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이나 처참했고 살아남은 생명의 흔적 역시 도무지 포착해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용암이 들끓고 화염이 소용돌이 치고있는 이 지옥같은 곳에서 나약한 필멸자들 따위가 찰나의 시간을 견디기란 곧, 또 다른 죽음을 의미했다.


“이런 곳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갈망하는 ‘그 분들’과 어울리는 장소지.

“저 역시 당신과 같은 생각입니다.

국왕과 그의 가신들은 그 모두가 실로 비장한 태도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몸이 모두 화염에 휩싸여 결국 그렇게 비참히 일생을 마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절대로 무의미한 결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절대자가 내린 마지막 특혜이자 영광스런 죽음이었다.


“이제 내리셔야 합니다.

테번이 모두를 재촉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예컨대 격렬한 화염 폭풍이 대지를 깎아내고 걸쭉한 용암이 암반을 용해하는, 실로 극단적이라 할 만큼의 악조건을 자랑했다. 에리스 수송선의 문이 열리자 테번은 내리라는 신호를 보냈고, 뒤이어 가장 먼저 물러터진 지반에 무사히 발을 디뎠다. 국왕이 이내 그의 뒤를 따르려고 하는 순간, 탑승 전 까지만 해도 문짝에 달려있었던 안전 손잡이 부분이 갑작스레 없어진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분명했던 자신의 기억을 문득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 곳의 지옥같은 열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녹아버린 걸 겁니다이 곳의 살인적인 환경 때문에 그럴 만도 하죠. 손잡이 부분을 미처 도금하지 못했다거나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값싼 재질로 대충 때웠을 겁니다. 제 아무리 능한 제조업자라도 지옥에 제 발로 들어가는 자의 안위까지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던 게죠.

“그대의 말이 옳다. 누가 이런걸 생각이나 했겠나?

데키몬드 국왕이 자조섞인 웃음을 지어보이며 한껏 여유로움을 과시했다. 다행히도 그들이 장비하고 있던 파워 슈트가 일대의 압도적인 열기로부터 충분히 보호해주고 있었기에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방심하긴 확실히 이른 때였다. 발을 헛디뎌 날카로운 암반에 넘어지거나 행여 흉폭한 지옥 괴수의 습격이라도 받아서 그들의 슈트에 구멍이라도 나는 순간, 죽음은 단연코 확정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운명이란 것은 예컨대 반드시 자애롭지만은 않은 것이어서, 그 누구도 상황이 어떤 식으로 급변할지 결코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마침 그들도 인고의 시간을 견뎌오며 그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었기에 속으론 방심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방심이라도 했다간, 잿더미도 남지 않고 모두 타버릴 것이네.

테번이 보다 진지한 어조로 주의를 요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납득하는 신호를 보냈다.


“모두들, 저길 보게.

데키몬드 국왕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모두들 짙은 어둠에 휩싸인 거대한 궁전과 도시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것들은 분명 지옥 같이 맹렬한 열기 속에 타오르고 있었기에 그들의 예상대로라면 눈이 부시도록 밝아야 함이 당연했으나, 어쩐지 그런 느낌과는 무관하게도 지극히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자태는 가히 꺼림칙하다고 논할 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황홀한 광경에 완전히 압도되어 잠시나마 종교적 숙원을 이룩한 듯한 영예로운 환희를 만끽하였다. 


“우린 저길 향해서 계속 걸어야 합니다.

테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은 걸쭉하고 물렁한 대지를 걷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그들의 발이 용암 구덩이에 빠져 끔찍한 곤욕을 치르게 될 수도 있었기에 그 누구도 함부로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가이없는 태고의 광야를 걷는 듯, 그들의 마음은 모두가 숙연했다. 죽음만이 존재하는 광활한 대지를 그들은 그저 유유히 걷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아.. 아악...!

“무슨 일인가?

가신들 중 한 명이 미처 응고되지 않은 용암 늪에 빠져 허우적댔다. 용암 늪은 무서운 기세로 그의 몸통을 집어삼켰다. 그의 파워슈트가 종래엔 용암의 가혹한 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서서히 타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살을 파고드는 고통에 격렬히 몸부림쳤다. 그 안타까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국왕이 슈트 속에 내장된 플라즈마 피스톨을 꺼내들고는, 죽어가는 그를 향해 묵묵히 겨누었다.


“그럼, 잘 가게. 후에 지옥에서 다시 만나지.

찰나의 순간, 플라즈마 피스톨이 소름끼치는 굉음을 내며 특유의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살이 타들어가는 막심한 괴로움 속에서 어떻게든 구원을 바랬던 그는 결국, 그 굉음과 함꼐 영원한 침묵의 안식을 맞이하였다.


“안락과 함꼐하길.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우린 계속 움직여야만 합니다.

테번이 국왕을 재촉했다. 그들은 다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고독의 행군을 시작한 지도 무수한 시간이 흘렀다. 그들이 서서히 지쳐갈 때 즈음, 무언가 그들의 접근을 의도적으로 막고 있는 듯한 어떤 결계가 둘러져 있음을 알아챘다. 


“여기서부턴 어찌 된 일인지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군요. 무언가 거대한 장벽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럴 수가... 우리의 마법으로 이 결계를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는겐가?

그들은 모두가 전장에서 많은 경험을 치룬 바 있는 강력한 마법사들이었지만,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치한 거대한 장벽을 무력화하기엔 그저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보다 더 진실된 견해를 밝히자면, 사실은 그들이 마법 장벽을 뚫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들은 분명 아니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장벽을 설치한 이 땅의 주인이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수준의 초월적인 존재였던 것일 뿐이었다.


모두들 여기 있었군, 나약한 필멸자들이여. 명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오. 이제, 여기서부턴 나를 따라오도록 하시오.

로브를 뒤집어쓴 어느 무리가 그들 앞에 갑작스레 나타다더니, 이내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고 있던 그들을 불렀다. 그들이 결계에 손을 가까이 대자, 그제서야 비로소 궁전으로 통하는 길목이 열렸다.


“당신이 우리가 전에 만난 ‘그 분’ 휘하의 하수인입니까?

데키몬드 국왕이 나지막히 물었다. 그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회답할 뿐이었다.


“메리버 하전트라고 하오. 그는 일부러 나를 보내셨지. 이 쪽은 나와 내 동료들을 수호하기 위해 파견된 *디몬 가디언(Demon Guardian)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이오.

“그렇다면, 무슨 이유에서 당신을 보내셨소?

메리버가 그들을 향해 상당히 언짢은 듯한 눈길을 보냈지만, 그럼에도 애써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다른 악마들은 태생적으로 지극히 호전적이고 악랄한 탓에, 그대들과 같은 무지몽매한 필멸자들을 궁전으로 무사히 송환하기엔 많은 어려움이 따르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르지.

“그러고 보니, 여지껏 우리와 조우했었던 악마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인류를 증오하고 멸시했었소. 당신 역시도 우리에게 그런 태도를 취할 줄로 믿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소만... 예상 밖의 행동에 나는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오. 그런걸 두고 보면, 당신은 확실히 어딘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구려.

“나는 지략을 관장하는 악신(惡神)인 테제뉴아를 섬긴다오. 그 분꼐선 맹목적인 분노보다는 그것을 압도하는 사악한 간괴를 더 높이 쳐주시지. 비록, 그 때문에 악마들 사이에선 종종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런 점을 깊이 동경하여 그 분을 섬기기로 마음먹었소. 그 분이 가진 긍정적인 면은 ‘지혜’라오.

데키몬드는 어쩐지 그의 말이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으면서도, 그 점이 다른 한 편으론 굉장히 흥미롭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그를 비겁한 겁쟁이라며 마구 욕하고 떠들고 다니지 않소? 게다가.. 진실을 알지 못하는 창조교 놈들은 도리어 그의 그런 면모를 사악하다고 비난하며,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단지 저속하게만 치부한다오.

“그것은, 말하자면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인지되는 것이라오. 당신은 내가 말하는 진리에 관해서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조금은 분에 넘치는 이야기를 잠깐 꺼내겠소. 단언컨대, 선(善)과 악(惡)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그저 지성체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할 뿐이오. 예컨대, 태고의 우주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었소. 모든 것은 무질서함의 공허 속에서 오로지 흐름의 변화만을 따르며 주어진 우주의 섭리에 굴복할 뿐이었다오. 그리고 그 시기는 다름이 아니라 창조주가 이 세계를 창조하고 난 뒤, 일말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소. 그리고 창조주는 뒤이어 그를 대변해줄 수 있는 숭고한 존재들을 만들어냈다오. 그들이 바로 모두가 알고 있는 천사(The Angel)라는 존재들이오. 그럼, 이 쯤에서 당신에게 한 가지 묻겠소. 당신은 창조주와 악마들 사이에 얽힌 진실에 대해 아는 바가 있소?

데키몬드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메리버는 순간 그의 눈을 가늘게 뜨며 심오한 담론을 계속 이어나갔다.


“애석하게도, 창조주는 그가 벌인 일들 중에서 한 가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소. 그것은 바로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인 천사를 창조했다는 거요.

“납득할 수 없군. 어떻게 그것이 실수였다고 그리도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오?

“그대도 변절자 데카일(Decha'ill)을 알고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소. 그는 창조주가 세계를 창조한 이래로 생겨난 최초의 악마이자 가장 첫 번째로 그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끝내는 패주한 인물이라오. 그 때 당시 그의 반역에 가담한 인물들은 물론이고 후세에 이르러 그의 행적에 뒤늦게 감명을 받고는, 감히 그에 비견된 짓을 저질렀다가 종래에 타락의 길을 걸었던 무수한 이들이 있었소. 그들은 다름 아닌 천사들이었다오. 그가 창조한 그 모순덩어리 피조물들 말이오. 예컨대, 창조주가 완벽한 존재가 맞다면 그는 이 크나큰 비극을 처음부터 예견하고 있었어야 함이 진정으로 옳았소. 그는 적어도 수 많은 지성체들에 한하여 완전한 선(善)의 존재로 숭배받고 있으니 말이오.

“그렇다면, 창조주는 결국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완벽하지 않은 존재임이 증명된 셈이군.

메리버는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회답했다.


“그것은 섣부른 오판이오. 창조주는 하찮은 인간들 따위가 섣불리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존재가 아니오. 단언컨대, 창조주는 지성체들이 예로부터 제시해왔던 선과 악의 개념을 초월한 존재요. 또한 그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고 말이오. 창조주가 행하는 모든 일은 선과 악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결국 필연이라는 하나의 운명으로 귀결되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그의 행위로부터 파생되는 결과들이 항상 선(善)에 부합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오. 그래서, 그는 말하자면 선(善)하다고 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악(惡)하다고 볼 수도 없소. 그가 진실로 선하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모순되게도 스스로의 적을 창조해낸 셈이니까 말이오. 게다가, 변절자 데카일이 그를 향해 반기를 들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소. 그는 창조주의 굳은 신임을 얻고 있던 대천사(Arch Angel)였음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언젠가는 그에게 결단코 반기를 들도록 설계되어 있었소. 데카일이 반역을 꾀하고 창조주의 처소에 당당히 입성한 뒤 그를 향해 증오의 칼을 겨누었던 그 날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줄 아시오?

“흥미롭군. 계속 말씀하시오.

“격노한 창조주는 데카일과 그 음모에 가담한 무리들을 천계로부터 내쫓은 후 영원히 지옥으로 유배보냈소. 그리고 종래엔 그 모두가 타락하여 악마로 변모하였다오. 천사였던 그들이 악마로 변질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소. 아니, 찰나의 시간이면 충분했지. 창조주로부터 가혹한 징벌을 받은 그들은 끝끝내 그들의 과오를 뉘우치지 않고 끊임 없이 그를 증오하고 혐오하는 운명을 걷게 되었다오. 하지만 그러한들, 그것이 진정 악(惡)하다고 규정할 수 있소? 그들은 처음부터 태생적으로 그를 배반하도록 창조되었소. 그들을 그렇게 운명지은 존재는 다름 아닌 창조주란 얘기요. 그들이 행했던 것은, 저항할 수 없는 필연적 이끌림을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 전부요. 그럼에도 창조주와 악마의 관계를 단지 선과 악의 두 갈래로만 구분지을 수 있단 말이오?

데키몬드는 뜻밖의 회답을 듣고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경이로움을 차마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메리버가 그런 그의 황홀한 표정을 대수롭지 않은 듯 흘겨보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매우 오만하게도, 창조주를 숭배하는 무지스런 필멸자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오. 창조주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고, 누구든지 그가 중요시 여긴 것들을 따르기만 한다면 고통으로부터 해방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은 부정할 수 없는 신성한 행위이며, 그것을 선한 행위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숙원이다.’. 물론 아니겠지만, 당신은 진정 창조주가 무지한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이라 생각하시오?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창조주를 따르든, 그렇지 않든 정작 그는 전혀 개연치 않소. 그가 남긴 업적은 단지, 혼란스러웠던 태고의 우주에 약간의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 것 뿐이라오. 심지어 그는 기록에 따르면, 인류가 제정한 창조교의 교리에 반(反)하는 행위도 여럿 자행한 바 있었소. 그런 것들에 빗대어 생각해봐도, 모든 것을 단지 선(善)과 악(惡)의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결정지어버리는 인류의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가 과연 얼마나 무엄하고 가소로운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막연한 믿음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관한 진리를 끝내 깨우치지 못하는 것일 게요. 그들은 사실 창조주가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소. 앞서 말했듯이, 그는 지성체들이 이해 불가능한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오. 그럼에도 그 중에는 간혹 진실에 관한 진리를 깨우치고 스스로가 걸어가야 할 운명을 묵묵히 걷는 자들도 있소. 하지만 대다수가 맹목적인 신념에 사로잡혀 막연한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이 그들의 현실임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오.

데키몬드는 메리버의 철학적인 담론에 흥미를 갖고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집중할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 것인지, 담론이 막바지에 달할 무렵이 되자 거대한 궁전의 문이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메리버가 그의 데스 웨폰을 높이 치켜세우자, 크고 육중한 문짝이 웅장한 굉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궁전의 문이 열리고 거대한 크기의 복도가 그들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여기서 얼마나 더 걸으면 되오?

“금방이오.

“잠깐 분에 넘치는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소? 당신과 같은 악마들이 섬기는 악신(惡神)이라는 존재에 관해서 말이오.

데키몬드가 의연한 태도로 질문했다. 그는 절대자들에 관한 이야기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모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게요?

“그들은 대부분이 *최후의 천계 전쟁(Heaven War: Omega)때 전사하여 목숨을 잃었다오. 현재 남아있는 이는 내가 섬기는 테제뉴아 뿐이지.

“그 전쟁이 그들 대부분을 일순간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혈투였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소. 최초의 악마이자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데카일을 선두로 하여 천계와 악마 사이의 치열한 혈전이 난립했던 전투였지. 데카일의 변절 이래로, 천계와 지옥 사이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던 적은 그리 많지 않았소. 하지만 그 전쟁은 데카일의 변절을 뛰어넘을 만큼이나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회고되오. 확언하건대, 그 거대한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아마 한도 끝도 없을 것이오. 하지만 이 사실만은 명백했소. 그 사실은 바로, 데카일이 창조주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채로 지옥의 모든 군세를 동원하여 그의 옥좌 앞 까지 진격했다는 것이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창조주는 그들의 예상을 뒤엎고 더 이상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았소. 창조주는 뒤이어 그들을 *외부 세계(Outta World)로 봉인시킨 후, 살아남은 악마들은 그가 친히 나서서 도륙내버렸소. 그 과정에서 많은 악마들과 악신들이 죽거나 다쳤다오.

데키몬드는 이에 대하여 진실로 의아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것이오?

“그는 천계에 침입했던 악마들을 쓸어내고, 스스로를 태고의 심연 속에 가둬버렸다오. 아마, 창조주는 그가 행했던 모든 일들에 대하여 속으로 깊은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오. 살아남은 악마들은 지옥과 현실 세계로 숨어들어 가까스로 자신의 목숨만을 보전하고 있었소.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로 도리어 창조주의 공백이 길어지자, 그들은 그 점을 노리고 조용히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오. 우리는 다름 아닌 그들로부터 기원을 두고 있소.

“하지만, 격노한 천사들이 당신들을 죽이려 든다면...?

“그들은 오직 창조주의 명령만을 따르는 존재들이오. 실질적인 권력자가 죽음과도 같은 비참한 운명에 놓여있는데, 고작 그의 하수인 따위가 감히 우리가 행하는 숭고한 업(業)을 함부로 저지할 순 없을 거요. 그것은 결코 용납될 수 조차 없는 일이요.

 그들은 마침내 복도의 끝에 다다랐다. 메리버가 손을 대고 문을 열자, 뒤이어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는 입구가 나타났다.


“들어가시오.

메리버가 데키몬드를 향해 들어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는 그의 가신들과 함꼐 미지의 세계를 향해 걸어나갔다. 입구에 발을 디디자, 그는 무언가 수 많은 무리들이 각자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아.. 이 곳은...

그가 발을 디딘 곳은 거대한 경기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경기장에는 그들이 포로로 잡아온 필멸자들을 시켜서 죽을 때까지 노예 검투사로 부려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말이 검투사일 뿐, 한낱 무기조차도 지급받지 못했기에 그들은 서로의 유약한 이빨과 손톱으로나마 물고 뜯으며 극한의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게다가 관람석은 만원이었고, 거기에 앉아있는 모두가 잔혹한 경기에 취하여 불순한 쾌락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참혹한 광경에 잠시 넋을 놓고 있었을 때 즈음, 누군가 그를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곧 무심결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봐, 네 놈은 더러운 인간의 냄새가 나는데 말야. 갈증이 나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 됐군. 오늘은 네 놈의 피를 뽑아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들이켜주마. 아무쪼록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진정하게, 루나텐이여. 이들은 집정관의 특별 지령을 받고 송환된 것이오.

그의 정체는 피와 살육에 유독 집착 증세를 보이는 하위 악마, 루나텐이었다. 그는 검붉은 핏빛 와인잔을 들며, 경기 도중 죽어나간 가엾은 검투사들의 피를 어떠한 정제 과정도 거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들이마시고 있었다. 마치 그 사실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잔에 담겨진 신선한 액체의 표면에 살점인지 고름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건더기들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가하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지금 당장 우리의 집정관을 만나뵙도록 하시오.

메리버가 여지껏 접하지 못했던 경이롭고도 무자비한 광경에 한껏 도취되어 있는 데키몬드를 보다 긴박한 어조로 재촉했다. 그는 혹시 모를 상황을 두려워하여, 방황하고 있는 데키몬드를 집정관 앞에까지 직접 안내하였다.


“집정관 에이든이시여, 여기 당신이 찾고자 했던 그 자를 데려왔습니다.

“...

에이든이 조금은 가소로운 듯한 표정으로 그를 흘겨봤다. 반면, 그에 관한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데키몬드의 표정엔 이루 말할 수 없는 숙연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생이라고 했던가?

에이든은 데키몬드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맹세하건대, 제게 영생을 주신다면 당신을 위해 스스로의 영혼이라도 바칠 것입니다.

“그럼, 싸워라.

“...

에이든이 사악한 웃음으로 회답했다. 데키몬드는 그의 회답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검투장으로 내려가서 곧 마주하게 될 괴수들과 싸운 후, 영광스런 승리를 쟁취하라. 네놈의 무능한 하수인들과 함꼐 싸워도 좋다. 단언컨대 네 놈이 쾌락에 목마른 우릴 즐겁게 해준다면, 내 친히 그보다 더한 것을 부여할 것이다.

데키몬드는 그의 말에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속에서부터 솟아오름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예컨대, 죽음 앞에 놓인 어느 가련한 필멸자가 갈망할 법한 실날같은 희망과도 버금갈만한 것이었다.


“당신의 제안을 따르겠습니다.

데키몬드와 그의 하수인들이 하나같이 비장한 태도를 발하며 검투장으로 내려갔다. 그들의 숭고한 용맹과 굳건한 신념은, 여지껏 그들이 거쳐갔던 모든 전장에서의 각오를 더한 것보다도 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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