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시국에 부쳐―저 궤변론자들에 맞서
Written by 무명논객
우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처해 있습니다. 고려대로부터 시작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삶에 가장 뜨거운 화두를 던졌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안녕하지 못함’을 고발하는 진실된 주체의 ‘선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정치적 사건’으로 읽어야 하며, 선언된 진실(truth)들을 다시 한번 전유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안녕하지 못함’은 우리 모두가 가진 진실이었지만, 그것을 선언함으로서 스스로 주체가 되려는 자들은 오히려 구조적 폭력과 억압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국가와 자본 앞에 내던져진, 우리의 진실들(우리가 ‘안녕하지 못하다’는 것)은 한없이 작고 초라하며 연약하기까지 합니다. 식민지화된 생활세계 속에서, 우리의 진실들은 너무도 쉽사리 외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를 가로막는 장벽을 넘어 우리는 우리의 진실을 세상에 선언하고, 진정한‘주체’로써, 우리의 진실을 지켜내고자 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선동되었다고,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라고. 저는 묻겠습니다. 우리의 정치적 진실을 폄훼할만큼, 우리들의 동기, 의도, 진심을 ‘선동’따위의 말로 깎아내릴만큼 당신들은 정치적 진실들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단언컨대,이는 ‘선동된’ 우중들의 바보 같은 행동 따위가 아닙니다. 철도 민영화라는 쟁점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진실을 선언하는 주체로써, 우리의 진실을 획득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정치적 사건’은 명백히 바리케이트로 갈라져 있습니다. 진실을 선언하고 그것을 획득하려는 자와, 진실을 공격하는 자들로 갈라졌습니다. 대자보를 찢는다던가, 철도 민영화는 거짓이라며, 정부를 믿어야 한다며 신앙 활동을 하는 자들보다도, 마치 자신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양, 자신을 위장하는 소피스트(궤변론자)들이야말로, 우리의 대의를 훼손하는 자들입니다. 저는, 아니 우리는 이 바리케이트의 현장에서 진정으로 당파적인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고려대에서 처음으로 자보가 붙었을 때, ‘고려대라서 그런 것 아니냐’라는, 학벌주의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자보는 고등학교, 중학교, 심지어 기자와 지역주민에 이르기까지 대자보를 붙이고 자신들의 ‘안녕하지 못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더 이상 우리를 갈라놓는 분할의 논리(학벌, 지역, 나이, 계층, 직업군)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정치로부터 ‘배제되어’ 있었고, 그렇기에 ‘안녕하지 못함’을 우리 모두의 문제로 올림으로써 공동선(Common good)을 향한 첫 번째 윤리적 위치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우리가 분할의 논리를 넘어 평등의 논리를 전유할 때, 진정한‘말의 무대’가 성립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대자보 시국은, 우리가 분할의 논리를 넘어섰으며, 또한 우리가 ‘말을 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우리가 분할의 논리를 넘어서 진정으로 평등해질 때, 즉 우리가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보편적 위치를 획득할 때, 진정한‘정치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정확히 이 지점에 서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파적 입장에서, 우리의 이러한 표현과 분노들이 모두 정당함을 선언해야 합니다. 누군가 우리를 향해 “순수하지 못하다”는 둥,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바보들”이라는 둥의 소리는 사실 유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탈정치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우리의 문제를 정치로써 해결하기를 욕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공간을 획득하기 위한 현장의 바깥에서, 공적인 모든 것에 대해 조롱과 유희를 일삼는 저 냉소주의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우리의 ‘진실’을 지켜내야만 하겠습니다.
끝으로, 저는 ‘보편성’에 관해 말을 하고 싶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사유하는 자가 주체의 자리를 획득할 수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활 논리 앞에 우리의 존재는 부정 당해 왔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사유할 수 있는 위치를 획득해야 합니다. 우리는 ‘안녕’이라는 정말로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 우리들이 ‘개인적 문제’라고만 여겨왔던 것이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정치적인 문제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권력과 자본에 의해 가려진 우리의 진실들을 드러냄으로써 우리 스스로 주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보편적 진실을 획득하기 위해, 우리 앞에 놓여진 연약하고 초라한 진실들을 저 궤변론자들로부터 방어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