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악의 제국(Evil Empire) : 숙명 #Chapter 5
게시물ID : readers_100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chthexen
추천 : 0
조회수 : 24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1/18 18:40:58
#Chapter 5 


피도 눈물도 없는 ‘진짜’ 악마들의 거대한 투기장 안. 그들은 그들이 잡아온 가엾은 필멸자들을 원형 필드에 가둬놓고 어떠한 규칙이나 자비조차 없이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으며 죽이는 잔혹한 광경을 조성해낸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자신들의 불순한 쾌락을 충족하기 위해서 그저, 그것을 관조하며 즐길 뿐이다. 그 누구도 감히 그 행위를 잔인하다고 비난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설령 누군가 주제넘게 추파를 던진다고 한들 단언컨대, 그들은 전혀 개연치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을 맹렬히 지탄하는 자가 다름 아닌 숭고한 창조주의 수호자들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 그들의 새로운 쾌락을 충족시켜줄 또 다른 필멸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필드의 한 가운데에 우뚝 섰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언급하자면 그들은 누군가의 욕망 따위를 충족시켜줄 목적으로 이 저주받은 장소에 발을 내딛은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 사실 그들은 무언가 거대한 이익을 목적으로 이 험한 곳까지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비장한 모습을 한낱 가소로운 듯이 흘겨보던 모든 악마들 역시도 내색하지만 않았지만 속으론, 그 사실을 간파하고는 있었으니 말이다. 어찌 됐든, 그들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무리들이란 사실은 꽤나 흥미롭다. 사악한 절대자들이 벌이는 약탈과 침략 행위들 아래 포로라는 이름으로 끌려갔던 가련한 필멸자들의 수가 셀 수 없을 만큼이나 많았다곤 하지만, 반면 제 발로 그들의 노예가 되길 희망하며 찾아온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음을 감안해본다면, 그들 앞에 놓인 운명이라는 것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자초한 운명이 진정 현명한 선택인지는 조금의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전적으로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논한다면 대부분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도 그런것이, 사악한 절대자들이 그들을 두고 내세운 조건은 그 누구라도 매력적으로 다가올 만큼 이례적인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예컨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로서는 한 왕국의 생과 사가 걸려있을 만큼이나 중대하고 위험천만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히 많은 고뇌와 상념들 또한 그들의 뇌리 속 깊은 곳을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절대자들이 약속한 성스런 축복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부여된 숭고한 생명을 가차 없이 내걸고 뛰어들 만큼이나 매혹적이고 굉장한 것이기도 했을 게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결국 어떠한 결정을 내렸을 지는 너무나도 뻔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라는 피조물이란 참으로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


“그대도 아까 똑똑히 보았겠지.”

데키몬드 국왕은 영생보다 더한 축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중대한 사실을 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기며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흥분감에 완벽히 도취되었으나, 한 편으론 그것이 그에 비견하는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정도까지 미치진 못하였기에 이내 형용할 수 없는 만감을 드러냈다.


“물론입니다. 여긴 모든것이 황홀하고 웅장하군요. 아까의 그 피비린내 나는 혈투 경기를 의연히 지켜보고 있던 때가 방금 전이었는데, 이젠 그 흥미로운 경기의 검투사가 우리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놀라움. 단지 그것뿐인가?”

그의 책사인 테번은 언뜻 보기에 매우 지혜롭고 고결한 성품을 지닌 것 같으나 그 실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꼭 그런 것만은 아님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오히려 그가 책사로서의 지조를 지키며 마냥 고상한 척만 일삼는 것이야말로 괴이하게 여겨질 만 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사악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공포 군주의 책사라면 적어도 그 이상의 덕목은 갖추고 있어야 진정 옳았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아니지요. 사실은 곧 치룰 전투를 생각하니 온 몸에 쾌락의 전율이 솟아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적수를 상대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요.”

테번이 한결 여유넘치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회답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투를 알리는 경고음과 관중들의 환호성 소리가 투기장 안에 가득 울려퍼졌고, 뒤이어 그는 전투 준비를 하기 위해 파워 슈트 안에 감춰두었던 데스 웨폰을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손을 뻗자, 문득 알 수 없는 허전한 느낌이 들었기에 그는 한동안 무언가가 잡힐 때까지 슈트 안을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뒤적거렸다. 그의 옆에 의연히 서 있던 국왕도 그제서야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곤 다소 혼란스러운 기색을 표했다.


“이걸 찾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악마들의 수장, 에이든이었다. 그는 당황스러워하는 국왕과 그의 무리들을 주시하며 몇 기의 데스 웨폰들을 보란 듯이 들어올렸다. 자세히 보니 그의 얼굴은 필멸자들을 향한 멸시의 비웃음으로 한가득 잠식되어 있었다. 비록 필드의 중앙으로부터 관중석까지의 거리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이나 멀었으나 그럼에도 그가 들고 있는 그 것들이 투기장에 입성하기 전, 자신의 파워 슈트에 몰래 숨겨두었던 데스 웨폰이 확실함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마법사에게 지팡이를 주지 않는 것은 군인에게 무기를 지급하지 않는 것과도 같을 진데, 대체 어찌하여...”

데키몬드 국왕이 에이든을 향해 조금은 당황스러운 눈길로 이 같은 불합리한 처사에 관해 항변했다. 마법사인 그들에게 있어서 데스 웨폰은 전장에 없어선 안될 가장 기초적인 전투 장비이자 명백한 힘의 근원이었다.


“네 놈들도 지금껏 충분히 봐왔지 않았는가? 스스로가 가진 본연의 힘으로만 싸우는 것. 그 것이 이 투기장의 불변적인 규율이다. 맨 몸으로 내던져져서 극한의 고통을 겪으며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값진 영광일지니.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각자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게 좋을 것이다.”

에이든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보이며 최후의 회답을 보냈다. 외설적인 느낌을 풍기는 촉수와 고름이 흐르는, 변이 포자로 잔뜩 뒤엉킨 커럽터들이 그런 와중에도 국왕과 그의 가신들을 가차없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앞에 놓여있는 수 많은 커럽터들도 한 때는 어쩌면 그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문득 소름이 끼치며 심지어는, 속에서부터 무언가 올라오는듯한 느낌까지 들기 시작했다. 단언컨대 이것은 그들이 분투를 치르며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할 첫 번째 고비였다.


“비록 무기는 잃었으나 우린 여전히 마법을 쓸 수 있다. 자, 모두들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정신을 집중하고... 우리가 항상 하던 대로 할 수 있겠나? 각자의 경험을 최대한 되살려보게.”

“저희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중입니다. 지팡이가 없어서 제대로 된 마력을 도출하는데에 고역이라고 칭할 만큼이나 어렵군요.”

그 때였다. 광기에 찬 커럽터 한 명이 방심하고 있던 일행 하나를 순식간에 덮쳤다. 순간적인 기습에 이성을 잃고 당황한 그가 저주받은 존재들로부터 벗어나려고 격렬하게 발악하자,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음을 간파한 더 많은 무리들이 그를 향해 도약해왔다. 예컨대, 먹잇감에 굶주린 사냥꾼들의 잔혹한 축제가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로 원형 필드에 갇혀서 서로를 사냥하고 살육하며 종래에 최후의 생존자로 거듭나는 것. 그 것은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이자 축복이었기에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살아남아야만 했다.


“죽어라, 이 더러운 것들아.”

데키몬드 국왕이 책사 테번과 함꼐 희생자 주변에 모여든 커럽터들을 두고 자비 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여러모로 뒤늦은 일격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 전 기습당한 희생자의 숨통이 희미하게나마 붙어있음을 가까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끔찍하리만큼이나 처량했다. 살점은 그들에게 뜯기고 먹혀 절반 가량이 소실되고 뼈와 내장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외부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크르르...”

몇 마리의 성난 커럽터가 소름끼치도록 괴이한 신음을 내며 울부짖었다. 그들이 내는 부패한 울음소리는 곧 주변의 무리들을 더 많이 끌어들임으로서 아까의 일격을 맞고 주춤했던 불리한 형세를 순식간에 상쇄해버리고 다시 전열을 바로잡도록 이끌었다. 놀랍게도, 그리고 섬뜩하게도 모든 상황은 눈 깜짝할 사이 동안에 이루어졌기에 국왕과 그의 가신들은 미처 당황한 기색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이 재차 마주하게 된 것들은 또 다시 견뎌내야 할 두 번째 고비였다.


“집요한 놈들 같으니라고... 죽여도 죽여도 끝이 안 보이는 군.”

“입 다물고 계속 집중이나 하게.”

폭풍우와 같이 몰아치는 커럽터들의 도약과 섬광처럼 빛발치는 필멸자들의 반격이 필드 근방을 요란스럽게 휘저었다. 이 거대한 싸움에 관해서 논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형세를 방불케 할 만큼 극렬하다고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투가 길어질 수록 투기장의 환호성은 자연히 더욱 더 거세어져 갔지만, 정작 이 혈투를 직접 온 몸으로 감당해야만 하는 필멸자들의 심정은 그와 완전히 반대였다. 견녀대기 어려운 지독한 인고의 무게가 매 순간마다 그들의 영혼을 송두리째 짓누르고 으깨었으니 말이다.


“벌써부터 힘에 부치는군요. 이번 싸움이 우리가 견뎌내야 할 마지막 시련이 되기를...”

“시끄럽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저들을 없애기 이전에 먼저, 네 놈부터 산산히 찢어 허공에 도륙낼 것이야.”

한 눈에 보기에도 다소 상기된 얼굴을 띈 국왕이 반복되는 전투에 힘겨워하는 가신을 두고 모질게 꾸짖었다. 흉흉하고 불길한 분위기가 투기장을 잔뜩 배회하는 가운데, 이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던 에이든과 다수의 악마들은 섬뜩하리만치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한창 무르익어가는 상황을 계속 관조했다. 그런 태도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이 혈투를 끝낼 생각 따윈 없는 심산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러한 우려들은 자연스레 가신들의 불안함을 은근히 가중시켰다. 이를테면, 이 저주받은 공간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두려운 생각에서 비롯될 법한 잡념 같은 것 말이다.


“책사, 그리고 나의 가신들이여. 모두들 앞으로 닥칠 고통에 맞설 비장한 각오쯤은 충분히 되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겠다.”

“크르르르...!”

혼란스러운 틈을 눈치챈 커럽터들이 맹렬한 기세로 도약을 시도했다. 분개한 커럽터들과 목숨을 걸고 맞서야하는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라곤 오로지 회심의 각오로부터 우러나오는 맨 정신 하나 뿐이었다. 사태는 모두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그들의 손에서 뒤늦게나마 강렬한 마법 에너지가 도출되었으나 이번에도 기어이 먼저 쓰러진 쪽은 안타깝게도 국왕이 이끄는 무리였다.


“아악...! 죽고싶지 않아...!”

“방심의 댓가라고 생각하게. 이제 보니 그대의 나약함이 실망스럽기 짝이 없을 정도군.”

데키몬드 국왕이 공격을 받고 쓰러진 가신을 향해 가차없이 어스름한 빛줄기를 쏟아냈다. 불길한 느낌의 에너지를 직격으로 흡수한 이 가엾은 낙오자는 엄청난 열기에 피부가 갈라지고 이내 육신이 서서히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도, 알아차릴 여지조차도 없었던 커럽터들은 본능적으로 뿜어져나오는 불길한 느낌을 뒤로 한 채,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가는 낙오자를 물고 뜯으며 그들만의 살육을 계속했다. 조금의 시간이 더 경과하고 그의 시체가 절반 가량 훼손되었을 무렵, 커럽터들에 의해 정신 없이 뜯겨나간 살점과 핏자국들은 어쩐지 검은 빛깔이 꽤나 완연해져 있었다. 부풀어 오를대로 부풀어오른 거대한 시체 덩어리는 움푹 패인 상처로부터 피인지 고름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검붉은 액체를 뿜어내며 기분나쁜 전조를 알렸고 살육에 미친 커럽터들이 뼈가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흉악한 고깃덩어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자, 갑작스레 시체가 온 갈래로 터지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대기중으로 증발시켰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들이 마주한 상황은 불리함의 절정에 달한 전투의 판도를 뒤엎어버릴 만큼이나 경이로운 축복이었다. 


“다들 보았겠지? 침착하게 마음만 먹는다면 이 따위 잔챙이들을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네. 부디, 더 이상 우리의 명예와 지위를 더럽히는 일은 없기를...”

먹잇감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몇 마리의 커럽터들이 다시 국왕과 그의 가신들을 향해 돌진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언뜻 보기에도 그 숫자가 전보다 많이 줄어있었기에 달려드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다지 별 문제가 안 되었다.


“그래... 계속 덤벼라, 이 무지한 것들아...!”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각자의 손에서 까맣고 어두운 빛들이 뿜어져나왔고, 그 불미스러운 에너지는 달려오는 암담한 적들을 한가득 에워싸며 이내 짧고도 강렬한 죽음을 선사하였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죽음이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울 정도의 초연한 기운을 자아내고 있었다. 예컨대, 그들이 맞이한 운명은 인고의 세월 동안 그들을 결박해왔던 속박의 굴레에서 편히 벗어나도록 이끌어주는 관대한 방생(放生)과도 같았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사악한 절대자들에게 영혼이 귀속된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것은, 고통의 종언이자 해방의 서막이었으며 전부터 내심 염원하고 있었을 최후의 안락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으윽...”

기어이 그들에게 또 한번의 위기가 닥쳐왔다. 아까 전 까지만 해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책사 테번이 갑작스레 고통스러움을 호소한 것이다. 아마 지난 밤 일어났던 커럽터들과의 전투에서 습격을 받아 생긴 상처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마법은 물론이거니와, 과학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시기이긴 하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상처는 최소한 중상 수준이었기에 삼 일은 족히 걸려야 완치가 가능할 듯 보였다. 그런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몸을 편히 두지 않고 처량한 육신을 이끌며 의지력 하나만으로 이 곳에 힘겹게 당도했다. 절대자들의 축복이란 것이 과연, 병들고 지친 자의 결심을 일깨울 정도로 이토록 위대한 것이었던가? 아니면 단지 그들 스스로가 하나같이 무지했던 탓에, 교만하다고 논할 정도로 막연한 신념을 가지고 몽매하기 짝이 없는 선택을 한 것인가?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 해답은 전자의 경우가 조금 더 진실성이 있어 보인다. 적어도, 우리와 같은 필멸자들이 보기엔 그 외의 선택에 관한 여지가 더 이상 없을 테니까 말이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그 누가 감히 그들을 의심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뒤를 조심하게, 나의 가련한 책사여.”

“아니, 이건...!”

테번이 뒤를 돌아보니 그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커럽터 한 마리가 극도로 변이된 커다란 팔을 막 휘두르려던 찰나였다. 잔뜩 성이 나있는 태세로 시끄럽게 울부짖으며 달려들었기에 어쩌면, 충분히 피할 수도 있을 법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하는 씁쓸한 아쉬움이 마음 한 구석을 겉돌았지만 어쨌든 그는 그 일격을 맞고 그대로 전사했다. 방심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다친 몸을 이끌고 그 맹공격을 피할 수 있을 재간이 없던게 분명했다.


“진실로 교활한 놈 같으니라고. 원래 있던 지옥으로 다시 돌아가라, 이 저주받은 것아!”

데키몬드 국왕이 테번을 덮친 커럽터를 향해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를 날려보냈다. 커다란 구형 덩어리를 여과없이 그대로 빨아들인 그 비범한 괴수는 어찌된 일인지, 몸이 점점 부풀어오르더니 뒤이어 우렁찬 울음소리를 쏟아내며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무언가 익숙하다 싶은 느낌이 스치는듯 하여 잠시 기억을 회고해보자니, 이것은 아까와 완전히 똑같은 상황이었다. 괴수가 갈라진 피부 틈으로 쉴새 없이 흘리고 있는 막대한 양의 검은 액체가 그 불길한 직감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그들이 생각한게 맞다면, 그들에게 남은 최후의 대안은 그 더러운 액체가 각자의 몸에 닿지 않도록 모든 정신을 집중하는 것 뿐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어서 피해라.”

데키몬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거대한 괴수의 육신이 일순간 소름끼치는 굉음을 내며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괴수가 터지면서 방출된 검은 액체는 미묘하게도 처음의 것보다 조금 더 붉은색에 가까웠다. 이 섬뜩한 광경을 눈 앞에서 마주한 가신들은 가히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그 이유를 말할 것 같으면 오로지 이성과 지식을 갖춘 지성체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기에 더욱 더 그러했다. 


“크르르르...”

“아악...!”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그 검은 액체는 필드의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 닿는 것이 무엇이든 피아조차 가리지 않고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불태웠으며, 그로서 액체에 닿게 된 모든 필멸자들은 고통스럽게 죽어나가거나 최소한 불구가 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끔찍한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흐흐... 우히히히...”

이 사태를 여지껏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던 테번이 갑자기 괴이한 웃음소리를 자아내며 기분 나쁜 태세를 취했다. 앞에 서 있던 육중한 커럽터 한 마리가 그를 향해 직격으로 팔을 내리찍은지도 꽤 지난 시점이었지만, 끝내 이중분리되어 머나먼 곳까지 내팽겨진 그의 처절한 육신은 아직 분명히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흘러내리는 것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아직까지 죽지 않고 심지어 태연히 웃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꽤나 경이로이 여길만 했다. 하지만 국왕은 어쩐지 그를 향해 조금은 회의적인 눈빛을 보내며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다.


“그대는 죽음이 두려운가?”

“우흐흐... 죽음이 두려웠다면 진작에 돌아섰을 겁니다...”

테번이 부숴질대로 부숴진 은백색 파워 슈트 안에서 자그마한 소형 주사기를 꺼내더니 이내, 국왕을 향해 보란 듯이 들어올렸다. 자세히 보니 주사기의 내부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은 보급고에서 떠날 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챙겨두었던 페로민 주사들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그는 극한의 고통마저도 가볍게 압도하는 웅대한 쾌락에 한가득 취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걸로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그는 사실 속으론 몹시 두려웠던 것일 지도 몰랐다. 막심한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거니와, 죽음 앞에 마침내 다다랐다는 심적 위기감이 그를 한창 끝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몰아갔기에 그것은 아마도 더욱 피치 못할 선택이었을 게다. 


“으히히히... 그렇다고 한들, 아직 죽기에 이를 때라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비참해지는가? 어느 시점까지 추락해야만 그들의 냉혹한 ‘숭배자’들이 진심어린 만족을 표할 것인가? 그는 책사의 자리에 오르고 난 이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약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행위는 단언컨대, 지난 수 십년 동안 애써 지조를 지키려 분투했던 ‘누군가’의 자존감을 완벽하게 무너뜨리는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대는 스스로의 책무를 잘 수행했다네. 나의 책사여, 그러니 이제 그만 편히 잠들도록 하게나.”

“우흐흐.. 우흐... 아니, 아직은 더 견뎌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책사로서의 위신을 지키지 못한 점은 조금 실망일세, 테번.”

데키몬드 국왕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테번을 향해 겨누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아.. 안돼! 안 됩니다!”

순식간에 뿜어져나온 강렬한 빛은 이내 그들이 선 대지 주변을 밝게 비추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불과 그 사이에 테번의 형체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말하자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고 모두 증발해버린 것이었다. 그가 인고의 세월 동안 겪어왔던 고통이며 쾌락이며 하는 만감(萬感) 따위들도 아마 기화된 육신과 함꼐 철저히 승화되었을 게다. 유(有)에서 무(無)의 존재로 거듭나긴 이처럼 쉬웠다. 그렇기에 누구를 막론하고 경각심을 잃지 말라 조언하는 것이지만, 인간이기에 종종 지나친 자만에 사로잡혀 무심해질 때도 있는 법이다.


“그 놈, 아까 전부터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는데 꼴이 아주 잘 됐어! 나약하고 힘 없는 자는 누가 되었던 간에 어쨌든 숙청부터 하고 볼 일이지. 네 놈의 선택은 내 우직한 심금을 가볍게 울릴 정도로 현명한 처사였다.”

그들의 비극을 아까부터 계속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던 크로노스가 조롱 섞인 목소리로 외쳐댔다.


“놈이 가진 악명이란 것이, 그저 맥 없이 떠도는 낭설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크흐흐...”

사뭇 감정이 격해진 데스메이커가 그의 말에 완벽히 동의했다.


“...”

에이든 역시 꽤나 흡족한 표정을 자아냈지만 크로노스를 비롯하여 광폭한 감정을 표출한 몇몇 악마들과는 달리, 왜인지 그저 간악한 침묵으로만 일관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이상히 여길 만한 점은 없었다. 어쩌면 그게 가장 ‘그’ 다운 태도인 것일지도 몰랐기에 그랬다.


“저길 보십시오, 국왕 폐하!”

그런데, 그 때였다.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어느 가신 한 명이 갑작스레 거대한 무언가를 포착하고 경악스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 이럴수가...”

이어서, 데키몬드 국왕도 그 실체를 기어이 알아챘다. 그들이 마주한 상대는 크기부터가 차마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우람했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결코 그 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 모습은 예컨대, 여러 종(種)의 필멸자들을 도살하여 얻은 오만 가지 시체들을 조잡하고 괴악한 방법으로 이어붙인 듯한 끔찍한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이어붙인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그 괴수를 조금 더 가까이서 살펴보면 두드러지는 각각의 부위가 서로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것은 분명 맞지만, 그러한들 물리적인 수술이나 봉합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크르르...크아아악!”

거대한 변이 괴수는 광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아까의 ‘그것들’보다 더 소름끼치는 울음소리를 자아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울음이라 일컫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에 잠식된 ‘비명’이라 논함이 옳았다. 그래서였을까?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고있던 많은 이들의 뇌리에 무릇 두려움과 측은한 감정이 동시에 교차했다.


“저 황홀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나의 감정을 고조시킬 만큼 매혹적인 존재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 대체 얼마만이던가?”

데키몬드 국왕은 내면으로부터 벅차오르는 광기와 감복을 미처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인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질 못하였다. 그러자, 이 모습을 가소롭게 흘겨보던 에이든이 이내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나의 차디찬 광기를 대변하는 거대한 실체를 직접 마주한 소견이 어떤가, 데키몬드? 사실, 네 놈들이 지금 눈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존재는 한 때 네 놈들과 같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는지 문득 궁금해지지 않는가?”

“...”

“확언하건대, 그는 무지한 것도 아니었고 신념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우리에 관한 믿음이 깊었고, 심지어 우주의 진리를 가벼이 깨우칠 만큼 지혜롭기까지 하였지. 그런데 그럼에도 그가 끝내 간과했던 점이 딱 한가지 있었는데, 이젠 네 놈도 그게 무엇인지에 관해선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입으로부터 나온 몇 마디의 말이 불과, 찰나의 순간 동안 데키몬드 국왕의 뇌리를 강렬하게 일깨웠다.


“그것은 바로 그가 가진 영혼이 우리의 헌신적인 축복을 무사히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태생적인 결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고의 노력을 했다면 적어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겠지. 어떤가. 진실을 듣고 나니 흥미롭지 않나? 난 이 숭고한 실패작들을 *디몬 액시저(Demon Axiser)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도록 했다. 썩 훌륭한 이름이지.”

“그는 대체 누구였기에 그런 운명을 걷고 있는 것입니까?”

“네 놈이라면 절대 모를 리 없는 인물이지. 그는 다름 아닌 테메토스 국왕이다.”

“오, 이럴 수가. 저 흉측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 진정, 제가 알던 테메토스 국왕이란 것입니까?”

데키몬드 국왕은 그가 듣게 된 모든 사실에 관해서 차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지금 그가 눈 앞에 마주한 거대한 괴물이 원수와도 같았던 데메토스 국왕이라는 이야긴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뜻 밖의 회답이었다. 그런 탓에, 이것을 그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네 놈에게 한 가지 간언하지 않은 것이 있다. 놈은 영혼이 소멸되어 없어진 대신, 그 안에 우리가 불어넣은 불순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 조차 제대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까지 마구 날뛴단 말이지.”

에이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 괴수, 디몬 액시저를 감싸고 있던 마법 결계가 사라졌다. 결계가 해제됨에 따라, 통제 불능의 상태로 접어든 광기어린 그 괴수는 곧 격렬히 몸을 요동치며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을 주저없이 파괴하고 집어삼켰다. 괴수의 앞에 서 있던 미련한 필멸자들은 결국 먹이로 전락하거나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모두들 당황했다.


“지옥에 온걸 환영한다. 그럼 모두, 좋은 시간들 보내라고.”

에이든이 사악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를 토해내며 한껏 불순한 쾌락을 탐닉했다. 하지만 그는 단지 그 것만으론 쉽사리 만족하려들지 않을 인물이었기에, 뒤이어 투기장의 제어 장치에 손을 갖다 대었다. 장치에 달려 있는 버튼을 누르자, 투기장의 조명이 순식간에 꺼져 버렸다. 당연하게도, 투기장은 깊고도 깊은 암흑의 거대한 공포에 잠식되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노리고자 했던 점이었다. 그 이유에서인즉,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단연 미지의 공간. 다시 말해서, 어둠이라는 사실을 그는 집요하리만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국왕이시여, 이게 대체 어찌된 것입니까? 갑자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아, 결국 이대로 죽는구나! 그저 원통할 따름이도다.”

그의 가신들이 하나같이 모두 원초적인 공포심에 압도당하여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였다. 주변은 차마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이나 어두워져 있었기에, 그들은 필드 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괴수의 으르렁거리는 울부짖음과 벌써 그것의 먹이로 전락해버린 어느 희생자의 가냘픈 비명 소리는 여느 때보다도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들에겐 지금 당장 주위를 밝힐 수 있는 한 줄기 빛이 절실했다.


“제길, 내 앞에 뭔가가 있어! 아악!”

“모두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전투에 임하길 바란다.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겠다면, 저 빌어먹을 괴수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내가 먼저 네 놈들을 친히 도륙낼 것이야. 알아듣겠나?”

데키몬드 국왕이 섬뜩한 경고를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난잡해진 전열은 좀처럼 다듬어지지 않았다. 사실, 지독한 어둠에 가려져 언제 육신이 찢어지고 으스러질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속에서,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테니 말이다. 흥분한 가신 몇 명이 급박한 표정으로 손에서 에너지 볼트를 연성해냈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그들이 날린 에너지 볼트들은 괴수의 몸에 박히기는 커녕, 그 근처도 접근하지 못하고 허탈이 불발됨으로서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너지 덩어리가 강렬한 빛을 발할 동안 잠깐이나마 그들에게 시야가 제공되었지만, 유일하게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가늠할 수 없는 괴수의 접근 속도와 비명을 지르며 처참히 죽어가는 동료의 모습이었기에 도리어 공포심만 가중될 뿐이었다.


“오, 모두들 저길 보게!”

갑작스레 중앙에 빛나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며, 흡사 원통형 유리관 같은 것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원통형 유리관 안에는 최고급 데스 웨폰이 보란 듯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화려한 자태로 말하자면, 이 가망 없는 혈투의 전세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여실히 드러낼 정도였다.


“구원의 빛이다!”

“모두들 비켜라! 그 유리관에 손을 대는 자는 누구든지 죽여 없애 버릴 것이다.”

데키몬드 국왕이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강렬한 욕망 같은 것에 도취되어 데스 웨폰이 탑재된 유리관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가 돌격하는 동안 양 손의 각각에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를 거머쥔 상태로 온 대지를 휘젓고 다닌 탓에, 우연히 앞을 막고 있었던 가신들은 그 강렬한 빛이 몸에 닿는 대로 철저히 찢어지고 타올랐다. 그런 와중에도 필드 내에는 괴수의 충격적인 살육극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계속 쌓여나가는 역겨운 시체들이 과연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가에 관한 여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들은 미처 알아챌 여유조차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들, 대체 그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국왕이 죽인 이들과 괴수가 도륙낸 시체들은 그저 필드 근방을 장엄하게 장식할 뿐인 ‘노리개’에 불과하고, 이 경기를 지켜보는 수 많은 ‘절대자’들 또한 그 참혹한 형세를 지켜보며 처음부터 의도했었던 불순한 희열을 마음껏 탐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진데.


“크하하하! 놈의 비겁한 꼴 좀 보라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싶어서 아주 안달이 났군 그래!”

크로노스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필드 내의 필멸자들을 향해 멸시 섞인 비난을 뿜어댔다. 치욕스런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사실, 모두가 무기력한 상태로 얼떨떨한 표정을 자아내고 있었기에 그러한 반응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일 지도 몰랐다.


“피...! 지금 당장 나에게 저 차고 넘치는 피를 내놓아라...!”

루나텐이 투기장 안에 진동하는 신선한 시체와 피 냄새를 맡고 태고적인 본능에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다. 그에겐 내면 깊숙한 곳을 차오르는 불결한 유혹을 충족하기 위한 어떤 대안이 시급했다. 그러나, 웬지 그의 옆에 서서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류자크는 그의 두 손을 간악하게 매만지며 초연한 웃음을 자아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확실히, 두 악마의 모습은 서로 상반된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전리품은 나의 것이다...!”

데키몬드 국왕이 투명한 유리관을 깨부수고 그 안에 들어있던 커다란 데스 웨폰을 꺼내들었다. 곧, 그의 육신에는 어둡고 불순한 에너지가 주변을 감싸고 배회했다. 그의 모습이 이렇게도 눈부시고 휘황찬란했던 적은 왕위 계승식을 제외하면 전혀 없었다고 봐도 좋았다.


“내가 보기에 이 시점에서 그는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는 완전히 돌았어!”

가신 한 명이 국왕의 광기어린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기겁했다. 그 비명은 예컨대, 죽음을 앞둔 자의 애절한 단말마(斷末魔)와도 같았다.


“잘 가라, 어리석은 자여.”

국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디몬 액시저가 그를 비난한 자의 뒤에 접근하여 냉혹한 태세로 덮치기 시작했다. 습격당한 그는 이내 온 육신이 갈갈이 찢어지고 으깨어져 한 줌의 핏조각들로 변모했다.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메스꺼운 구역질을 차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저희를 이 끊어질 듯한 고통에서 구해주십시오, 데키몬드 폐하!”

“물론, 그렇고 말고.”

데키몬드 국왕은 겁에 잔뜩 질린 가신들을 향해 순간적으로 어두운 빛줄기를 방출하더니 뒤이어 그 빛줄기들은 희생자의 몸을 감싼 후, 잿더미도 남기지 않고 모두 기화시켰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렇게 증발된 육신은 검붉은 구름으로 변모한 후, 때 맞춰 벌려진 국왕의 입에 한 치도 남김 없이 흡수당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것은 가련한 필멸자들의 영혼이 괴수와 맞서기엔 턱없이 부족한 국왕의 정기를 채우기 위해 강압적으로 빨아들여진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비참한 운명으로 여길 것인지에 관해서는 조금 이견이 있었다. 한낱 쓸모 없는 시체 더미로 허망하게 전락하는 길보다는 적어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쪽이 왕국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숭배하는 사악한 ‘절대자’들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여러모로 현명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것은 분명한 비극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기도 했다.


“힘이 넘치는구나.”

데키몬드 국왕이 극도로 간악한 웃음을 흘리며 빠르게 돌진하는 괴수를 향해 비장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크아아아아악!”

“후에, 지옥에서 다시 보자꾸나. 아둔하기 짝이 없는 존재여.”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그의 키를 훌쩍 넘는 길다란 데스 웨폰을 치켜들고 괴수의 크기와 비견될 만큼 엄청나게 거대한 암흑 에너지를 한껏 도출해냈다. 에너지가 뿜어낸 장엄한 파동이 대지를 뒤흔들었고 그 결과로서 희미하게나마 필드 안을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산산히 조각나버린 탓에, 심장을 조여오는 공포의 기운이 다시 주변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아아오!”

그런 한 편, 갑작스런 일격을 미처 회피할 수 없었던 괴수는 구형 에너지 덩어리를 얼굴에 그대로 받아내곤 전면의 부위가 완전히 박살나버리는 비참한 꼴을 맞게 되었다.


“그워어어어어!”

괴수의 얼굴은 대부분 소멸되고 신경인지 핏줄인지 모를 잡다한 줄기들이 한데 뒤엉켜 끊어진 형체만이 그대로 드러났다. 괴수는 뜨거운 열기에 전면부 전체가 참혹히 불타오르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오는 극도의 고통을 차마 견뎌낼 수 없었던 나머지 곧, 온몸을 격렬히 후들대며 필드 안을 미친 듯이 날뛰었다.


“오호라. 제법인걸.”

류자크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목격하곤 조용히 감탄을 자아냈다.


“내 일격을 직격으로 받아내고도 아직 죽지 않은 걸 보니, 아마 내가 네 녀석을 한참이나 간과하고 있었나 보구나.”

데키몬드 국왕이 의연한 태도로 괴수를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그워어어어어어어!”

눈은 커녕, 얼굴 전체가 잿더미도 남기지 않고 소멸당했으니 자연히 시야가 보이지 않았던 게다. 그 괴수는 온 몸에 살 떨리는 경련을 일으키며 온 사방을 날뛰었다. 괴수가 고삐 풀린 난폭한 짐승처럼 이리저리 나부대는 동안 발에 밟혀 으깨지고 짓눌러진 필멸자들의 시체는 필드에 정처 없이 한가득 쌓여만 갔다.


“꼴도 보기 싫으니, 이젠 죽어라.”

데키몬드가 마력을 그의 데스 웨폰에 응집시켜 크고 작은 수 많은 에너지 덩어리들을 끝도 없이 발산해냈다. 에너지 덩어리들은 크기를 막론하고 모두 날카로운 금속 조각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매몰차게 디몬 액시저의 육신을 찔러댔지만, 어쩐 일인지 정작 문제의 그 괴수는 전혀 개연치 않고 오히려 공격을 받아내는 족족 튕겨내기만 할 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괴수를 죽이기 위한 목적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뿜어내는 강렬한 빛을 통해 단순히 괴수의 위치를 살펴보려 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선택은 원래 의도와는 반대로 영 좋지 않은 사태의 전조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름이 아니라, 데키몬드의 위치를 감지한 디몬 액시저가 갑자기 그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워어어어어어!”

“크흐흐흐...”

디몬 액시저가 사나운 기세로 데키몬드를 한 번 내리찍자, 그의 팔이 일순간 잘려나갔다. 극한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그는 자조적인 웃음만 흘리며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 괴수는 이내 뜯어진 전면부에서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촉수를 움직여서 그를 완전히 포박한 다음, 사정 없이 바닥에 휘갈기더니 이내 필드의 끝자락을 향해 내팽겨쳤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이를 부산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많은 수의 악마들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희열에 열광했다.


“놈을 찢고 죽여... 놈이 가진 신선한 살점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모두 집어삼켜버려!”

“크하하하하하!”

데키몬드는 그런 치욕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살기 깃든 용맹이 가득했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그 때였다. 괴수가 그의 생명을 완전히 끊어버릴 심산으로 또, 그리함으로서 이 모든 사태를 종결시킬 작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마침 그도 최후의 심판을 고대하는 어느 죄인처럼 숙연한 태도를 취하며 가능한 한 많은 에너지를 끌어모으려 노력했다. 예컨대, 이는 무릇 작은 전신(戰神)들간의 대격전(大激戰)이라 논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 장엄한 결전이었다.


“이걸로 이젠 끝이다.”

그가 최대한의 힘을 짜내어 모은 거대한 구형 에너지가 섬뜩한 기세로 돌진하고 있는 육중한 괴수를 향해 정확히 적중하였다. 괴수는 그의 바로 앞에서 그런 참변을 당했기에 더더욱 피해가 극심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열기가 워낙에 뜨거웠던 탓에 마법을 시전한 데키몬드 마저도 화상을 입는 등의 처절한 댓가를 치뤄야만 했다. 비록, 그가 쏜 에너지 덩어리를 여과없이 그대로 받아낸 괴수의 몸이 산산히 쪼개지고 불타버린 것에 비하면 가소롭기 그지없는 미미한 흔적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

“크하하하하하하!”

어디선가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조롱 섞인 탄성이 터져나왔다.


“예상 외이지만 어쨌든 흥미로운 혈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에이든이었다. 그의 눈빛은 확실히 처음의 오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이제 제게 약속했던 영생을 주십시오.”

“그럼, 내게 가까이 오라.”

화염에 그을린 거무튀튀한 행색이며 다리와 복부가 일부 잘려나가 데스 웨폰으로 겨우 몸을 지탱하는 그의 가련한 처지... 모든 것이 다 표할 수 없을 만큼이나 참혹했지만 그에겐 실날같은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부터 고대해왔던 희망. 즉, ‘절대자’들이 그를 향해 내려줄 ‘축복’이란 것에 거의 근접하고 있었다. 그의 소망은 한 발자국 남짓한 가까운 거리에 놓여져 있었다. 그래서 여차하면 모든 것이 그의 바램대로 무사히 끝날 판이었다.


“무릎을 꿇라.”

그가 숭배하는 ‘절대자’의 명령이기에 당연히 따라야만 할 처사였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소망하는 ‘어떤 것’에 관한 오랜 숙원을 원 없이 풀기 위해서라도 필히 순응해야만 했다.


“...”

에이든의 짙은 흑마석(Devilstone) 왕좌 아래 무릎을 꿇은 데키몬드 국왕. 모든 악마가 교묘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에이든의 광기 깃든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곧, 그가 그를 향해 경배하는 데키몬드의 머리에 조용히 손을 갖다 대자 갑자기 웅장한 어둠이 근방을 뒤흔들며 소용돌이쳤다.


“크흐흐흐...”

그러자 에이든의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새어나왔다. 그 모습은 언뜻 보기에도 섬뜩함과 초연함이라는 두 개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에이든의 손이 닿은 후, 데키몬드의 육신에는 이례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그의 몸이 이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육중해지고 단단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이내 그의 몸 곳곳에는 흡사 불필요할 것처럼 느껴지는 이질적인 뿔들과 갈퀴, 포자들이 솟아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섬뜩한 형체에 더욱 더 기괴한 느낌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사악하기 그지없었던 나머지 필멸자와 악마가 반쯤 섞인 듯한 형상을 연상케 하였다.


“이제 다 되었다.”

그렇게 세례식은 끝났다. 이 괴이하고 흉측한 모습이 진정 데키몬드가 스스로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갈망하는 것이었던가.


“그대는 이 순간부터 영원한 삶을 사는 불멸적 존재로 거듭났다. 하지만, 그러한들 우리의 숭고한 은총을 감히 지나칠 순 없는법. 이제 그 댓가로 우리 군단에 가세하고 부여받은 본분을 행함으로서 네 존엄한 신앙심을 더욱 확고히 할 지어다. 알겠는가?”

“크르르... 당신의 명령을 따릅니다.”

그는 타락하여 반신반인의 모습으로 거듭나있었다. 예컨대, 그가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궁극의 종교적 숙원을 마침내 이뤄낸 것이었다. 나약한 필멸자의 몸으로 감히 악마의 속성을 부여받아 드높은 영광을 탐닉하고자 했던 이들은 전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정작 그들 중에서 선택받았던 자는 과거를 통틀어 그 유례가 없었다. 그는 비록 끔찍하고 섬뜩한 육신을 가졌으나, 어쨌든 가장 첫 번째로 무한한 영예를 누린 필멸자라는 점에서 대단한 명예를 부여받게 된 것은 가히 숭고하다고 논할 만했다.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YdIBx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