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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와 부사관 이야기.
게시물ID : military_373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eio
추천 : 61
조회수 : 11388회
댓글수 : 42개
등록시간 : 2014/01/20 03:21:39
 
 상병을 달고 나의 군생활이 한창 무르익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6개월 간의 해안생활을 마치고 대대로 복귀해 대대상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BOQ앞을 지나가는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장교와 부사관들의 군생활은 어떨까? 군대란 계급사회 속에 살다보면
사병들 사이에서는 사병들만의 병영문화가 있었고 그로 인해 이런저런 에피소드나 갈등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장교나
부사관들도 우리처럼 그들만의 룰이나 규율이 있는걸까? 갑자기 일어난 호기심은 파문처럼 내 마음속에서 번져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난 간부들을 평소보다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나같은 일반사병이 자주 볼 수 있는 간부라고 해봤자 소대장이나 부소대장 정도였고 그마저도 퇴근후에는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그때까지 내가 관찰한 결과에 의하면 아무래도 사병출신이 많은 부사관 같은경우는
정해진 규율을 그대로 따르기 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가는 방식을 선호하는 유형이 많았고 장교같은 경우에는 왠만하면 정해진
규율대로 행동하려는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부임초기 같은 경우엔 그 정도가 더 심한 편이었다. 작업을 할때도 소대장이
정해진 복장과 정해진 시간에 맞춰 작업을 진행하는 스타일이라면 부소대장은 편한 복장과 편한시간에 작업을 진행하는 스타일이었다.
우리들이 느끼는 데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부사관들 같은 경우는 자신이 경험을 해봤기에 내무생활에 관대한 편이었고 장교의
경우는 간혹 정말 사소한 부분까지 체크하고 넘어가려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조금 불편한 점이 있는것도 사실이었다.
지극히 내 개인적인 느낌에 의하면 부사관들이 동네 노는 형 같은 느낌이라면 장교들은 자율학습 시간에 칠판에 떠든사람이라며
내 이름을 적는 부반장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도 약간의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 소대장과 부소대장을 관찰한 결과 아무래도 장교들은 장교들을
대할때가 더 편해보였고 부사관들은 부사관들을 대할때가 더 편해보였다. 가끔 부소대장이 옆소대 부소대장이나 탄약관을 대할때는
정말 동네 형동생 대하듯이 편하게 대한다면 소대장과 함께 있을 때는 뭐랄까 데이트 초기의 연인들이나 교양수업에서 처음 만난
같은조 조원을 대하는 느낌이랄까. 서로 배려는 해주려 노력하지만 약간의 어색함과 뻘쭘함이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렇게 소대장과 부소대장을 관찰한 결과 무협지에 빗대어 얘기하자면 정파와 사파같은 느낌의 차이가 난다고 결론내렸다.
소대장이 그건 무림의 도리에 어긋나는일이오. 절대로 안되오 무량수불.. 이런 느낌이라면
부소대장은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전부 다 쓸어버려라! 크하하하하 이런느낌이었다.
 
이렇게 홀로 결론을 내리곤 나의 호기심도 조금씩 식어갔다. 그렇게 소대장과 부소대장을 관찰하는 일에도 흥미를 잃어갈때 쯤
나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되었다. 그들도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된 계기는 대대 지휘통제실 상황병 땜빵근무를
나갔을 때였다. 원래 지통실 상황병 근무는 본부중대 계원들만 나가는 근무였지만 갑작스레 생긴 결원으로 중대마다 땜방근무를 나가야
했고 우리 중대에선 내가 뽑히게 되었다. 다행히 특별히 알아야 할 일이나 해야할 일은 없고 전화만 잘 받으면 된다는 말에 걱정은
덜했지만 날 불편하게 한건 근무 설 때 간부들이 엄청 많다는 것이었다. 일단 당직사령 자체를 각 중대 중대장이나 고위간부들이 서기
때문에 그것부터가 날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본부소속 장교나 부사관들이 시도때도 없이 들락날락 했기 때문에 항상 소대장과
부소대장 만 보고 지내던 나에겐 색다른 경험이었다.
 
처음 지통실에 들어갔을 때 내 눈에 들어온 풍경은 중대장에게 폭풍갈굼을 당하는 인사장교의 모습이었다. 처음보는 풍경에
나는 움찔했지만 본부소속 사병들은 이미 익숙한 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때부터 나의 상상과는 다른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지통실 안의 분위기는 나의 상상과는 사뭇 달랐다. 서로 모여 의견을 제시하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장교들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사실 그런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곳에서 내가 본 풍경은 툴툴대며 대대장 커피심부름을 하는 인사장교의 모습과
졸다가 뒷통수를 맞는 정훈장교, 처음 전입와 이등병처럼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며 각잡고 앉아있는 신임소위의
모습같은 나에겐 생소한 모습들 이었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건 인사장교였다. 왜 멀쩡한 당번병이 있는데 대대장 커피심부름을
하고있는지 왜 보이기만 하면 다른 간부들에게 욕을 먹는지. 몇일이 지나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고문관이다.
 
그랬다. 장교들 사이에서도 고문관은 존재했다. 그리고 그는 고문관이었다. 땜빵근무를 나가는 일주일 남짓 그는 볼때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쳤고 그때마다 갈굼을 당해야 했다. 근무 마지막 날. 그날 당직사령은 작전장교였다. 그는 부대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리들 사이에선 악마로 불리웠고 행정병들 사이에선 부두술사로 불리었다. 당직 사령을 설 때 그의 취미는 위병소나 행정반을
기습해 근무자들을 당황시키거나 영창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악마라 불렀다. 
그의 또다른 취미는 행정병들 야근시키기였다. 멀쩡한 행정병을 과도한 업무로 좀비로 만들었고 실제로 한 병사가 과도한 업무를
못이겨 탈영을 시도하기도 했다. 처음 대대생활을 하던 때, 식사를 하러 가다 식사를 마치고 오는 작전병 한 무리를 본 적이 있다.
턱까지 내려오는 다크서클에 동공은 광채를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영혼 없는 발걸음으로 걷는 그들의 입에선 이모텝... 이모텝..
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패잔병들을 보는 듯 한 그 모습은 나의 뇌리에 깊숙히 박혔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게 바로 작전장교였다.
 
행여 봉변이라도 당할까 나는 밤새 긴장한 채 근무에 임했고 마침내 아침이 밝아왔다. 이제 아침회의만 마치면 모든게 끝이었다.
하지만 사단이 일어난건 그 때였다. 회의 시작시간이 다가왔지만 인사장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거의 30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보다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차마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누군가는 그의 최후를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나는 끝까지 그를 지켜봤다. 하지만 의외로 작전장교는 별말 없이 자리에 앉으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담담한 그의 말에 나는 그래도 아직 그에겐 붉은피가 흐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리에 앉은 인사장교를 물끄러미 보던 작전장교는 입을 열었다. 이야~ 너 전투복 좋다?
무슨말인가 싶어 인사장교를 보니 인사장교는 팔쪽에 연필꽂이가 달린 사제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잠잠하던 작전장교의
입에서 온갖 갈굼들이 방언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왠지 들으면 들을수록 그리운 말들의 향연이었다.
중위 나부랭이가 사제 전투복을 입네 어쩌네 짬이 찌질하네 어쩌네 이제 좀만 더 있으면 자크달린 전투화도 신겠다? 라는 둥
주로 우리가 후임들을 갈굴 때 나왔던 단어들이 그대로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강도는 차원을 달리했다.
기껏해야 1년 남짓 숙성된 갈굼을 날리던 우리에 비하면 그의 갈굼은 종갓집 장맛과도 같은 깊은 맛이 있었다.
단어 하나 하나가 심장을 후벼파고 옆에 있던 우리들의 멘탈까지 산산조각날 것 같은 한마디 한마디가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인사장교의 영혼은 지통실을 떠난것처럼 보였고 그렇게 나는 그들도 그들만의 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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