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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페미니즘』─페미니즘 입문자들을 위하여
게시물ID : sisa_4579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무명논객
추천 : 12
조회수 : 635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3/12/04 19:40:13

『페미니즘』―페미니즘 입문자들을 위하여


Written by 무명논객


다소 간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대하여 생소한 것도 사실이고,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대하여 일종의 반감 내지는 혐오감에 사로잡혀 있기도 한 마당에 페미니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당췌 무엇이냐면, 오늘날 우리가 ‘토론되어야 할’ 당위의 의제로서 설정된 ‘평등’에 대한 문제들을 올바르게 바라보기 위하여 페미니즘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일종의 괴물과도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사악한 여성부는 남성의 인권을 짓밟고 오로지 여성의 인권만을 신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집단이며, 혹여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반드시 남자가 집을 마련해야만 결혼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많은 사람들에게 반감을 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백히 이러한 인식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하는 것이기에 나의 이 글은 페미니즘에 대한 ‘통념적 오해’들을 깨고자 쓰여진 글이다.


Female과 Woman 사이


페미니즘에 관한 한, 우리가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단어는 아무래도 ‘여성’일 것이다. 여기에서 ‘여성’이 의미하는 바는 이중적이다. 첫 째는 생물학적 차이로써의 ‘여성(Female)'이고, 둘 째는 사회적 존재로서 역할과 위치를 부여 받은 ’여성(Woman)'이다. 페미니즘에서 이러한 ‘여성’의 문제, 즉 그것이 생물학적 차이인가, 아니면 남성과의 완전한 평등을 전유해야 하는가라는 지점은 오랜 기간―심지어 현재까지도―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논쟁 화두였다. 한 편에서는 그것이 여성과 남성 간의 화해할 수 없는 ‘차이’임을 강조하는 주장을 펼쳤고, 다른 한 쪽에서는 남성들과 ‘똑같아지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였다. 전자는 생물학적 관점을 인용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 하였지만, 페미니스트 제인 프리드먼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완전한 사회적, 정치적 시민권에서 여성들을 배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에 사용되어 왔다”1)고 지적한다.


사실 우리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언급함에 있어 대개 이용하는 것이 생물학적 관점이다. 예컨대, 여성들은 심리적으로 보다 유약하고 정서적으로 배려심이 강한 반면 남성들은 보다 보편적 원칙에 입각하고 논리적 사고에 능숙하다는 식이다. 이러한 ‘생물학적 관점’들은 여성을 보다 ‘자연적인 존재’로 격하시키고, 남성들을 보다 정치와 같은 공적 영역에 포함되기에 적합한, ‘문화적인 존재’로 격상시킴으로써 여성의 활동 범위를 가정에 국한시키는 논리로 오용되곤 하였다.2)


여전히 이러한 ‘차이’의 논리가 여성들을 사회적 존재로서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기보다, 사회를 위계화하고 구조화하는데 기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가장 가까운 예로, 오늘날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임금을 적게 받는 것을 ‘능력의 차이’로 폄훼하는 폭력적인 논리가 있겠다.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사회적 업무에 적합하며, 따라서 남성들이 여성보다 임금을 더 받는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종종 이러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이 ‘차이의 논리’에 가로 막히는 것을 두고 일찍이 사회학자들은 ‘유리천장’으로 개념화해왔다.


한 편에서, 이러한 ‘차이’의 개념을 언급할 때 또 한 번 논쟁이 제기되는 부분이 있다.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바는 여성은 조신하고 얌전해야 하며 남성은 우람하고 근육을 지닌 강함을 뜻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통념은 페미니즘 아래에서 성(Sex)과 성역할 혹은 성 정체성(Gender)이라는 논의로 해체된다. 남성이 반드시 ‘남성적’이어야만 할 이유는 없으며, 여성이 ‘여성적’이어야만 하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생물학적 차이와는 다르게, 성역할은 사회적 학습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페미니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시몬느 드 보봐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으며, 여기에 덧붙여 제인 프리드먼은 이렇게 지적한다.


“사람은 인간 종의 여성(female)으로 태어날 수는 있지만, ‘여성(Woman)’을 만드는 것은 문명이며, 이 문명은 무엇이 ‘여성적인 것(feminine)’인지를 정의하고 여성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행동하는지를 처방한다.”3)


이제까지의 생물학적 결정론과는 다르게, 분명히 젠더에 대한 분석은 페미니즘의 논의를 진전시키는데 기여하였으며 나아가 젠더에 관한 논의는 단순히 ‘여성’에 국한한 논의가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과정으로 강조점이 옮겨지게 됨으로써 동성애의 문제 역시 포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들은 전반적으로 ‘평등’의 문제에 입각한 것이며, 따라서 ‘생물학적 차이’로서의 여성과 여성의 몸에 관한 논의는 진전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현재에 와서는 도덕성, 윤리, 모성애와 같은 ‘여성적 특질’들이 다시 비춰짐으로써 ‘차이’에 관한 논의가 다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평등-차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는 학자들까지 있다.


여성과 시민권―정치와 여성


페미니즘의 문제는 이제 섹스와 젠더를 넘어서 정치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정치를 분석하기 위해 출발하는 지점은, 여성들이 정치로부터 배제되어 왔다는 지점이다.4) 심지어 오늘날에도,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과소대표’되고 있으며, 정치에 관한 한 남성적 지위는 여성의 그것보다 강력한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비록 현재는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에 의해 여성 할당제와 같은 평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도들과 사회적 구조 사이의 괴리는 여전히 메워지지 않고 있으며 제도조차도 이론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에 있어서, 이러한 ‘남근주의’들은 사실 너무도 자연스럽기에, 우리는 종종 그 논리적 함정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것을 논의하기 위해, 근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논리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정치 영역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현실적 토대는, 서구 정치제도의 기틀을 이루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사상의 기반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구의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는 성공적으로 안착한 이념으로 평가받지만, 그 이면에 여성들이 배제되어 왔음 역시 사실이다.


근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시발점은 생활의 영역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나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유주의에서 사적 영역은 자유의 공간으로 여겨짐으로써, 남성은 이 공간에서 권력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반면 공화주의에서 진정한 자유의 영역은 공적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공간에서 능동적인 시민권과 참여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5) 이 두 사상의 전통 속에서, 여성들은 그저 사적 영역에 유폐되어 있을 뿐이며, 종종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겨진다. 동시에, 이러한 사적 영역의 행위와 사건들은 공적 영역의 입법가들에게는 관심 밖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정치권력은 언제나 ‘남성적인 것’으로 상징되었으며, 동시에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구별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가정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가정에 도전하게 되었다. 캐럴 페이트먼(C. Pateman)은 근대 자유주의 계약이론이 성적 계약 관계를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근대 자유주의 이론이 상정하는 ‘개인’은 젠더 중립적인 것이라 말하였다. 프레이즈(Praisse)는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평등의 문제로부터 ‘정체성의 문제’로 확대함으로써, 정치에서 배제된 여성들이 보다 완전한 시민권을 획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


공과 사의 분리는 정치의 개념을 협소하게 만들었고, 때문에 정치로부터 여성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기에, 여성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통로는 보다 덜 공식적인 것이 선호되었다. 1719년 올랭프 드 구쥬는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응하여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구쥬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여성은 연단에 오를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여성의 참정권 운동이 두드러지게 된다.


오늘날의 페미니즘


페미니즘이 단순한 남-녀 간의 평등 문제로 인식되는 통념과는 달리,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남녀의 섹스와 젠더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도구를 통해 세계를 구조화한다. 앞서 언급했듯, ‘유리천장’이라는 개념은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이 남성 중심적으로 구조화된 사회에서 더 이상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또한, 젠더의 문제는 단순히 여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를 포괄하고 있으며, 동성애의 문제 역시 페미니즘의 한 부분으로써 다루어진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에 비해, 오늘날의 결과물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분명 많은 부분에서 여성들의 권리는 신장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고용의 문제, 육아의 문제, 복지의 문제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들보다 그 영향력과 지위가 낮다. 더불어, ‘정치적인 것’이라는 질문에 한해, 여성들이 정치에서 여전히 배제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참정권은 보편적으로 보장되게 되었지만, 여전히 대표성의 한계는 존재하며, 공-사의 구분이라는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의 전통 아래에서 ‘정치적인 것’의 경계를 확장해야 한다는 목소리 역시 높다. 이제, 페미니즘의 문제는 특수한 억압(강간 등)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운동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서문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의 페미니즘은 그 토양이 그다지 좋지 않다. 오랫동안 가부장제 구조를 유지해왔으며, 여전히 가부장제의 압력 아래에 놓인 사회임과 동시에, 경제적 악화는 남성들에게 지워진 특권들을 ‘의무’로 탈바꿈시켰다. 오늘날, ‘가진’ 남성들은 여성을 ‘소유’할 수 있지만, ‘못 가진’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버림’받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남성연대”라는 극우적 가부장주의 단체가 등장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흔들려가는 가부장제 속에, 남성-여성 간의 고전적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페미니즘을 단순한 여성 우월주의 쯤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전개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페미니즘을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평등에 관해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나아가 화해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갈등을 표면 위로 부상시키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늘날 퍼져있는 동성애 혐오에 관해 우리가 꺼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페미니즘이다. 나의 이 짧은 글은 페미니즘에 관해 깊게 성찰해주지도 못하고, 그저 개괄만을 알려줄 뿐이기에 혹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공부해보길 권한다. ‘가장 정치적인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서도 좋고, 아니면 ‘남녀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좋다. 중요한 것은, 페미니즘은 그 어떤 것보다도 뜨거운 감자이며, 오늘날의 사회적 문제와 갈등을 바라보는 훌륭한 창구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1) 제인 프리드먼, 이박혜경 옮김, 『페미니즘』, 이후 출판, p.31

2) 같은 책, p.32

3) 같은 책, p.38

4) 같은 책, p.58

5) 같은 책, p.59

6) 같은 책, p.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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