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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이군요. 오일팔항쟁관련 간단한 정리입니다.
게시물ID : sisa_682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haeo
추천 : 8/6
조회수 : 715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09/05/18 02:40:00
 최선의 지도자는 백성의 마음을 따르며, 그 다음은 이익으로 백성을 이끌고, 그 다음의 지도자는 백성들을 설득하며 가르치려 들고, 그 다음은 힘으로 백성을 잡으려 하며, 최하의 지도자는 백성들과 정면으로 다투는 것이다. 사마천(내가 고자라니~)의 사기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오일팔 항쟁은 최하의 지도자가 큰 권력을 잡았을때 국민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알려주는 가슴아픈 교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일팔의 정치적인 배경부터 이야기하자면.오일팔 일어나기 전에 큰 변화가 일어나죠. 박정희씨는 임기말 유신강행을 했고 그로인해 정국이 어수선해졌습니다.많은 반대 특히 부마항쟁등은 많은 시위로 정권유지에 대한 불안감에 떨었죠. 그러다가 심복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총에 죽고 맙니다. 그리고 드디어 전두환이가 정권을 장악합니다.
 군대를 통한 쿠데타로 정부를 이제 막 장악한 두환이는 무척 불안했고 결코 시위나 소요사태의 확대를 허락하지 않았죠. 학교 휴교하고 계엄령을 선포~! 나라전체가 살얼음 판을 걷습니다. 이런 예방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는 크고작은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예방책으로 야권 지도자와 많은 재야 인사들을 구속 혹은 가택연금이 시킵니다. 

 그런 과정에서 드디어 전라도의 영원한 선상님인 김대중 대통령을 구속해 군사재판에 넘겨 버리죠. 광주는 난리가 납니다. 왜 김대중은 구속하고 김영삼은 냅두었을까? 일단 부마항쟁을 통해 전두환은 김영삼을 구속할 경우 난리가 날꺼라는 것을 잘 배웠기에 김영삼은 꽁꽁 묶어두는 선에서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씨는 이미 박정희정권을 통해 좌익으로 이미지가 박혔기에 빨갱이로 몰아서 군사재판에 회부하기 쉬웠고 전라도는 공수부대를 통해 강력히 진압해 맛을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을 듯 합니다.(주관적인 생각)

 이일로 오일팔항쟁이 벌어지죠. 보통 단순히 시위를 학생이 주도하는데 김대중구속은 많은 시민들에게까지 호응을 얻습니다. 그러자 군은 공수부대는 소요사태를 조기 진압하기 위해 강경 진압을 하죠. 이런 과정에서 공수부대는 시위주동자인 학생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에게 까지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해서 수많은 사상자가 내고 말죠. 이런 강경진압은 학생에서 전 광주시민으로 시위가 번져 버리는 일을 만들고 맙니다. 그러자 군은 시민들을 향해 발포..이에 대항해 시민들은 경찰서를 털고 예비군 무기고를 털어서 무장을 하고 공수부대와 싸워서 도청을 점거합니다. 결국 군은 광주에서 후퇴하고 광주전체를 고립시키고 며칠후 급습해서 도청에 있던 시민군을 패배시키고 광주항쟁의 매듭짓습니다. 

 많은 매체(책이 아니더라도 모래시계나 화려한 휴가등)를 통해 알려 졌겠지만 공수부대의 잔혹성은 상당했습니다.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고 온 도시가 피와 울음에 잠기었습니다. 시민을 보호해야 할 군이 권력의 개가 되어서 광주시민을 물었고 광주시민들은 총칼의 공포에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대항했습니다.그리고 오일팔은 광주와 전라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은 흉터로 남게 됩니다. 

 많은 시위가 일어나고 많은 시위자와 경찰들이 다치고 있는 요즘 다시 한번 잘 곱씹어 볼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 하게 되니깐 말이죠.

~전에도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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