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무명논객
필자가 세미나를 진행하며, 플라톤에 관해 발제를 한 일이 있었다.(http://blog.daum.net/liveinthought/76) 이 글은 발제문을 가공, 첨가하여 필자의 생각과 소고를 덧붙여 작성한 글이다.
플라톤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통념적으로 플라톤의 ‘철인 정치’ 개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철인이 통치를 하는 국가, 수호자와 생산자계급이 철인의 통치 아래 각자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이상적인 국가라는 플라톤의 주장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플라톤의 ‘철인’에 주목하게 된다. 철인이야말로 독재자가 아니던가? 플라톤은 철인의 독재를 옹호한 반민주주의자가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과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다소 생소하고 뜬금 없어 보이기는 하겠으나, 플라톤과 민주주의를 기막히게 연결한 현대 철학자가 있다. 바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이다. 우선 플라톤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는 것으로 시작하자.
동굴의 우화로부터
여기 동굴이 있다. 동굴 안에는 죄수들이 갇혀 있고, 그들의 목과 발은 사슬에 묶인 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들은 오로지 동굴의 벽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의 뒤에는 모닥불이 하나 놓여 있으며, 죄수들은 움직일 수 없기에 모닥불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그들은 오로지 전방의 벽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것은 불에 의해 비친 그림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진짜라고 믿고 있다. 자, 이제 이들의 목과 발에서 사슬을 풀어 그들을 돌아보게 하자. 그들은 불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물들을 볼 것이고,이제까지 자신이 보아온 것이 불에 비친 그림자라는 사실에 분노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저것(그림자)이 진짜다!"
아주 유명한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 대해서는 다들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진짜와 가짜 사이, 즉 실재와 거짓 사이의 간극을 표현한 일종의 말장난(?)이지만, 이것이 함축하는 철학적 의미를 재규정한다면 어떻게 될까?─플라톤이 형이상학의 대부임을 기억하자. 즉, 우리가 논하고 싶은 것은 '실재'이며, '거짓'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단어들을 좀 더 세련되게 바꾸자면, '가지계'(실재)와 '가시계'(거짓)로 표현할 수 있다. 가지계란 우리 인간의 이성이 담보하는 부분이며 가시계는 우리의 감각이 인지하는 세계이다. 이것을 다시 둘로 양분한다면 우리의 존재(가시계)와 의식(가지계)의 차원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는 자신의 철학적 진리를 규명하기 위해, 세계를 실재와 가상으로 나누어 놓았고 자신의 철학적 진리를 '실재'에 귀속 시켰다. 그것이 '이데아'개념인 것이다.
이데아로부터─『국가』로
이데아는 명실상부 플라톤이 창안한 최고의 관념적 개념이다. 이데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이성으로써만 인지될 수 있는 초월적 공간인 셈이다. 우리의 눈과 귀와 입과 코가 감각하는 모든 것들은 이러한 이데아의 표현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우리 인간이 언어로써 이야기하는 것(=일반 의견, doxa) 역시 이데아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며, 자명한 진리는 이데아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 없이 이데아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아론의 연장선상에서, 플라톤은 정치체제까지 자신의 논의를 확장시킨다.플라톤에게 가장 높은 철학적 진리는 이데아에 존재하므로 국가 역시 이러한 이데아를 구현하는 장치가 되어야만 한다. 여기로부터 바로 그 유명한 "철인 정치" 개념이 나오는 것이다. 이데아에 가장 가까운 '철인'들이 통치자 계급으로써 국가를 통치해야만 하며,그러한 철인들을 보조하는 역할로써 군인인 수호자, 노동자인 생산자 계급이 존재한다.언뜻 보면,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경우 플라톤은 전체주의의 화신인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 오늘날 민주주의가 이토록 발달한 현대 사회에 소수의 통치자 계급이 정치를 온전히 감당한다니! 그에게 이데아란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그에게 있어 정치 행위, 즉 국가를 다스리는 일이란 이데아를 구현하는 일에 가까웠다.
플라톤의 『국가』는 최초의 정치철학 서적임과 동시에 이상론(理想論)을 제시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을 상상하는 능력을 가지고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철학의 본연의 임무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이상임과 동시에 ‘가능’한 것이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철인의 독재국가를 이룩하자는 소리가 아니니까.
민주주의에 대한 조롱?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플라톤은 당시 그리스에 꽃피웠던 민주주의를 조롱하기에 이른다.그가 보기에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그리 훌륭한 정치체제는 아니었다. 다수의 대중이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 말들은 플라톤이 보기에 이데아와는 동떨어진 한 갓 '흉내냄(에이돌론)'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두고 신랄하게 조롱한다. "어리석은 자들의 향연"이었던가. 플라톤에게 있어 진리란 이데아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일개 범부들이 내세우는 의견(doxa)이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러한 플라톤의 의견은 다양한 의견의 개진과 토론을 통해 결정되는 민주적 의사결정의 장을 무시한다는 평이 있다.
과연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부정했을까? 알랭 바디우는 여기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플라톤을 고집스럽게 옹호하는 그에게 철학적 진리란 모든 의견 중에 특이한 어떤 의견을 진리로써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만약 그렇다면 어떤 의견도 특별한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이 훼손될 것이다.) 오히려 철학적 진리란, 모든 의견들의 유효성을 중단시키는 사건으로써 '선언'되는 것이다. 진리란, 단순히 어떤 의견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비교도 거부하는 것이 된다. 가령, 프랑스 혁명에서 발표된 「인권 헌장」에서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원칙이 발표되었을 때, '어떤' 인간인지, '무슨' 법인지, 그리고 그러한 원칙을 '누가' 말했는지에 대한 '토론'을 거부한다. 이것은 누구에 의해 발화되든지 간에 즉각적으로 진리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인권’이 보편적 진리로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그 위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플라톤의 ‘진리를 이끌어내는 사유’로써의 철학이 바디우에게 와서는 ‘진리로써의 정치’를 사유하는 맥락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디우라는 철학자가 플라톤을 독해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단순히 ‘당연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정치’가 작동한 결과물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보다 ‘보편적인 것’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 바디우가 옹호하는 플라톤의 ‘진리’에는 정치의 ‘가능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더 많은 보편성을 위하여
오늘날 민주주의는 단순히 ‘상대적인 것’ 내지는, 때때로 극우파들의 준동에 의해 언제든 ‘폐기’되거나 ‘제한될’ 수도 있는 도구적 성격으로 전락한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옹호할 수 있는, 옹호해야만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가?
민주주의 속에서 우리는 자유를 부여받았고, 그 자유에 의해 ‘관용’이라는 도덕까지 의무로써 부여받았다. 민주주의의 오랜 기획은, 그것이 지닌 보편성(인민 참정권 등)에 의해 보다 정치를 풍부하게 만들 것이라는 기대,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문처럼 ‘행복의 정치’를 가능케 할 주체의 자리를 마련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는 기대했던 민주주의의 효과와는 다르게 ‘만연한’ 상대주의로 인하여 정치의 문제를 단순한 기호의 선택 문제 내지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냉소의 대상이 되었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새누리당이냐, 민주당이냐”라는 단순한 정치적 선택에 노출되어 있을 뿐이고, 후자의 경우 우리에게 정치는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바디우는 정치의 기획은 ‘공동의 것(The Commons)’을 복원하는데에 있다고 강변한다.필자는 바디우의 주장에 격렬하게 동의한다. 정치란, 누구의 선택과 기호,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를 사유하는 능력과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공론의 장으로 기능해야만 한다. 바디우의 이러한 주장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타당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대체 무엇인가? “민주당이냐, 새누리당이냐”라는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라면 필자는 그 선택지를 걷어차길 권한다. 대신, 이렇게 질문하자. “무엇이 정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